여정
오·탈자 지적을 바랍니다.
이로써 나는 받을 것은 받았고 또 줄 것은 주었다.
아랍에게서는 사라질 문화유산을 보존했고 또 그 문화유산을 받았으며 인도에게서는 몇몇 베다를 받고 고려고약을 전했으니 채권도 채무도 없다 할 것이다.
물론 당장에는 아랍은 손해를 보았다고 할 것이고 인도는 이익을 보았다고 할 것이지만 미래에는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랴. 서로가 주고받은 것은 분명하고 거래라는 것은 본래 누군가는 손해를 보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이익을 보기도 하는 법 아니겠는가.
비베카난다에서 머문 후 바다호가 인도 아대륙을 거슬러 오르다 며칠이 지나지 않았을 무렵 오뜨겅이 소리쳤다.
“한, 바다 속에 암촌지 뭔지가 있다. 배를 멈춰야 해!”
급히 돛을 접고 닻을 풀어 겨우 배를 멈추고 오뜨겅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과연 바다 속에 어떤 구조물이 있다.
그제서야 생각이 난다. 이곳에 인도아대륙과 스리랑카 섬을 연결하는 라마의 다리Rama Setu가 있다는 게 말이다.
‘이런, 이 다리를 생각하지 못했군. 하긴, 21C 당시에는 물 위로 드러난 부분이 거의 없었으니까.’
현재의 아담의 다리는 21C의 그것과는 달리 해저 밑으로 가라앉은 부분이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얕게 가라앉아 있어 바다호가 지나갈 수 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아마 아지즈의 경우는 아무런 문제없이 배가 지나갔겠지만 바다호는 좀 더 흘수가 깊으니 반드시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자, 다들 물속에 들어가 바다호가 건널 정도로 깊은 곳을 찾아라. 찾지 못하면 우리는 오른쪽의 커다란 섬을 우회해야 할지도 모른다.“
내 명령에 잔잔한 바다를 보고 있던 후세인이 먼저 뛰어드니 경쟁이라도 하듯 미시드, 아민이 뛰어들고 곧 이어 아직은 어린 야세르나 엘마스마저 뛰어들어 누가 먼저 가는지 내기라도 하는 듯 경쟁을 펼쳤다.
모두는 그 모습에 한바탕 웃고 이어 어른들이 뛰어들어 본격적으로 탐색을 시작했다.
내가 알기로 이곳의 수심은 깊은 곳은 10m 정도 되는 곳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조사를 해 보니 21C와는 달리 좀 더 얕은 편이었다.
더구나 사주의 여러 곳이 바다 밖으로 노출이 되어 있어 자칫 스리랑카 섬을 우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뭐, 그렇다고 우리 바다호가 대형선박도 아니고 짐을 가득 실어도 흘수가 2m가 채 안되니 이 라마의 다리를 건너지 못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이왕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고 노는 것을 본 김에 아이들을 소선에 태워 다리 건너 오른편에 있는 섬(만나르Mannar 섬)으로 들어가 쉬기로 했다.
더구나 내가 진단하기로 쉬바니의 출산이 다가온 시점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때가 우리가 바스라를 떠난 지 85일째 날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1226년 2월 중순, 아직은 시간에 여유가 있는 편이다.
내가 역사를 통해 기억하는 것은 칭기즈칸이 술이 취해 낙마한 시점이 1226년 늦가을이고 이로 인해 사망하는 시점이 1227년 8월 중·하순이니 1년 정도는 여유롭다 할 것이다.
쉬바니가 바다호에서 내리면서 좀 무리를 했는지 그날 밤 바로 진통이 시작됐다.
나는 그녀의 아이가 출산을 위해 머리를 돌리고 또 그런 과정에서 탯줄과 엉키지 않은 것까지 확인을 한 후 네바자르의 부인인 암라를 중심으로 출산을 돕도록 했다.
또 사람을 차출해 섬을 건너 본섬으로 가 식량으로 할 만한 동물을 잡아오도록 하고 나는 바다로 뛰어들어 미역을 몇 줄기 따왔다.
본섬에 간 이들이 물소 한 마리를 잡아왔다.
작은 소선에 물소를 싣고 배가 가라앉을까 조심하며 겨우 우리가 있는 곳까지 온 것이다.
나는 물소의 고기는 사람들이 먹도록 한 후 한국식으로 사골과 도가니를 넣고 또 미역도 넣은 후 푹 삶아 그 국물을 쉬바니가 먹도록 했다.
물론 쉬바니의 고향에도 산후조리의 방법이 있기야 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주변에 있는 암라 등의 여자들에게 물으니 아랍과 페르시아의 산후조리는 일단 찬 물이나 찬바람은 피하고 40일간 모든 일을 다른 여자들이 대신하며 산모는 40일 동안 몸조리를 한다고 한다.
지금의 유럽 여성들이 산후조리를 어찌 하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살았던 21C 서구의 여성들은 아이를 낳은 지 30분 정도가 지나면 샤워를 하고 대부분의 여성들이 아이와 함께 집으로 가버리는 것을 보았다.
어쩌면 서구 여성들이 힘이 좋고 덩치가 커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내가 알기로 역사가 있는 곳은 모두가 산후조리에 대한 나름의 방법을 가지고 있고 그 공통적인 것은 찬 것을 피하고 여성들이 일정 기간 몸조리를 하는 것이다.
나는 호다다드를 중심으로 우리가 당분간 머물 임시가옥을 만들도록 한 후 가장 먼저 쉬바니를 그리로 옮기고 전통대로 찬바람을 막고 다른 여성들이 산모를 돕도록 했다.
40일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식으로 21일 정도는 산모가 조리할 시간은 줘야하지 않겠는가.
나머지 산후조리는 여자들에게 맡기고 나는 오뜨겅과 함께 본섬을 탐험하기로 했다. 물론 멀리까지 갈 계획은 없지만.
본섬에 가 보니 물소를 잡아온 이들의 말대로 과연 우리가 머무는 섬 건너편으로 상당한 규모의 마을도 있고 병사들까지 있는 게 자칫 분란이 발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들에게 접근해 얼마간의 밀을 건네며 우리가 앞의 섬에 머무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들의 양해를 얻어 여인의 산후조리가 끝날 때까지 머무는 것을 허락받았지만 다른 곳을 돌아다니거나 사냥을 하는 것은 허락받지 못했는데 지난번 물소를 잡아온 일은 정말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 물소는 쉬바니를 중심으로 여성들이 먹도록 하고 남자들에게는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먹도록 하며, 도착한 섬에 갇힌 듯이 꼼짝도 못하다가 한 달 정도가 지난 시점에 바다호가 다시 출항을 하게 되었다.
좀 더 머물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만 본섬에서 사람들이 너머와 우리가 머무는 곳을 지켜보다 떠나는 일이 잦아지면서 점점 분란의 소지가 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행 중에는 이제 다 커 여인의 냄새를 풍기는 여자들이 있으니 자칫 커다란 싸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어느날 이른 새벽에 출발한 바다호는 마침내 스리랑카 섬을 돌아 망망대해에 진입했고 나는 그때부터는 하루 24시간을 쉬지 않고 배가 동진을 하도록 했다.
사실 안전을 위해서는 인도 아대륙을 타고 올라 갠지즈 강 하구까지 갔다가 다시 육지를 끼고 내려오는 것이 좋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 지구의 지형을 모를 때의 이야기다.
나는 이 지구의 지형을 알고 있고 이 바다를 건너면 무엇이 나올지를 알고 있으니 이 망망대해를 건너는 것이다.
바람이 적당히 불면서 배는 흔들림도 없이 순항을 거듭했고 마침내 쉬바니가 선실에서 나와 바닷바람을 쐴 때쯤에 우리는 작은 섬을 발견하고 잠시 그곳에서 쉬다 가기로 했다.
내 나침반과 바그다드에서 가져온 아스트랄라베가 정확하다면 우리는 안다만-니코바르 제도에 도착한 것이다.
섬을 돌아 동쪽에 있는 해변가에 자리를 잡고 머무는 중에 치기야의 감각에 누군가 우리 일행을 지켜보고 있다는 말을 들은 나는 다음날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린 아이들과 여자들을 데리고 자칫 다툼이라도 벌어지면 문제가 심각하니 가급적 위험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나마 이곳은 우기가 지난 열대지방이어서 당분간 추위에 대한 걱정은 없으니 다행이랄 수 있다.
섬을 나와 다시 동으로의 여행을 시작한지 5일째부터 오뜨겅의 눈에 작은 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틀을 더 나가니 마침내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흩어진 섬들의 모습이 당초 내가 목표로 한 끄라지협의 끄라부리 강의 하구가 아니었다.
‘흠, 이렇게 한순간 위치를 잃으니 지도고 나침반이고 아무런 소용이 없구만. 일단 위치부터 확인하는 게 먼저겠어.’
일단 일행을 이끌고 육지와 거의 붙어있는 섬에 바다호를 정박하고 배에서 온갖 도구를 꺼내 민물을 끓여 목욕을 하도록 했다.
지난번의 섬에서 목욕을 할 예정이었지만 여의치 못해 곧 바로 떠난지라 우리는 근 20일 정도를 제대로 씻지 못해 모두의 몸에서 냄새가 심했기 때문이다.
다행이 머무르게 된 섬은 상당히 컸고 또 커다란 산도 있어 민물도 풍부해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이 정도로 물이 풍부하다면 분명 이곳에 사는 사람도 있겠지.’
사람을 찾을 것인가 아니면 일단 이곳이 말레이반도의 어디쯤이라고 믿고 항해를 계속할 것인가?
고민 끝에 닷새만 이곳에 머물다 떠나기로 했다.
그 와중에 사람을 만나면 만나는 대로 또 그렇지 못하면 그런대로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치기야와 오뜨겅이 산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멧돼지 한 마리를 잡아왔는데 문제는 우리 일행의 이슬람 신자들은 돼지를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그저 돼지내장은 버리고 돼지를 통째로 굽도록 했다.
돼지 내장을 버리니 치기야가 아까워 죽을 것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무시했다.
오뜨겅도 사실 돼지에는 익숙하지 않다.
몽골에는 먹을 게 있다면 인간의 입으로 들어가야 할만큼 척박한 곳이니 돼지를 키울 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 일행은 나와 다닌 지가 이미 오래라 오뜨겅뿐 아니라 호다다드나 아바단, 호람 역시도 돼지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게 고기란 평소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닌 것이다.
이곳에는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이곳까지 오는 여정 중에 누구 하나 짐승을 잡을 때 다비하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고 고기를 거부한 이는 없으니 말이다.
어쩌면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예 출신의 사람들에게는 다비하니 하는 것들이 고기에 대한 욕구를 눌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 고기라는 이름으로 돼지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체험해야 할 시점인 것이다.
나를 비롯한 내 동료와 아바단, 호람 등이 제 부인들을 독려하며 고기를 먹도록 하니 여자들은 그저 제 남편이 시키니 한다는 마음으로 고기를 먹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보던 네바자르나 캄란 그리고 마두의 어린 아들들이 침을 꼴깍 삼키는 모습을 본 네바자르 등이 마침내 기름이 좔좔 흐르고 거기에 아껴둔 후추까지 뿌려진 돼지에 손을 대면서 모두가 돼지에 달려들었다.
그러나 내 부인인 아야와 그녀의 동생인 후세인만은 고기에 손을 대지 않았는데 나는 그 둘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문제가 강제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모두에게
”우리가 가야 할 고려라는 나라는 소를 잡는다는 것은 나랏님이나 가능할 정도로 귀한 짐승이다.
다만 그나마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은 돼지를 키워 먹는 것인데 돼지는 한번에 새끼를 많게는 열댓마리까지 낳고 또 그 성장도 다른 짐승들에 비해 무척이나 빠르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살던 곳에서는 돼지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내가 보건데 그것은 그 지역이 너무 덥고 돼지에게 줘야 할 것이 인간들이 먹는 음식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가야 할 곳은 겨울이면 눈이 펑펑 내려 길을 나설 수 없을 만큼 추위가 심한 곳이어서 돼지의 지방을 먹지 않으면 그 추위를 견디기 힘들다는 것이다.
먹으라고 강요는 하지 않지만 상한 고기가 아닌 이상 고기는 먹을 수 있을 때 항상 먹어둬야 하는 음식이라는 걸 명심해라.“
그렇지만 아야와 후세인은 기어코 고기를 먹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후세인은 먹고 싶은데 제 누나의 만류로 그런 모양이었지만.
그렇게 그곳에서 며칠을 보냈지만 사람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우리는 다시 바다호에 몸을 실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주 마스트의 돛만 펼친 느린 속도로 며칠을 항해하니 마침내 내가 알 만한 곳을 찾았다. 푸켓이라는 섬 말이다.
이제야 나는 나의 위치를 알게 됐고 바다호는 좀 더 빠른 속도로 내 머릿속의 지도를 따라 또 내 손에 쥐어 있는 아지즈의 지도를 따라 항해를 했고 다시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아지즈가 들렀다고 표시한 피낭Pinang이라는 야자나무가 많은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즉, 21C 페낭에 도착한 것이다.
물론 아직 이곳은 조지 타운이라는 도시도 없고 그저 섬에서 자생하는 피낭이라는 야자열매와 섬의 동편에 있는 얼마간의 밭에서 재배한 작물로 연명하는 사람들이 전부인 곳이다.
아마 유럽의 향신료무역이 본격적으로 실행되면 이곳은 크게 번성하는 무역항이 될 것이지만 과연 그런 역사를 밟을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 섬에 배를 대고 며칠간 일행들에게 휴식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수소문을 해 과거 아지즈를 만났다는 이를 찾을 수 있었는데 그는 놀랍게도 이곳의 원주민이 아니라 아랍인과의 혼혈이었다.
조상 중에 아랍에서 왔던 이가 이곳에 정착을 한 이가 있다는 후문이다.
그에게 아랍의 상인들이 오는지를 물었지만 몇 년 전의 아지즈 외에 이곳에 온 아랍의 상인들은 전혀 없다는 말만 들었다.
아무래도 어수선한 아랍의 사정으로 인해 더 이상 무역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하긴, 내가 가지고 간 정향 등의 가격이 지나치게 높기는 했지.’
그렇게 그 야자나무가 많은 섬을 떠난 바다호는 보름 여의 항해 끝에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나는 바다호를 끌고 조호르 해협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마리나 만 깊숙이 들어와 싱가포르 강의 하구에 바다호를 정박하고 일행들에게 휴식을 명했다.
추천은 작가에게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아담의 다리Adam's Bridge 또는 라마의 다리Rama Setu]
인도에 전하는 힌두 문학의 고전 라마야나Ramayana에는 175만 년 전의 전설 한 토막이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현 인도의 있던 한 왕국과 현 스리랑카와의 전쟁에 대한 얘기이다.
얘기의 전제는 스리랑카왕국은 악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스리랑카왕국의 전횡을 지켜보던 신인 비슈누는 스리랑카의 왕 라바나를 제거할 생각으로 인도의 한 왕국의 왕자로 환생을 하는데 그 이름은 라마였다.
환생을 했으니 라마는 자신이 비슈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라마는 시타라는 아주 예쁜 여자와 결혼을 해 잘 살다가 왕국의 일로 스리랑카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그런데 스리랑카의 왕인 라바나의 여동생 뢐샤사 카마발리가 라마에게 반해 라마를 유혹하다가 실패하자 라마의 여인인 시타를 납치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일은 라마의 동생인 라크슈마나에게 발각이 되고 뢐샤사 카마발리는 죽고 만다.
당연히 오빠인 라바나는 여동생의 복수를 맹세하고 라마의 주의를 돌린 후 시타를 납치하게 된다.
라마는 시타를 찾으러 다니다가 원숭이 왕국을 찾게 되는데 그곳에서 원숭이 왕인 하누만을 만나게 된다.
하누만은 몇 번의 시험 끝에 마나가 비슈누의 화신임을 알고 그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마나는 하누만의 도움으로 시타가 라바나에게 납치된 사실을 알게 되지만 하누만은 그만 라바나에게 잡히고 만다.
하누만은 라바나에게서 달아나다 꼬리에 불이 붙었는데 하누만이 달아나는 과정에서 꼬리에 붙은 불로 인해 라바나의 왕국은 불바다가 되고 하누만은 라마에게로 돌아온다.
라마는 스리랑카를 징벌하기로 하고 대군을 이끌고 침공을 하는데 바다에 막혀 갈 수 없게 된다.
이에 라마는 라메스와람Rameswaram과 스리랑카 사이에 긴 다리를 만들어 대군을 건너게 한다.
전쟁이 끝난 후 라마는 시타의 순결을 의심하게 되고 시타가 스스로 불로 뛰어들어 증명을 한다.
이에 라마는 그녀의 순결을 의심한 것에 대한 반성으로 스리랑카에 있는 아담-이 아담이 기독교 성서의 아담은 아니다.-이라는 산에서 한발만으로 선 채 천 년 동안 서 있었으며 이에 불의 신인 애그니가 시타를 보호해 라마와 시타는 아주 잘 살았다는 얘기다.
이 아담의 다리가 널리 알려진 것은 1994년 4월 9일 미국의 우주왕복선 인데버 호에서 인도양을 정밀 촬영하다 이상한 구조물을 발견하고 나사에서 정밀 분석하면서부터다.
분석 결과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구조물이라는 결론을 내면서 인도의 이 전설까지 널리 알려졌다.
아담의 다리는 인도 타밀나두 주에 있는 라메스와람 섬에서 스리랑카의 만나르Mannar 섬까지 30km의 사주가 긴 염주 모양으로 연결된 것을 말하는데 처음에는 사주에서 사주로 철교로 연결되었던 흔적을 찾았다고 했다.
물론 나사에서 인공구조물인지에 대해 조사를 한다고 난리를 피우면서 더욱 확신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언젠지는 모르지만 그 시대에 30km짜리 철교라니.
15C까지는 도보로 갈 수 있었다고 하는데 알 수 없고 다만 15C말 경 커다란 태풍(사이클론)에 의해 다리가 파괴되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고 전한다.
일부의 사주는 수면 위로 드러나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주는 수면 아래 1~10m 사이에 있어 항해는 어렵다고 한다. 물론 작은 배야 건널 수 있다. 이 아담의 다리로 인해 배들은 스리랑카를 우회해야 하는데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이 아담의 다리가 다시 문제가 된 것은 2007년 타밀나두 주에서 스리랑카까지 해저터널로 연결하는 세투사무드람Sethusamudram 계획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인도 정부나 고고학자 집단은 연구 결과 이 아담의 다리가 인공구조물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생성된 자연구조물이라고 주장했지만 무려 175만년 전의 전설을 가지고 있는 이 다리에 대한 지역민의 애정을 간과했다.
결국 정부에서 세투사무드람 계획을 무기한 연기하면서 진정이 되었다고 한다.
하긴 백두산 천지 지하로 중국과 연결하는 터널을 뚫겠다고 하면 북한뿐 아니라 남한의 국민들도 난리가 날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국민 혹은 민족의 정서와 관련되어 있으니 말이다
다만 레메스와람 섬의 팜반Pamban에서 타밀나두 주의 만다팜Mandapam까지는 도개교 형태의 기차길이 일찍 놓여졌는데 이 도개교를 통해 배가 지나간다.
근래는 배가 충분히 지나갈 높이로 도로도 개설되어 있다고 한다.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
안다만Andaman 제도와 니코바르Nicobar 제도를 합쳐 이르는 말로 위치는 인도네시아에서 150km, 미얀마에서 190km, 인도에서 1,000km 떨어져 있는 인도의 섬으로 이루어진 주.
전체 면적은 대전과 세종을 제외한 충청남도 면적과 비슷하다.
전체 인구는 대략 35만 명 정도이고 안다만 제도에 30만 정도가 살고 있다.
인구의 대부분은 주도가 있는 남 안다만 섬에 있는 포트 블레어Port Blair에 몰려 있고 많은 섬들이 무인도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현재는 나아졌다고 하지만 최근까지도 이곳의 원주민들은 수렵 채집 생활을 했으며 한때 원주민들에 대한 인간 사파리 관광이 벌어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곳의 사람들은 최근까지 말하는 원숭이 취급을 받았고, 지금도 몰래 음성적으로 그런 일이 종종 벌어진다고 한다.
지리적으로는 수마트라 섬 동쪽에 있는 아체에서 뻗은 해저 지형의 연장선상에 있으나 제국주의 시절 덴마크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식민지이던 것을 영국이 매입해 인도에 편입시키면서 인도령이 되어 버렸다.
(이런 영국놈들의 만행은 곳곳에서 발생한다. 앞서 살펴본 파키스탄에서 파슈툰족을 갈라버린 것도 그렇고 아랍이나 아프리카에서 지들 맘대로 선을 그어 이후 민족분쟁을 일으킨 일이 너무도 많다.
혹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로 말이다.)
인종은 키가 작고 피부는 검으며 언어 역시 독특하게 발전했다고 하는데 인도네시아와 그나마 가까운 언어라고 한다.
지정학적으로 남아시아가 아닌 동남아시아에 포함되며 기후적으로는 열대 우림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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