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량형
오·탈자 지적을 바랍니다.
소르칵타니의 문제가 일단락이 된 후 나는 가오리섬과 사할린의 개발 문제로 바빴다.
특히 소르칵타니가 사망한 해인 한울루스 26년(서기 1252)부터 한울루스 30년(1256)까지 동안의 5년 동안 한울루스 영역 내의 각지에서의 투자는 상당했는데 그것은 아직 한울루스의 영역으로 있는 새졸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당시는 이미 새졸본과 박작은 일종의 정기 항로가 열려 있었는데 지난 우수리 사건 때 외에는 항시 1년에 2차례, 곧 이른 가을 박작을 출발하는 배편과 늦겨울이나 이른봄에 박작을 출발하는 배편으로, 정기적으로 박작과 새졸본을 왕래하고 있었다.
그 정기편은 새졸본으로 갈 때는 탐라도 들르지 않고 바로 새졸본에 갔다, 올 때는 슌텐왕국을 거쳐 새섬에서 다시 식량과 다량의 솜을 싣고 탐라의 대정을 들렀다 대정에서 수확한 솜을 거둬들이고 대신 쌀로 그 대가를 치른 후 박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간혹 박작에서 새졸본으로 떠나는 배편에는 새졸본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아보고자 하는 이들이 배에 몸을 싣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은 언젠가 고려에 퍼진 새졸본에서는 배부르게 살 수 있다는 소문으로 인한 것인데 그 소문에 대해 고려 조정과 각 지방에서 단속을 함에도 불구하고 은밀하게 퍼지는 것은 막지를 못해 종종 가족을 데리고 무작정 박작으로 오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새졸본에서도 좋은 일이 있었다.
먼저 새졸본의 강가에 흩어져 그곳의 원주민들의 식량으로 쓰이곤 하던 물소에게 코뚜레를 거는 일에 성공한 것이다.
고려의 소보다 덩치가 더 크고 힘도 좋으며 뿔도 더 무시무시한 물소였지만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마침내 물소를 길들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그 일로 새졸본 근처의 부족들과 새졸본이 다시 전쟁 직전까지 가기도 했지만 최온이 지난 전쟁으로 흡수한 세 부족민들에게 제 땅인냥 땅을 나눠주고 또 농사법을 가르쳐 회유하면서 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그리고 졸본의 많은 학생들이 새졸본이나 사할린의 가오리 마을 그리고 가오리섬 등으로 흩어지는 일도 있었다.
본래 인간의 욕구는 그 시작은 먹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그 마지막은 자아실현으로 종착하는 법이다.
물론 이 시대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 욕망의 첫단계인 먹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평생을 그 문제로 고생하지만 졸본의 학생들에게 있어 먹는 문제로 고생하는 이들은 없었다.
졸본의 학교가 문을 연 것이 벌써 20년도 훌쩍 넘은 시간이라 학교가 어느 정도 체계가 잡혔고 그러면서 학생들에게는 먹을 것과 책 등이 무상으로 제공되었으니 말이다.
다만 그 배움이 끝난 후 반드시 한울루스의 영역에서 10년간 역을 살아야 했는데, 이는 고려 출신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그 역도 다른 역보다는 보수가 좋으니 먹는 문제에 얽매이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기본 의식주가 해결된 학생들은 처음에는 한울루스 내 각 지역으로 흩어져 어떤 이는 사또로 일을 하고 또 어떤 이는 여전히 학자로 일을 하였는데 아마도 몇몇 이들은 그런 일이 마음에 차지 않은 모양이었던 가 보다.
내가 가오리섬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거기에 가서 일을 할 사람을 뽑는다니 많은 학생들이 제 가족과 함께 가오리섬으로 가기 시작했고 또 그 자극으로 새졸본으로 이주하는 학생들도 늘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남자라면 가지는, 아니 마음이 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을 꾸는 개척에 대한 욕망이었음이 분명하다.
가오리섬에 도착한 학생들로부터 보내지는 글에는 마을의 발전을 위해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도시를 건설하고 수로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탄원이 내게 수십 차례 도착했으니 말이다.
‘맞아, 뭐니 뭐니 해도 남자의 로망은 심시티지. 로마의 발전 역시 건축과 토목에서 시작했잖아.
그리고 건축과 토목은 인간을 군대처럼 조직화하는 힘이 있지.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큰 권력을 낳고 말이야.’
그래서 나는 우수리에게 편지를 썼다.
그저 배를 모는 거나 알고 탐험에 대한 재능과 흥미만을 가지고 있는 우수리에게 건설과 토목을 통해 어떻게 권력을 잡아야 하는지를 알려준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그곳에 가 있는 학생 중의 누군가에게 가오리섬의 주민들의 눈길이 가 그 권력이 그 학생에게 넘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뭐 권력은 창칼에서 나오지만 역시나 그 창칼을 쥔 자들은 인간이니 그들에 대한 단속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우수리가 아닌 다른 이에게 가오리섬의 권력이 넘어가는 것은 내게도 좋은 점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새졸본이야 걱정이 없다.
본래 최온 그 자신이 야망이 대단한 이니 말이다.
학생들이 아무리 떠들어댄다고 하더라도 최온이 창칼을 쥔 자들에 대한 장악을 놓칠 인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갑돌은 마침내 사할린에서의 행해진 수차례의 실험과 관찰로 지구 둘레를 계산한 것을 글로 발표했는데 그가 측정한 지구의 둘레는 기존에 졸본에서 쓰이던 리(리=400m)를 기준으로 약 10만 25리에서 10만 125리고 이에 따라 지구의 둘레는 그가 측정한 지구 둘레의 평균값인 10만 75리(40,030km)로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갑돌은 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모아 기존에 각 지역마다 중구난방으로 쓰이던 도량형에 대한 통일을 기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즉 졸본에서 쓰이던 리의 길이로 10만 75리를 새로운 리를 정해 10만리로 하고 거기서 얻어진 리의 길이를 기준으로 자의 길이를 정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새로 정해진 자의 길이로 넓이와 부피의 기준을 새로이 정하자고 한 것이다.
사실 이 당시 한울루스내의 도량형은 아직 통일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아무래도 졸본의 길이가 그 기준이 되기는 했지만 연길이나 부여시만 가더라도 자의 길이가 달랐고 또 고려와도 길이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봐도 도량형을 바꾸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생을 생각해 봐도 미터법이 쓰이는 중에도 한국은 여전히 척관법 역시 민간에서는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돌의 주장이 나와 내 친구들의 회의에 오른 것은 당연하다.
일단 오뜨겅이나 치기야는 대개의 백성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기존의 도량형을 바꾸는 것에 반대였다.
백성들 입장에서 아무런 이득도 없는 그러면서 제도의 변경으로 인한 불편함만을 초래하는 도량형의 변경을 환영할 리가 없다.
그것은 인간이 본래 게으르고 또 주변의 환경이 바뀌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반면 호다다드는 도량형의 통일을 적극지지 하는 쪽이었다.
어차피 기존의 도량형도 통일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니 이번을 기회로 한울루스내 도량형에 대한 통일을 기하자는 쪽인 것이다.
물론 갑돌의 제안을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도량형의 통일을 원할 뿐이었지만.
우리 네 사람의 토론이 있는 중에 갑돌이 회의에의 참석을 요청했다.
본래 한울루스의 최고회의인 우리 넷의 회의에 종종 그 분야의 전문가들을 불러 의견을 듣는 일이 있었기에 이상할 일은 아니다.
나 역시 그런 것을 적극 환영하는 바이고 말이다.
최고회의에 불려온 갑돌은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한다면 이번의 도량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며 한 가지 제안을 했는데 그것은 한울루스 재무국에서 발행하는 『보리 반 되』의 전표를 바뀐 도량형에 맞춘다면 백성들도 새로운 도량형에 찬성할 거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이번에는 호다다드가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당연한 일이다.
매년 재무국에서 발행하는 『보리 반 되』의 전표는 이미 수십만 장에 이르고 있고 거기에 회수되어 돌아오는 전표를 다시 유통하는 것까지 생각을 한다면 거의 백만 장에 이르는 전표가 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직 누구도 그 전표를 위조하는 이가 없어 다행이지 인쇄 기술이 좋아져 누군가 혹은 고려에서 위조를 한다면 한울루스는 대혼란에 빠지고 말 정도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전표제도도 손을 보기는 봐야 하는데. 어디서 은광이나 금광이 나와야 동전으로 대체를 하던지 하지. 한울루스 어디에 그런 광산이 있는지 내가 알지를 못하니.’
그렇게나 많은 양의 전표가 발행되는데 비록 한 자의 길이 변화가 적다고는 하지만 거의 1년에 백만장의 전표에 해당하는 늘어나는 곡식의 양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양일 테니 말이다.
“결코 그렇게 생각할 건 아니라고 봅니다.
일단 제가 경험한 바를 말씀드리자면 여태까지의 그 『보리 반 되』의 전표 외에 『보리 한 되』나 『쌀 한 되』 또 『쌀 한 말』과 『쌀 한 가마』의 전표를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백성들 중에 잘 사는 이들은 그 전표를 바로 식량으로 바꾸지 않고 집에 간직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는 겁니다.
저 역시 그 『보리 반 되』 전표가 집에 천 여 장은 있으니까요.”
“뭐, 전표가 천여 장이나 있다고? 뭐하러 그 전표를 가지고 있단 말인가?”
“말씀드리자면 우스운데 집사람이 창고에 넣어 놓은 식량이 수량이 맞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전표를 모두 보리나 혹은 쌀로 바꿔 창고에 쟁여 놓았었거든요.
그리고 그 부족한 수량이 쥐때문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쥐라고? 이 사람아 그 작은 쥐가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수량이 안 맞는다는 말을 하는가?”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쥐는 1년이면 네 번이나 새끼를 낳고 한번에 열댓 마리까지 새끼를 낳으니 쥐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곳간이 순식간에 빌 수도 있는 일인 겁니다.
그 후로 먹을 정도의 식량만 바꾸고 모두 전표로 가지고 있게 된 겁니다.
아마 졸본에 저와 비슷한 이가 상당수일 겁니다.
그러니 전표의 종류도 늘일 필요가 있고 또 『보리 반 되』의 양을 조금 늘린다고 해도 매년 줘야 하는 곡식의 양은 그리 많지 않을 거라는 말씀입니다.
더구나 근래 졸본에서는 민간에서 하는 역은 이미 하루에 『보리 반 되』의 삯을 넘고 있는 형편입니다.
아마 관에서 하는 역에 반 홉 정도는 더 줘야 이미 그 일을 해봤던 이를 구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일에 익숙하지 않은 이야 보리 반 되로 충분히 구할 수 있지만요.
그러니 관에서도 사람을 구할 때 기존에 일을 하던 이와 새로 일을 하는 이를 구분해 그 삯을 결정한다면 충분히 타산을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호, 갑돌이가 단지 수학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더 넓게 볼 줄도 아는구나. 갑돌이에게 통계라는 학문을 알려줘도 되겠어.’
나는 갑돌과 호다다드의 토론을 지켜보면서 문득 통계라는 학문을 일으킬 필요를 느꼈다.
그만큼 한울루스는 이미 자급자족과 농업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자. 내가 결론을 내지.
일단 갑돌과 호다다드는 시중에 유통되는 전표의 양이 어느 정도가 되는지 조사를 해 보는 게 좋겠어.
가령 갑돌 말대로 다른 종류의 전표를 발행하면 어느 정도 집안에 있던 그 『보리 반 되』의 전표가 나올 테니 그것을 보면 쓰지 않고 집안에 보관만 하는 전표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겠지.
그걸 보고 도량형의 문제를 결정하도록 하겠네.
비록 도량형 문제로 시작을 했지만 확실히 그 전표문제는 손을 볼 필요가 있겠단 생각이야.
내 처도 전표를 상당량 쌓아두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으니 여기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야.
집안에 전표가 쌓여 있으면 나라에서는 자꾸 전표를 찍어야 하고 또 전표가 너무 많으면 전표 역시 물건이니 그 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해.
갑돌 말대로 시중에 품삯이 오른 이유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을 거야.
뭐든지 흔하면 가치는 떨어지는 법이니까.”
“알겠습니다.”
현재에 이르러 한울루스에서 일을 하면 반드시 그 대가를 받는다는 것은 한울루스내 어디를 가더라도 정착이 되어 있는 중이다.
누구도 사람을 부리면서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이제는 상당수의 마을에 퍼져 있는 관아에 신고할 수 있고 또 그 일의 가해자는 미지불한 삯을 지불해야 할뿐더러 다시 그 금액만큼 관에 벌금을 내야 하니 자칫 약간의 품삯을 아끼려다 집안이 거덜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음 내가 시작한 보리 반 되의 품삯 역시 상당히 변천을 겪어 지금은 일의 종류에 따라 그 품삯 역시 천차만별로 바뀌었다.
물론 단지 힘을 쓰거나 작은 기술이 필요한 일인 경우는 여전히 보리 반 되의 품삯이지만 의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다친 이를 치료하는 일은 그 품삯이 천차만별인데 가장 많은 삯을 받는 이는 의외로 안 부로 그가 뼈를 맞추거나 상처를 꿰매는 일에 대한 삯은 쌀 한 가마를 한다는 얘기도 들은 바가 있는 것이다.
추천은 작가에게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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