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오·탈자 지적을 바랍니다.
고려에는 향·소·부곡이라는 천민 마을이 있다.
그 중에서 소所라는 것은 전조인 신라나 후대인 조선에는 없는 천민 집단이다.
본래 향이나 부곡은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미치는 군현에 이르지 못한 마을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니 당연 차별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백제나 고구려의 백성들, 곧 전쟁포로를 끌어다 집단적으로 일을 시켰는데 이 역시 인구 규모면에서가 아니라 차별이라는 면에서 향이나 부곡이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도 향과 부곡에 속한 이들은 농업에 종사했다.
신라시대에는 농사짓는 것 외의 다른 일, 가령 대장장이 따위의 일들은 모두 특별했고 그런 일을 하는 이들에게 차별을 줄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신라에 포로로 잡힌 백제와 고구려의 백성들은 신라의 도읍인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넓게 퍼져 경주의 주민들을 위해 각종 먹거리를 생산하는 일에 종사한 것이다.
고려의 향이나 부곡의 절반 이상이 경상도 지역에 밀집하는 것이 그 이유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태조 왕건에게 가장 밉보인 지역이 있다면 후백제 지역이다.
더구나 후백제는 아들인 신검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비인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키는 패륜까지 저지른다.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후백제 지역의 그런 태도를 문제 삼아 후백제가 다스리던 많은 지역을 군현에서 강등해 특수천민 마을로 만드는데 이것이 이른바 소所다.
그래서 고려에 있는 소의 절반 이상이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 소의 주민들에게는 농사를 짓는 일을 시키는 게 아니라 여러 잡물을 만드는 일을 시키고 식량을 통제해 버린다.
농사는 식량이고 식량은 곧 군량이라는 면에서 소의 주민들을 준반역집단으로 본 때문이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이 소의 주민들이 이제는 고려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집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산에서 광물을 캐고 숯을 구우며 각종 생필품, 곧 실이나 바늘, 가죽 제품, 토기나 도기, 농기구 따위를 만드는 이들의 대부분이 바로 이들이니 말이다.
그리고 더욱 큰 문제는 고려조정이 이 소의 주민들의 가치를 여전히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내가 고려와 여몽화약麗蒙和約을 맺으면서 고려에게 요구한 것이 바로 이 천민집단의 이주였는데도 고려조정이 이를 너무도 쉽게 허락한 것이 바로 그 이유다.
소의 주민들이 차츰차츰 한울루스로 오고 일부는 한울루스에서 교육을 받은 후 새졸본으로 이주하면서 당연 고려에 생필품난이 발생할 것이었다.
나 역시 그런 것을 예상하고 모종의 계획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바로 그런 시점에 서경에서 의주로 통하는 도로가 완성을 보았다.
물론 내가 가지고 있던 계획 역시 폐기가 되었고.
도로가 만들어졌다고 무슨 대단한 도로는 아니었다.
21C처럼 쭉 뻗은 길도 아니었고, 길은 만들어 놓고 유지관리를 안 하니 비만 오면 움푹 파이기도 했다.
그래도 길은 길이었다.
상인들은 처음에는 요양에서 화탄을 캐다 서경에 팔았고 또 의주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아직 고려의 지명도 없고 소설에서도 아직 지명이 없지만 위치는 초산군이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위원, 강계 등이 압록강변의 석회석 산지다.)에서 석회석을 캐다 파이는 도로를 손질하는데 썼다.
그리고 그러는 중에도 고려의 소의 주민들이 한울루스로 이주를 했다.
조정의 지시로도 이주를 했고 한울루스에 가면 장인들의 대우가 다르다는 소문을 듣고 탈출하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소의 주민들이 사라져도 처음부터 불편이 있지도 않았다.
이 시대 공업이라고 해 봐야 수공업이고 그 생산량이 많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아예 불편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어느 날 개경이나 서경에 바늘이 품귀현상이 벌어진 적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바늘이 부족하다고 해서 조정의 관리들 중 관심을 가진 이가 있지도 않았지만.
그리고 그 일에 대한 대처로 전 같으면 전라도 지역이든 어디로든 가서 바늘을 만드는 소의 주민에게 부탁을 했을 일을 상인은 간단히 졸본에서 바늘을 구입하는 것으로 끝낸 것이다.
졸본의 쇠는 아직 탄소강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화탄가루(코크스)를 사용하는 중이라서 고려에서 만든 철보다 그 강도에서 더욱 뛰어났고 또 비록 축력이나 수력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조금씩 기계화를 이루고 있던 중이었으니 생산량도 많아 값에서도 더욱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하나씩 늘기 시작했다.
바늘을 수입하던 것에서 가장 기본인 실 역시도 졸본에서 구하는 일이 생기게 된 것이다.
더구나 마사麻絲를 사용하는 고려백성들에게 모사毛絲를 가져다주면서까지 말이다.
그러니 당연 서경에서 의주간 도로는 더욱 그 쓰임이 빈번해 질 수밖에 없었다.
본래 상업이란 물자의 이동이니 그 출발은 운송업이 시작이고 운송업은 길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로 빈번하게 사람과 물자가 움직이면 자연스럽게 그 움직이는 사람과 물자를 상대로 숙박과 음식을 파는 업종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런 현상이어서 금지할 수도 없는 일이다.
누구도 먹고 자는 일에 간섭을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서경과 의주간 도로에는 숙박업을 하는 이나 음식업을 하는 이들까지 등장했으니 그 도로의 쓰임이 어떤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상업화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이 서경-의주간 도로에서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숙박업을 하려면 많은 이들에게 잠 잘 곳을 제공해야 한다.
이 시대 운송이라는 게 혼자서 마차에 짐 싣고 다닐 정도로 안전한 일이 아니니 말이다.
그렇다고 상인들이 무슨 대지주도 아닌데 넓은 토지를 사용해 집을 지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그 상인들은 한울루스의 주택을 모방하게 되었다.
즉 기존 고려의 온돌식 주거형태가 아니라 방의 한구석에 난로(페치카)를 놓아 방의 공기를 데우는 식의 주택 말이다.
이 주택의 장점은 주택을 단지 한 층이 아닌 둘이나 세 개 층으로 지어 토지를 보다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인데 대표적인 것이 졸본에 있는 그 학교라는 건물이다.
이제까지 고려의 건축물 중 층이라는 게 있는 것은 탑이나 부도가 전부였으니 고려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건축양식인 것이다.
음식업에서는 건축양식의 변화와는 그 규모가 다르게 많은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가져오고 아프라이마가 재배해 그 씨앗을 늘리기 시작한 각종 야채가 졸본으로 퍼지면서 시작됐다.
거기에 한울루스의 영역은 본래가 콩(대두)의 땅이다.
즉 그전까지 한울루스의 지역은 벼의 재배는 압록을 중심으로 하는 몇몇 곳에서나 이루어졌고 대부분이 콩을 재배하던 지역이다.
따라서 콩으로 만든 많은 음식들이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된장이라는 문화가 만들어진 곳도 바로 이곳으로 그 된장은 대륙에까지 소문이 나 위지동이전에도 된장이 고구려의 수출품으로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된장이 생기니 간장이 생겼고 그런 장류의 영향으로 김치가 생긴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렇지만 내가 오기 전까지는 그것이 전부였다.
소금은 귀했고 사탕은 존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내가 오면서 소금의 생산이 획기적으로 늘기 시작하고 사탕이 나타나 음식의 맛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것이다.
더구나 이 당시 나는 한울루스 영역에 대한 순시를 마친 시점으로 흑토지대라고 하는 동북대평원(현재의 하얼빈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여진인들을 모아 대대적인 수수농사와 사탕무농사를 하도록 한 상태였다.
한울루스에 사탕의 공급이 아주 풍족해졌다는 말이다.
물론 많은 양이 수출이라는 이름으로 강남과 몽골 그리고 왜로 팔려갔지만 역시나 한울루스내의 소비 역시 만만한 양이 아니었다.
또한 내 일행들은 아랍인들이 대부분이고 그들은 전통적으로 유목민이어서 유제품에 대한 많은 지식 역시 가지고 있다.
그러니 치즈라는 것이 만들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치즈라는 말이 아니라 효유酵乳또는 젖두부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거기에 소금의 생산에 여유가 생기자 내가 한 일이 젓갈을 만든 일이었다.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아봐야 내륙으로 옮길 수가 없으니 만들어 보았는데 박작시에 사는 어부들을 위해 한 일이었다.
물론 아직은 소금가격이 비싼 편이라 만들어진 젓갈 역시 비싸기는 했지만 어쨌든 새로운 식료품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만들어지면 졸본의 여성들이 가장 먼저 그것들을 가지고 여러 방법으로 음식을 만드는 건 졸본에 처음 정착한 이후로 꾸준히 해 온 일이었다.
얼음을 얻고서 화채를 만들었듯이 말이다.
그리고 졸본에서는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들이, 또 다른 과학적 방법론이라고 할까, 노동자들을 상대로 제공되어 실험을 거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음식을 먹는 노동자 중에는 고려에서 온 상인들도 포함이 되고 말이다.
비록 고추는 아직 없다지만 그를 대신해 내가 인도에서부터 가져온 양파를 이용해 매운 맛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점을 생각하면 짜고 달고 시고 쓰고 매운 맛의 모든 것이 졸본에 등장한 것이다.
당연 사람들은 졸본의 음식을 최고로 쳤고 그것은 유행처럼 고려로 또 연길이나 요양으로도 퍼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숙박과 음식업의 발전이 이제는 순수하게 운송만을 전담하는 운송업의 발전에 기여를 하기 시작했다.
많은 말을 가진 여진인이 졸본에서 사용하는 마차를 주문해 본격적으로 운송업에 뛰어든 것이다.
선순환의 시작이었다.
다만 그런 선순환이 고려 입장에서는 단점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고려의 수공업이 침체를 하기 시작했고 또 시간이 갈수록 고려의 부가 한울루스로 빠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고려인들 입장에서 바늘을 만들기보다는 한울루스에서 바늘을 사다 쓰는 게 가격이 싸니 그리 한 것인데 어느 순간 그것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나선 이가 나타났다.
그리고 오늘 나를 찾아온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지외무인 유택이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나를 만나기 위해 방문을 한 것은 지난 여몽화약 이후로 처음이다.
그도 그럴 게 여몽화약으로 한울루스와 고려가 사무역의 문호를 개방하기로 한 후 두 나라 사이에 특별한 문제가 없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고려에서는 진양후를 상대로 헤게모니 싸움이 있었던 모양인데 아직도 그 결말을 짓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니 외부에 신경을 쓸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이후로 화약에 대한 탐문이 사라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유공, 어서오세요. 한번쯤 방문이 있을 걸로 봤는데 전혀 소식이 없어 조금은 서운했습니다.”
“그러셨습니까? 이거 종종 방문해 칸의 노여움을 사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려.”
“그러면 저야 감사하지요. 뭐 요 몇 년은 이곳에 있지 않고 돌아다니느라 저도 좀 바쁘기는 했습니다.
이제 이곳에 머물 예정이니 종종 방문해 주시면 감사한 일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여기는 제 아들놈인 유경柳璥(1211~1289)이라고 합니다.
사실 오늘 제가 방문한 것은 제 아들놈이 제게 한 말로 인한 것입니다.
제가 아들놈의 말을 듣건대 그 말이 이치에 맞아 정책에 반영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것이 한울루스와 관계가 있다 보니 먼저 칸께 아뢰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말이죠.”
“호! 아드님께서요. 무슨 일인지 궁금하군요.”
“칸이시여! 유에 경이라 합니다.
제가 칸께 하고자 하는 말은 우리 고려의 부가 지나치게 여기 한울루스로 빠져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한울루스의 여러 물건과 기술로 고려백성들의 삶이 풍족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실상은 내일 먹을 양곡을 팔아 오늘 써버리는 일과 다름이 없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더구나 너도 나도 모두 상업에 뛰어들려고 하는 통에 그동안 고려에서 생산하던 많은 물건들이 이제는 그 생산의 맥마저 끊길 위기에 처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로 인해 고려가 피폐해지면 당연 한울루스 역시 피폐해질 것이니 시정이 되어야 한다는 게 저의 판단입니다.”
유경이 한 말의 내용은 나 역시 충분히 예상하던 일이었다.
고려는 원역사의 조선처럼 무역이 금지되어 있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려가 무슨 대단한 무역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고려에서 상업적 우위를 가진 도기의 송으로의 수출은 상당한 편이었고 고려인삼의 수출은 대단한 부를 이루는 수단이 되는 정도였다.
전라도 지역의 도요에서 만들어진 그릇들이 배에 실려 송나라나 이제는 사라진 금나라에 수출이 되기도 하고 심마니들에 의해 산 깊은 곳에서 몰래 재배된 삼이 개성의 상인들의 봇짐에 숨겨져 움직였으니까.
그리고 고려에서 수입하는 것은 대부분 책이나 비단 등 고려내 귀족층의 소비를 충족시키는 물건들이었다.
즉 특수한 사치품은 수입하고 대중이 쓰는 생활용품을 수출했으니 무역으로 손해를 보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곡물을 제외한 모든 물건이 한울루스에서 고려로 팔려갈 뿐 고려에서 한울루스로 팔려 오는 물건이라는 게 거의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본격적으로 새졸본이 개발되면서 한번씩은 졸본의 곡물이 고려로 팔리기까지 하는 지경일 정도다.
그리고 이미 한울루스는 고려뿐 아니라 강남과 왜 그리고 몽골로 무역을 늘린 상태라 유경의 말처럼 고려의 피폐가 한울루스의 피폐로 이어질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한울루스 경제에 전혀 영향이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처지다.
이미 두 나라의 경제는 오픈 필드에 들어왔으니 말이다.
‘후, 이 문제를 어찌 푼다.’
추천은 작가에게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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