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걱정하지 말아요
90화. 걱정하지 말아요.
교육원의 옥상이었다. 그곳에서 혁준과 지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작가님이 말해주신 대로 고치니 캐릭터가 더 매력적인 게 변한 거 같아요. 확실히 로맨스 장르는 여자의 시선이 필요한가 봐요.”
“그래도 제가 도움이 되는 선생님이라 다행이네요. 언제든지 좋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요.”
“네.”
혁준은 지수의 말을 잘 듣는 몇 안 되는 학생이었다. 교육원에 오는 교육생들 중에 많은 수의 사람들은 선생님의 충고를 듣지 않는다. 그들은 이곳에 자신들이 오는 이유를 망각한 듯 자신만의 주장을 펼친다. 그런 사람들과 달리 혁준은 선생님들의 충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다른 교육생들도 혁준 씨와 같으면 참 좋을 텐데. 안타까워요.”
“어? 저 방금 작가님에게 칭찬받은 건가요?”
그의 질문에 지수는 미소를 지었다.
“네. 맞아요. 혁준 씨는 분명 좋은 작가가 될 거예요. 전 그렇게 믿어요.”
“작가님의 믿음을 지켜드리려면 무조건 공모전에 당선되야겠네요. 그나저나 작가님 생각에는 지금 제가 쓰는 드라마가 공모전에 당선될 확률이 있을 거 같나요?”
“음... 지금까지 제가 교육원에서 본 대본들 중에서는 가장 훌륭한 거 같아요.”
“우와. 진짜요?”
지금까지 그 본을 수없이 많이 고쳤다. 그 모든 수고를 지수가 인정해주는 거 같아 혁준은 기분이 좋았다.
“그럼 이번에 제가 뽑힐 수도 있겠네요?”
혁준은 벌써부터 당선이 확정된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지수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그건 모르는 거죠.”
“만약 제가 이번에 당선되면 소원 하나 들어주실래요? 그래도 제가 작가님 애제자인데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요.”
“뭐... 좋아요.”
“앗싸! 진짜죠? 분명 방금 약속했어요. 이번 공모전에서 제가 당선되면 소원 들어주기로.”
“네. 약속해요.”
“그럼 증거를 남겨야겠죠?”
혁준은 지수에게 자신의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런 그를 보며 지수가 물었다.
“새끼손가락 걸라고요?”
“당연하죠. 어릴 때 해보셨죠? 빨리요.”
그는 빨리 손가락을 걸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간절한 눈빛과 미소와 함께 말이다. 그런 그의 모습이 귀여워 보인 지수였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절로 번졌다.
“좋아요.”
그녀는 자신의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혁준의 손가락에 걸었다.
“약속을 했으니 복사를 해야겠죠?”
“그래요.”
두 사람은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했던 것처럼 오른손을 쫙 폈다.
“그럼 복사합니다.”
혁준과 지수의 오른쪽 손바닥이 부딪히며 스쳐갔다.
“이제 작가님 약속 꼭 지키셔야 합니다.”
“약속을 복사까지 한 마당에 당연히 지켜야죠. 대신 혁준 씨는 자만하지 말고 끝까지 공모전 준비하셔야 해요. 알겠죠? 자만하는 순간 작가는 끝나요. 제가 그랬거든요.”
경험에서 나오는 진심 어린 충고였다.
“누구 말인데 당연히 들어야죠.”
혁준은 이 세상 제일 행복한 사람처럼 미소를 지었다. 그런 미소를 보며 지수는 이런 생각을 했다. 혁준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고.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지수가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 고민할 때쯤 옥상의 문 옆에 몸을 숨긴 누군가의 핸드폰이 무음으로 혁준과 지수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저 사람이 매번 점수가 높은 이유가 이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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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은 우 피디와 하늘 출판사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자신들의 드라마를 업로드하지 못하게 된 이번 상황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영어 자막은 전부 준비되었습니까?”
태성의 질문에 우 피디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다음 주에야 모든 편의 자막이 나올 거 같아.”
“그렇군요. 그럼 자막이 나오는 데로 업로드합시다.”
“근데 그래도 괜찮을까?”
“미국 사이트니 괜찮을 겁니다. 그래도 한국보다는 자유가 보장되지 않습니까? 그곳에 올리면 대한 레벨 관리국에서도 어쩌지 못할 겁니다.”
“그래. 그럼 자막이 나오는 데로 전편 동시에 업로드하자고.”
“네.”
낭만 학교는 한국말로 대본을 쓰고 한국 배우와 함께 한국에서 제작한 드라마였다. 그렇기에 한국을 기반으로 하는 플랫폼에 드라마를 업로드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라에서 그걸 막는다면 별수 있겠는가?
다행히도 미국에 기반을 두고 있는 동영상 사이트는 한국에서도 워낙 유명했다. 또한, 낭만 학교의 1화와 2화는 사람들에게 매우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렇기에 태성은 플랫폼을 바꿔도 드라마가 성공할 거란 자신이 있었다.
짧은 회의가 끝나고 우 피디는 사무실을 떠났다. 대신 은우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정말 하실 거예요?”
“네. 다음 주에 전부 업로드할 예정입니다.”
“이럴 때 보면 작가님도 참 대단하세요. 포기를 모르시니.”
“은우 씨는 계속해서 제가 걱정이 되는 겁니까?”
“그걸 말이라고 해요? 당연하죠! 나라에서 태클까지 걸어왔는데 그걸 또 업로드하시려고 하시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 드라마는 지금의 세상에 꼭 필요한 이야기입니다. 작가로서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말씀하실 거 같았어요.”
은우의 푸념에 태성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저를 제일 걱정해주는 사람은 은우 씨뿐입니다.”
태성은 은우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태성의 품에 얼굴을 기대었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렇게 절 걱정시켜요?”
“미안합니다. 그리고 항상 고맙습니다.”
“어젯밤 제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아세요? 이번 일로 작가님이 멀리 떠나는 꿈을 꿨단 말이에요.”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약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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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혁준과 지수의 사진을 찍은 교육생은 그 사진을 들고 지수를 찾아갔다. 그 교육생은 30대 초반의 여자로서 이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글을 잘 쓴다 생각하는 오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혁준이 항상 자신보다 높은 점수를 받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런 확신이 들었다. 두 사람은 사귀는 사이다. 그래서 지수가 혁준에게 높은 점수를 주는 거다. 그녀는 이런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퍼트리기 시작했다. 물론, 자신이 몰래 찍은 사진과 함께 말이다.
원래 소문이란 마치 바람처럼 빠르게 퍼져간다. 혁준과 지수에 관한 루머도 그러했다. 교육원의 직원들과 다른 선생님들 그리고 교육생들 사이에서 두 사람의 이름이 끊임없기 거론됐다.
- 그럼 공평하게 점수를 매길 수가 없잖아.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 어쩐지 그 남자가 항상 1등을 하더라.
- 와.. 어이가 없다. 난 남자 선생님이나 꼬셔야겠다.
- 서지수 작가님 임신했다는 얘기 들었어?
- 어쩐지. 배가 계속 나오시더라.
- 곧 둘이 결혼도 한 대.
그렇게 루머는 당사자들은 모르게 점점 커져갔다.
두 사람 중, 이 루머를 먼저 듣게 된 사람은 지수였다. 그날 그녀는 평소보다 일찍 교육원에 도착했다.
강의실이 꽉 찬 상태였기에 그녀는 휴게실에서 오늘 할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구석진 자리에서 등을 돌려 앉아있었기에 그곳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녀를 보지 못했다.
마침, 점심 식사를 끝내고 4명의 여자 직원들이 커피를 들고 휴게실을 찾았다. 네 사람은 밥을 먹으면서 했던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혁준과 지수에 관한 루머였다.
수업을 준비하고 있던 지수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자신이 혁준과 사귀다니. 심지어 자신이 편파적으로 학생들에게 점수를 줬다니. 지수는 지금 자신이 듣는 모든 이야기가 믿기지 않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교육원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대로 놔뒀다가는 안될 거 같았다. 그렇기에 지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당당하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의 주인공인 지수가 갑자기 나타나자 놀란 듯 당황한 눈치였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제가 혁준 씨와 사귄다고요?”
지수의 질문에 가장 말을 많이 하던 직원이 대답했다.
“맞아요. 그렇게 말했어요. 왜요? 아니에요?”
“네.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그럼 두 사람이 왜 항상 붙어 다니는 건데요?”
“그야 혁준 씨가 질문이 많으니깐요. 열심히 하는 교육생을 열심히 도와줘야 하는게 선생님의 의무 아닌가요? 전 그렇게 생각하는데. 제 생각이 틀렸나요?”
“아니요.. 그건 아니죠.”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다행이네요. 딱 거기까지에요. 그러니 쓸데없는 소리는 이제 그만해 주세요.”
“그럼 그 사진은 뭔데요?”
사진이라는 말에 당당하던 지수가 흔들렸다.
“무슨 사진이요?”
“둘이 옥상에서 손잡고 데이트하는 사진이요.”
“뭐라고요? 그 사진을 어디서 봤는데요?”
“여기서 커피 마시고 있던 교육생한테 서요. 금발머리의 여자였는데... 근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사진이 교육생들 사이에서 제법 퍼진 거 같더라고요.”
금발머리의 여자라는 말에 지수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 거 같았다.
“알겠어요. 가서 물어봐야겠네요. 누가 그런 사진을 만들어서 남들에게 뿌리고 다니는지.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말하는데요. 전 혁준 씨랑 손을 잡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루머는 이제 그만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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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낭만 학교의 영어 자막이 완성되었다. 이제 내일이면 미국의 최대 동영상 사이트에 낭만 학교가 전부 업로드될 예정이었다.
태성은 이번 일로 가장 불안해하고 있는 은우를 달래주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까 고민하던 참에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어젯밤 제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아세요? 이번 일로 작가님이 멀리 떠나는 꿈을 꿨단 말이에요.
태성은 은우에게 자신은 무슨 일이 있더라고 항상 그녀와 함께 할 거라는 믿음을 주고 싶었다.
“이제 해야만 하는 건가?”
사실, 태성은 오래전부터 고민하고 있는 일이 있었다. 이제는 그 일을 해야 할 때가 온 거 같았다.
그날 밤, 태성은 은우를 하늘 출판사 건물 앞에서 만났다.
“작가님!”
은우는 건물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태성에게 뛰어가 그에게 팔짱을 꼈다.
“왔습니까? 오늘 하루도 수고했습니다.”
“매일 바쁘게 일해도 오늘처럼 작가님이 절 데리러 온다면 전 어떤 힘든 일도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럼 제가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됐어요. 작가님 바쁘시잖아요. 그래도 그런 말 들으니 좋네요.”
“진심입니다.”
태성은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은우 씨. 기억하십니까? 이곳에서 저희가 처음 만난 거”
“어머. 그러네요.”
은우는 새삼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제가 작가님 숨겨드렸잖아요.”
“맞습니다. 오늘 저희가 처음 만난 이곳에서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곳에서요?”
은우는 주변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특별한 건 없어 보였다.
“뭐를 하시고 싶으신데요?”
태성은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검은색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상자였다. 그 상자를 본 순간 은우는 방금 태성이 하고 싶다고 말한 게 뭔지 알 것 만 같았다.
곧이어 태성은 작은 상자를 열며 말했다.
“은우 씨.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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