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돌풍 (2)
24화. 돌풍 (2)
테이블 위로 무거운 침묵이 들어앉았다. 대화가 없이 세 사람이 서로의 눈치를 보는 가운데 유리가 입을 열어 침묵을 깼다.
“아빠. 나 배고파.”
“그래. 우리 딸. 밥 먹자.”
태성이 작은 갈비 조각을 유리의 밥 위에 올려줬다. 그리고 그는 웃으며 혁준을 바라봤다.
“내가 다 설명해줄게. 우선 밥부터 먹자.”
이번에 태성은 큰 갈비를 들어 혁준의 밥 위에 올려주며 말을 이어갔다.
“음식 다 식겠다.”
“알겠어요.”
혁준은 젓가락을 들어 태성이 준 갈비를 입에 넣었다. 한편, 은우는 태성과 혁준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녀를 보며 태성은 부드럽게 말했다.
“은우씨도 얼른 드세요.”
“네? 아 네. 잘 먹겠습니다. 작가님.”
그제야 은우도 수저를 들었다. 참으로 대화가 없는 식사 자리였다. 무거운 침묵 속에 유리 홀로 말을 하였다. 이 아이가 없었다면 먹자마자 곧바로 체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길게 만 느껴지던 식사 자리가 끝나고 은우는 유리를 데리고 거실에서 만화 영화를 봤다. 당연히 유리가 가장 좋아하는 소피아 공주를 보고 있었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친구들과 함께 바다의 해골 왕자를 도와주는 소피아 공주가 그렇게 좋은지 유리의 시선이 한순간도 텔레비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편, 은우는 눈만 텔레비전의 화면으로 향했지 모든 감각이 태성과 혁준이 들어간 방으로 향했다.
‘내가 괜한 말을 해서 이런 거 아냐. 하여튼 간 난 입이 방정이야.’
그 순간 텔레비전에서 소피아 공주가 해골 왕자와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이모. 우리는 케이크 언제 먹어?”
“응? 아. 케이크. 아빠랑 삼촌이 방에서 나오시면 먹자.”
“지금 먹고 싶은데...”
“우리 조금만 참자. 알았지?”
“응!”
이럴 때 보면 아이로 사는 게 맘이 편한 거 같았다. 그나저나 저 케이크를 오늘 안에 먹을 수 있으려나...?
한편, 태성은 혁준에게 모든 걸 설명해주었다. 자신이 50년 전 뺑소니 사고로 인해 냉동인간이 된 사실. 안 박사에 의해서 다시 깨어난 것과 자신이 어떻게 레벨도 안 되는데 직업을 작가로 전직했었는지까지 말이다.
현재 혁준은 매우 혼란스러워 보였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했다고 하지만 냉동인간을 깨어나게 할 수 있는 경지까지 올라가다니. 그리고 만약 실제로 그게 가능하다면 뉴스에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
“그....그럼 그 박사님이 왜 형을 숨긴 건데요?”
“그건 내가 박사님한테 연구 목적으로 내 피를 드렸거든. 그 대가로 난 자유를 얻은 거고.”
“형의 피를요?”
“응.”
이제 태성은 혁준에게 작가의 원석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지만 혁준은 여전히 믿을 수 없겠다는 눈치였다. 하긴, 냉동인간에서 깨어났다는 얘기를 누가 믿겠는가? 은우처럼 태성의 말을 쉽게 믿어주는 게 오히려 비정상이지.
“너 솔직히 못 믿겠지?”
“... 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작가의 원석 덕분에 얻은 스킬이 뭔지 보여줄게.”
독서왕이라는 패시브 스킬을 알게 된다면 혁준이는 매우 상심하게 될 것이다. 그 스킬과 함께라면 100배는 빠르게 경험치를 모을 수 있으니. 현재 혁준의 레벨은 33이었다. 지금까지 힘들게 노력하며 모아온 경험치의 결과였다. 그런 자신의 노력과 비교한다면 충분히 억울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걸 보여주지 않는 이상 혁준이는 믿지 않을 거 같았다. 태성은 주머니에서 자신의 레벨증을 꺼내 혁준에게 스킬창을 보여줬다.
[기본 액티브 스킬]
[1. 체력 업! (Lv 14.) - 60분 동안 체력 7% 상승]
[2. 천운 (Lv 12.) – 60분 동안 운 5% 상승.]
[직업 액티브 스킬]
[1. 속독 (Lv 1.) – 5분 동안 책을 두 배속으로 읽을 수 있다.]
[2. 레벨 65에 활성화됩니다.]
[직업 패시브 스킬]
[1. 독서왕 – 책의 글자를 100개 읽을 때 마다 경험치 10 획득.]
[2. 작가왕 – 레벨 100에 활성화됩니다.]
[3. 독자의 미소 (Lv 1.) - 자신의 글을 읽은 독자들이 행복해짐]
태성이의 직업 패시브 스킬을 확인한 혁준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고급 스킬인 독자의 미소는 둘째 치고 독서왕이라는 스킬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태어나서 들어본 적도 없는 스킬이었다.
“이거였군요. 형의 정체가.”
“괜히 이걸 알려주면 네가 상심하게 될까 봐 말 못 했었어. 절대 악의는 없었으니 오해하지는 말아줘.”
“형도 나름대로 그동안 힘들었겠네요. 가족도 없이 기억도 없이 서른 다섯 살이라는 나이에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했으니.”
그 말에 태성은 약간 감동을 받았다. 걱정과 달리 혁준은 자신을 이해해주는 거 같았으니.
“처음에는 조금 혼란스러웠지.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 너도 있고 유리도 있으니.”
“근데요... 만약 저도 냉동인간이 되었다가 다시 깨어나면 형처럼 글을 잘 쓸 수 있을까요?”
뭐? 뭐라고? 태성은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네가 뭐가 되겠다고?
“저도 냉동인간이 되었다가 깨어나면 형처럼 독서왕이라는 스킬이 생길까요? 그럼 저도 레벨이 빨리 오를 테고 형처럼 글도 잘 쓸 수 있겠죠?”
“혀...혁준아...”
그날 밤, 태성, 혁준 그리고 은우. 세 사람 모두 쉽게 잠들지 못 했다. 태성은 혁준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얘가 얼마나 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런 말을 할지 안타까웠다.
한편, 혁준의 머릿속에는 독서왕이라는 스킬이 떠나지 않았다. 자신도 그 스킬을 소유하고 싶었다. 만약 그 스킬이 있었다면 지금쯤 레벨이 얼마나 높을까? 그랬다면 작가 스탯도 높았겠지...? 이런 생각들이 혁준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은우는 자신의 괜한 말로 태성이 곤란해졌을까 봐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그 인터뷰는 또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미 한다고 대답해버린 인터뷰였으니 해야 했다. 물론 다시 전화를 걸어 못한다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신인 작가가 그렇게 한다면 분명 교만한 작가라며 안 좋은 얘기가 오고 갈 것이다. 이래서 애초에 인터뷰를 피했던 건데. 걱정이 앞선 나머지 도저히 잠을 못 청하는 은우였다.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내일 당장 작가님을 데리고 인터뷰를 준비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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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우와 철저한 준비를 끝낸 태성은 출판사 근처에서 김나리 기자를 만났다. 그녀는 태성을 처음 보자마자 매우 놀란 듯 보였다. 이렇게 훤칠한 작가가 있다니.
“안녕하세요. 뉴스 패치의 김나리 기자입니다.”
그녀는 태성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한태성이라고 합니다. 전 명함이 없어서 받기만 하겠습니다.”
“작가가 명함이 필요한가요. 책이 곧 명함이지.”
태성이 자리에 앉자마자 나리는 질문을 이어갔다.
“근데요 정말 시작부터 만렙이야의 작가님 맞으세요?”
“네. 맞습니다.”
“와... 그렇게 생겨가지고 글까지 쓰면 반칙이죠.”
“네?”
“하하. 아닙니다. 그럼 인터뷰 시작할까요? 인터뷰는 처음이시죠? 너무 긴장하지는 마세요.”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긴장하지 않았으니.”
인터뷰를 위해서 은우랑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가? 그리고 고작 인터뷰 때문에 왜 긴장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태성이었다. 그냥 준비한 자신의 이야기를 질문에 맞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작가님이 워낙 베일에 싸여져 계셔서 제가 하고 싶은 질문이 참 많거든요.”
잠시 후, 커피와 함께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나리는 태성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질문을 던졌다.
“현재 작가님의 레벨이 어떻게 되시나요?”
은우의 예상대로 레벨을 먼저 물어봤다. 이 순간을 대비해서 이틀 동안 책을 엄청 읽었다. 최소한 레벨 60은 넘어야 작가로 전직했다는 게 말이 될 테니.
“지금 레벨 61입니다.”
“그럼 직업이 웹 소설 작가가 아니라 그냥 작가시겠네요.”
“네. 맞습니다.”
태성은 당당히 자신의 레벨증을 꺼내 보여줬다. 이틀 동안 책을 열심히 읽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혹시 이번 소설 이전에 작업하신 작품은 있나요?”
이번에도 은우가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당연 미리 준비한 대답이 있었다.
“그동안 습작을 많이 했습니다. 대중들에게 제 글을 보여줄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군요. 그럼 이번 작품이 첫 작품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데뷔 작품부터 이렇게 돌풍을 일으키시다니. 대단하시네요.”
“아닙니다. 이렇게 큰 사랑을 받아서 많이 놀랐습니다.”
은우와 연습한 대로 최대한 겸손한 말투였다.
“이야. 겸손하시기까지 하네요. 그럼 글은 어디서 공부하셨어요? 대학교? 아님 학원? 그것도 아니면 독학?”
과거와 관련된 질문은 최대한 답을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고 말한 은우였다. 특히 학교에 관해선 말이다. 아무래도 대답은 거짓말이 될 테고 학교의 기록을 찾을 수도 있으니.
“거기에 대한 답은 피하고 싶습니다. 괜히 저에 대한 선입견만 생길 거 같거든요. 전 독자분들에게 오로지 글로서만 보이고 싶습니다.”
“우와. 멋지시네요. 작가다운 대답입니다. 작가님이 그러시다면 이 질문은 넘어갈게요. 그럼 다음 질문 이어갈게요. 작가님의 어린 시절은 어떠셨어요? 원래 책은 좋아하셨나요?”
이 질문 역시 은우의 예상대로였다. 은우는 이렇게 말하라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소설을 좋아했다고. 그래서 작가가 되고 싶었다고. 사실 확인이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태성은 이번 질문에는 은우가 말해준 대로 답하기 싫었다.
“사실 처음에는 책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읽어야 했기에 읽었습니다.”
태성은 사실 그대로 말했다. 처음 냉동인간에서 깨어났을 때 그가 책을 읽은 이유는 경험치를 얻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 했기에 읽었을 뿐이었다. 태성은 차분히 답을 이어갔다.
“근데 책이란 게 참으로 매력이 있더군요. 읽으면 읽을수록 책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아하. 그러시구나.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작가를 꿈꾸셨나요?”
“책을 읽다 보니 재밌었고 작가라는 직업에 흥미가 생겼습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러했으니.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작가님의 소설에 관해서 질문드릴게요.”
나리는 시작부터 만렙이야에 관한 질문을 이어갔다. 거짓말을 해도 되지 않았기에 태성은 더욱 편안하게 질문에 대답했다. 인터뷰 분위기는 더욱 좋아졌으며 나리의 표정에서 웃음이 떠나지를 않았다.
“그럼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차기작은 생각하고 계신가요?”
“네. 준비하고 있습니다.”
“혹시 어떤 이야기인지 조금만 힌트를 주실 수 있나요?”
“음... ”
이번 질문도 역시 은우랑 준비했었다. 은우랑 얘기했을 땐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발전하면 그때 알리겠다고 말하는 걸로 합의했다. 하지만 사실 태성은 다음 작품으로 도전하고 싶은 장르가 있었다.
“로맨스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로맨스요?”
“네.”
“판타지가 아니라요?”
“네. 이번엔 로맨스를 쓰고 싶습니다.”
“혹시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고 싶으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예전엔 로맨스를 쓸 자신이 없었습니다. 로맨스 같은 마음이 없었군요. 근데 요즘은...”
요즘은..? 나리는 침을 꿀꺽 삼키며 태성의 대답을 기다렸다.
“로맨스 같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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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가 끝나고 태성은 하늘 출판사로 돌아왔다. 사무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은우는 태성이 오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뛰어갔다.
“인터뷰 어땠어요? 연습한 대로 하셨죠?”
“네. 했습니다.”
“기자가 별다른 말은 없었고요? 이상한 질문은 안했어요?”
“대부분의 질문들이 은우 씨가 예상했던 질문들이었습니다.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그 말을 듣자 은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세요. 혹시라도 작가님이 곤란해지실까 봐. 그래도 인터뷰를 무사히 끝내서 다행이네요. 앞으로 인터뷰 문의가 오면 이미 했다고 말하면 되겠네요.”
“근데 질문 하나를 은우 씨가 말해준 대로 답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질문이었는데요?”
“제 신작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차기작 계획에 대한 질문에 로맨스를 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네? 뭐를 쓰신다고요? 로맨스요?”
“네. 그렇습니다.”
은우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그녀 역시 태성의 다음 작품이 판타지일 거라 생각했으니.
“작가님 진심이세요?”
“네. 진심입니다. 요즘 로맨스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로맨스를 담을 소재는 있으시고요?”
“네. 있습니다.”
있다고? 그럼 생각하신지 꽤 된 모양이네.
“그 소재가 뭔데요?”
“그게...”
태성은 은우의 눈치를 한번 살피더니 말을 이어갔다.
“신인 작가와 출판사 편집자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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