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알 수 없는 편안함 혹은 그리움
77화. 알 수 없는 편안함 혹은 그리움
오빠에게 엄마의 소실을 들은 지수는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지수의 엄마는 입원실에 누워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놀란 딸의 얼굴과 달리 상당히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엄마는 편해 보이네. 난 얼마나 놀랐는데.”
지수는 병원 침대 위에 누워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울컥했다. 두 번의 유방암 수술로 고생했는데. 또다시 이러다니.
그 순간, 입원실의 문이 열렸다. 지수의 첫째 오빠였다.
“검사는 끝났어. 이제 결과만 기다리면 돼.”
“오빠. 설마 엄마...”
“그만. 불안하게 그런 소리 하지 마.”
“응... 미안해.”
“너 한창 바쁠 텐데.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 대본 작업이 빨라서 조금은 여유 있어.”
“그렇다면 다행이네. 그나저나 너 이번 드라마 재밌더라.”
첫째 오빠의 입에서 자신의 드라마를 칭찬해주는 말이 나오다니. 그동안 작가 생활을 하며 오빠에게 듣는 첫 번째 칭찬이었다.
“정말? 오빠가 내 드라마를 본다고?”
“응. 요즘 재밌게 보고 있어. 와이프도 엄청 좋아해.”
“언니는 원래 칭찬만 해주잖아.”
지수는 이 순간이 너무 신기했다. 누구보다 냉철하게 판단하는 오빠에게 재밌다는 말이 나오다니. 그녀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번졌다.
[삐비비빅.]
지수의 핸드폰 벨 소리였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보니 태성이었다.
“오빠. 잠시만. 함께 일하는 작가님한테 연락이 와서.”
“그래.”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복도로 나갔다.
“여보세요?”
[네. 접니다. 어머니는 좀 괜찮으십니까?]
“지금은 주무시고 계세요. 검사를 했으니 결과를 기다려봐야죠.”
[아. 그렇습니까? 그럼 오늘은 어머니 곁을 지키시는 게 좋겠습니다. 대본은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아니에요. 노트북 가지고 왔어요. 엄마 옆 지키면서 저도 계속 작업할게요.”
[그럼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제가 해야 할 일이잖아요. 작가로서 제 일도. 엄마의 딸로서 제 일도 전부 잘하고 싶어요.”
지수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태성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병원에서 수고해주십쇼. 전 오늘 집에서 작업해야겠습니다.]
“네. 그럼 또 연락할게요.”
.
.
.
지수와 통화를 끝낸 태성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마침, 출근 준비를 위해 샤워를 끝낸 혁준이 그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
“아침부터 왜 그렇게 한숨이 깊어요? 무슨 일 있어요?”
“서지수 작가님 어머니가 쓰러지셨다네.”
“네? 작가님은요? 작가님은 괜찮으세요?”
“아마 많이 놀라셨겠지. 수술했던 부위가 갑자기 아프더니 쓰러지신 거래.”
“아이고... 유방암이었죠?”
“응. 수술도 두 번이나 하셨다고 했는데. 서지수 작가님이 걱정이 많으시겠지.”
“그럼 대본은요?”
“어머니 옆에서 간병하며 대본도 쓰시려나 봐.”
“맙소사... 서지수 작가님 힘드시겠네요.”
그냥 대본을 쓰는 일만 해도 지치고 힘들 텐데... 혁준은 힘들어하고 있을 지수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형. 우리 병문안 갈래요? 카페 사장님한테 전화해서 출근 조금 늦출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병원에서 대본을 쓰겠다는 지수의 말이 마음에 걸린 건 사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병문안을 가자는 혁준의 생각이 좋다 생각한 태성이었다.
“그래. 잠깐 가서 작가님 얼굴 뵙고. 어머니한테 인사도 드리면 좋겠다.”
“네! 그럼 저 사장님한테 당장 전화할게요.”
혁준은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핸드폰을 찾았다. 얘기만 잘하면 사장님이 허락해 줄 거 같았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다행히 사장님은 혁준의 늦은 출근을 허락해줬다. 요즘 그녀가 가장 재밌게 보는 드라마는 멜로디였다. 한마디로 그녀 역시 서지수 작가의 팬이었다.
그렇게 태성과 혁준은 지수를 응원할 겸 지수의 어머니를 만나 인사할 겸 병원으로 향했다. 서지수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은 강남에 위치한 최고급 시설의 병원으로서 레벨이 150이 넘는 사람만이 갈 수 있는 VVIP 병원이었다.
“우와. 이런 곳에 입원하는 사람이 진짜 있구나.”
너무나도 화려하게 생긴 병원의 외관에 혁준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편, 태성은 지금 자신이 서있는 곳이 병원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사람을 치료하는 곳이 왜 이렇게 사치스러운지. 모르고 밖에서 봤으면 최고급 호텔로 착각할 수준이었다.
“정말 이곳이 병원이 맞는 거야?”
“네. 여기 레벨이 높은 사람들만 입원할 수 있거든요. 아마 서지수 작가님도 여기는 입원 못하실걸요. 서지수 어머니도 레벨이 엄청 높으신 분이신가 봐요.”
“그런가 보네.”
“우와.. 서지수 작가님 가족도 엄청나네요.”
하긴... 그 젊은 나이에 그 좋은 차를 타고 다니니... 혁준은 괜히 어깨에 힘이 빠졌다.
“그나저나 저희가 사온 과일이 너무 초라해 보이진 않겠죠?”
혁준은 지금 태성이 들고 있는 과일 바구니를 가리켰다. 나름 백화점에서 가장 좋은 걸로 골라왔건만. 괜히 부끄러워지는 거 같았다.
“과일의 화려함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마음이 중요한 거지. 그럼 들어갈까?”
태성은 당당하게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전혀 위축될 필요가 없었으니. 그는 이곳에 병문안을 온 것이다. 아무리 병원이 화려하다고 한들 이곳은 병원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혁준은 역시 태성이 형이라 생각했다. 태성과 다르게 지금 그는 매우 위축된 상태이니.
“나 같은 레벨이 이곳에 들어가도 될지 모르겠네.”
혁준은 태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1층 로비에는 지수가 미리 내려와 기다리고 있었다.
“작가님! 혁준 씨!”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병원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1층에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의 신원을 확인했다. 지수가 두 사람의 신원을 확인해주자 그제야 경비원들은 태성과 혁준의 입장을 허가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와주셔서 감사해요.”
지수는 진심으로 이곳까지 와준 두 사람이 고마웠다. 엄마의 일과 대본 일로 힘 드러 할 자신을 응원하러 온 마음을 알았기에.
“어머니는 좀 어떠십니까? 검사 결과는 나왔습니까?”
태성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의사 선생님이 2차 검사를 한 번 더 하자고 하시더라고요. 좋은 결과가 있길 기도해야죠.”
목소리에 힘이 없는 지수였다. 그러자 혁준은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거요.”
혁준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갈색의 선물 상자를 지수에게 건넸다.
“어머 이게 뭐예요?”
“이거 저희 카페 콜드브루입니다. 작가님이 좋아하시는 거잖아요. 여기서 대본 작업하신다면서요. 차가운 물에 섞어서 드세요.”
자신이 좋아하는 커피까지 챙겨와 주다니. 혁준의 섬세함에 감동한 그녀였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그럼 올라갈까요? 사실 작가님 오신다고 했을 때 어머니가 엄청 좋아했거든요. 인사드리고 싶었다고.”
“아 그렇습니까? 그럼 올라가시죠.”
지수는 혁준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어머니가 혁준 씨도 보고 싶어 하세요. 제 팬이라고 말씀드렸거든요.”
“아 진짜요? 하하. 이거 영광이네요.”
자신을 엄마에게 소개해주다니. 혁준은 지수에게 조금은 특별한 사람이 된 거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세 사람은 지수 엄마의 병실로 올라갔다. 지수의 엄마를 만날 생각에 혁준은 긴장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너무 경직되어 있는 그의 모습에 태성이 웃으며 물었다.
“혁준아. 너 왜 그렇게 긴장하는 거야? 누가 보면 장모님 처음 뵈러 가는 사람인 줄 알겠다.”
컼. 장모님이라니. 마침 침을 삼키던 혁준은 그만 목에 침이 걸렸다.
“캑캑.”
“야! 괜찮아?”
태성은 혁준의 등을 처 주었다.
“뭐야? 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아 형!!”
두 사람의 모습에 지수는 피식 웃었다.
어느새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화려했던 로비처럼 복도도 매우 화려했다. 이곳에는 단 두 개의 병실만 있었다.
지수는 태성과 혁준을 엄마의 병실로 인도했다. 2차 검사를 끝낸 지수의 엄마는 일찍 방에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몸이 피곤했는지 그녀는 침대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어머. 이거 어쩌죠? 어머니가 주무시고 계시네요.”
“괜찮습니다. 우선 이거.”
태성은 병실 안에 보이는 넓은 책상 위에 자신이 들고 있는 과일 바구니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지수의 엄마를 쳐다봤다.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익숙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편안함이 태성을 안아주었다.
‘요즘 지수 씨를 매일 봐서 그런 건가? 그래서 지수 씨 어머니도 편안하게 느껴지는 건가...?’
한편, 혁준은 지수 엄마의 얼굴과 지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감탄했다.
“우와. 어머님이 상당히 미인이시네요.”
“하하. 엄마가 들었다면 좋아했겠네요.”
“그래서 작가님도 미인이신가 봐요.”
그의 말에 지수는 미소를 지었다.
“됐어요. 그만해요.”
세 사람은 병실에서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워낙 넓은 곳이었기에 문병을 온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따로 있었다. 그곳의 소파에 앉은 태성은 이상하게 지수의 엄마에게 시선이 향했다. 그도 그 이유를 몰랐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결국, 태성과 지수 엄마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다. 지수의 엄마가 깼을 때는 오후 두시쯤이었다. 태성과 혁준은 이미 떠난 상태였다.
“지수야..”
“어? 엄마. 깼어”
“네가 여기 왜 있는 거야? 드라마 작업은?”
“여기 왜 있기는. 엄마 때문에 있지. 아빠와 오빠들은 회사에 갔어. 여기는 내가 있으려고. 회사일은 회사에서 해야 하지만 대본은 노트북만 있으면 어디서든 집필할 수 있으니. 그러니 내 드라마는 걱정하지 마. 엄마는 엄마 건강 먼저 걱정해.”
지수는 보란 듯이 자신이 노트북을 가리켰다.
“그렇구나.”
그 순간, 지수의 엄마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엄마. 괜찮아? 어디 아픈 거야? 간호사 부를까?”
“괜찮아.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꿈 때문에 그래.”
도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눈물을 흘리시는지. 지수는 엄마가 걱정되는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곁으로 향했다.
“무슨 꿈이었는데 그래? 응?”
“친아빠를 만났어. 그것도 아주 생생하게 말이야.”
지수의 엄마는 지금까지 친아빠라는 사람의 얼굴을 사진으로라도 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 기억나는 모습만 몇 가지만 있었을 뿐. 하지만 그 기억에서의 아빠의 모습은 흐릿한 형태뿐이었다.
하지만 방금 꾼 꿈에서는 아버지의 얼굴을 또렷이 봤다. 사실 꿈에서 봤던 그 사람이 진짜 친아빠인지는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 아빠가 꼭 데리러 올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자신을 아빠라 호칭한 그 남자는 저만치 멀리 서서 자신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건 분명 작별 인사였다.
“너의 할아버지가 엄마를 보육원에 맡긴 그날이 꿈에 나왔던 거 같아. 아주 뚜렷하게. 혹시 어린 시절 봤던 이미지가 아주 미세하게 기억으로 남아있던 게 아닐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그 기억이 떠오른 거지.”
지수는 이토록 자신의 친아빠를 그리워하는 엄마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엄마.. 괜찮아?”
“꿈에서 너의 할아버지의 모습을 똑똑히 봤다고. 삼십 대 초반의 모습의 남자였어. 하얀 피부에 키도 크셨다고.”
“알겠어. 엄마. 우선 진정하자.”
지수는 침대에 앉아 엄마를 안아 주었다. 그러자 지수 엄마의 눈에서 떨어지던 방울 같았던 눈물은 흐르기 시작했다. 이내 그녀는 흐느끼며 울었다.
“지수야. 김 닥터한테 엄마 외출해도 되는지 물어봐 줄래?”
“어디 가려고?”
“키워주신 부모님이라도 보러 가려고.”
“알겠어. 물어볼게.”
그렇게 지수는 한동안 엄마를 안아 주었다. 요즘 들어 ‘엄마도 누군가의 딸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그녀였다. 가슴 뭉클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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