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제안 (1)
62화. 제안 (1)
혁준은 카운터에 서서 마주 앉은 태성과 지수를 쳐다봤다. 매우 진지해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지금 둘이 무슨 얘기하는 거지?”
두 사람의 표정을 보며 대화를 유추해보려는 혁준이었다. 당연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그래. 내가 무슨 초능력자도 아니고. 그냥 집에 가서 형한테 물어봐야겠다.”
한편, 진지한 분위기가 태성과 지수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드림픽처스의 대표님에게 들었습니다. 진심이십니까?”
태성의 질문에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멜로디의 작품성을 위해서는 그게 최선의 방법인 거 같아요. 원작자로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야 서지수 작가님이 허락해준다면 영광이죠.”
“그렇다면 저의 제안에 동의하신 거죠?”
“네. 그렇습니다.”
“좋아요. 그럼 멜로디의 드라마 대본은 공동 집필하는 걸로 결정하는 겁니다.”
그렇다. 지수가 태성에게 한 제안은 공동 집필이었다. 이로써 태성은 드라마 작가로 데뷔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감사합니다.”
“근데요..”
지수는 고개를 돌려 대놓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혁준을 쳐다봤다. 그녀의 행동에 혁준은 얼른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참으로 엉성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고개를 돌릴 바에는 그냥 당당히 쳐다보지. 지수는 다시 고개를 돌려 태성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저기 알바생과 친한 사이세요?”
“혁준이요? 물론이죠. 제게는 가족 같은 친구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거 아십니까? 혁준이가 작가님을 엄청 존경합니다.”
“네. 알아요. 저한테도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작가님을 보며 드라마 작가를 꿈꿨던 친구입니다. 혁준에게 이따금씩 격려의 말 부탁드립니다.”
태성의 말에 지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알겠다는 뜻의 미소인지 싫다는 뜻의 미소인지 가늠이 안 되는 묘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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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와의 만남 이후, 태성은 집으로 돌아왔다. 카페를 떠나 집으로 오는 길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태성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믿을 수 없었다.
“내가 드라마 작가가 된다는 거지..?”
태성은 거실에 놓인 텔레비전의 앞으로 향했다. 요즘 시대에 텔레비전이 없는 집은 거의 없었다. 즉, 텔레비전으로 방송되는 드라마를 집필한다는 건 전 국민을 상대로 글을 쓴다는 거였다.
“이거 흥분되는걸?”
자신의 작품을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다니. 작가로서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에 그는 책상으로 향했다.
“그럼 지금까지 정리한 내용을 한번 점검해 볼까?”
태성은 책상의 서랍장을 열었다. 안에 있는 노트를 꺼내기 위함이었다. 그는 노트를 펼쳐 그 안에 손으로 직접 적은 내용을 살폈다. 그 순간, 태성의 시선이 노트의 한쪽 면에서 멈추었다.
지난번, 보육원에서 전화 왔을 때 적은 내용이었다. 과거 유리를 입양했던 부부의 이름, 전화번호 그리고 주소였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네..”
최근 온 신경을 멜로디에 써서 그런지 친딸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어쩌면 태성은 지금 그의 상태에 만족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보육원에서 데리고 온 유리, 함께 살고 있는 혁준, 그리고 그의 연인인 은우까지 말이다.
“아직 날 기다리고 있을까?”
설사 기다린다고 해도 자기보다 젊은 남자의 말을 믿을까? 어쩌면 태성은 친딸에게 거절을 당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정보가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좋은 거겠지?”
태성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태성의 핸드폰의 알림이 울렸다. 유리가 유치원에서 돌아올 시간이었다.
“우선 이 딸부터 챙겨야지.”
태성은 유치원 셔틀버스가 오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아줌마들이 모여 있었다. 이제 태성은 제법 아줌마들과 익숙하게 인사했다.
잠시 후, 노란색의 셔틀버스가 도착했다. 버스 문이 열리자 귀여운 동물들이 그려진 연두색의 앞치마를 입은 여자 선생님이 먼저 내렸다. 그녀의 말에 아이들이 하나둘씩 버스에서 내렸다.
“엄마!!”
“나 오늘 선생님한테 칭찬받았다!”
“엄마 나 배고파요.”
아이들은 전부 자신들의 엄마에게 달려가 안겼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유리는 태성에게 달려갔다.
“아빠. 나 오늘 달리기 1등 했어!”
“와. 진짜? 우리 딸 대단하다.”
태성은 유리를 안아주었다. 엄마들과 아이들은 내일 또 보자며 서로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흩어졌다. 태성도 유리를 데리고 갈려는 찰나 셔틀버스 앞에서 훌쩍 거리며 울고 있는 남자아이가 보였다.
“상명아. 어머니가 늦으시네.”
“엄마. 엄마!!”
그는 엄마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아이를 안아주며 달랬다.
“괜찮아. 어머니 곧 오실 거야. 선생님이 전화해 볼까?”
어느새 상명이의 얼굴은 눈물 범벅이 되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유리가 태성에게 말했다.
“아빠. 아빠는 늦으면 안 돼. 알겠지?”
“그래. 알겠어.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딸 데리러 안 늦을게.”
그 순간, 멀리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상명의 엄마였다 그녀는 허겁지겁 뛰어와 울고 있는 아들을 안아주었다.
“우리 상명이 왜 우는 거야? 응?”
“엄마 늦었어!”
“엄마가 안 와서 그랬던 거야?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요 앞에서 친구를 만나서 그래. 다음에는 안 늦을게. 약속해.”
두 모자의 평범하지만 상명이의 눈물 때문에 극적으로 보이는 상봉을 보며 태성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50년 전, 만약 자신이 다시 보육원에 갔다면 어땠을까라고. 그랬다면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던 친딸도 저렇게 울었을 거라고.
“유리야.”
“응?”
“만약 아빠가 오기로 했는데 안 오면 넌 아빠 기다릴 거야?”
“당연하지.”
“그럼 유리는 끝까지 아빠 기다릴 거야?”
“응. 무조건 기다릴 거야. 아빠니깐.”
아빠라서 그럴 거라는 어린 딸의 말에 태성의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래. 만약 아빠가 늦게 오면 무조건 기다려야 해. 알겠지? 아빠가 무조건 찾으러 올게.”
아마 50년 전에도 태성은 같은 말을 했을 거다. 이제 그 약속을 지켜야 할 때였다. 비록 많이 늦어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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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형!!”
카페의 마감을 마치고 집에 온 혁준은 태성을 급하게 불렀다. 유리와 함께 소파에 앉아 소피아 공주를 시청하고 있던 태성은 그를 보며 차분히 대답했다.
“왜 그렇게 부르는 거야. 뭔 일이야?”
“오늘 서지수 작가님은 왜 만난 거예요?”
“아. 그거.”
태성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을 꺼냈다. 하지만 혁준에게는 매우 중요한 듯 보였다.
“그래 그거요! 그게 뭐예요?”
“멜로디 때문에 만난 거야.”
“네? 멜로디요? 형 요즘 음악 해요?”
“아니. 그거 말고. 내 소설.”
“아. 형 소설. 근데 왜요? 왜 형 소설 때문에 만난 건데요?”
“그분이 내 소설을 원작으로 드라마를 쓰고 싶으시데. 그래서 만난 거야. 나랑 같이 공동으로 집필하자고.”
“아. 드라마를 공동으로 집필하자고...”
잠시만!?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혁준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형이랑 서지수 작가님이랑 드라마를 공동으로 집필한다고요? 그니깐 같이 한다는 거죠?”
“그래. 그거 때문에 오늘 만난 거야. 자기가 카페에서 작업하니 그곳으로 와달라고 하더라고.”
“헐. 대박. 그럼 형 이제 드라마 작가로 데뷔하는 거예요?”
“뭐.. 그렇게 됐네.”
“와.. 대박.”
“근데 넌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건데? 서지수 작가님 때문에 그런 거야?”
“네. 맞아요.”
혁준은 힘없이 태성의 옆자리에 앉았다.
“뭐야? 뭔데 그래? 작가님이랑 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태성의 질문에 혁준이 대답하려고 했다. 그때였다.
“아! 조용히! 조용히! 아빠랑 삼촌 때문에 하나도 안 들리잖아.”
소피아 공주의 목소리가 잘 안 들리자 유리의 표정이 짜증 가득했다. 태성은 그런 딸을 안아주며 말했다.
“알겠어요. 우리 딸. 아빠랑 삼촌이 미안해.”
“응! 조용. 조용.”
그날 밤, 태성은 자신의 노트를 다시 펼쳐 50년 전 자신의 친딸을 입양했던 부부의 이름과, 번호 그리고 과거 주소를 읽었다. 이미 번호로 전화를 걸어봤지만 지금은 없는 번호라는 음성메시지만 들렸다. 이제 남은 건 주소뿐이었다.
“아직 이곳에 살고 계시려나?”
지금 태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곳에 찾아가는 일 뿐이었다.
“내일 가보면 알겠지.”
다음날, 유리를 유치원에 보낸 태성은 직접 운전하여 보육원에서 알려준 주소지로 향했다. 잠실역 근처의 고급 아파트였다.
“뭐야? 왜 이렇게 좋은 아파트야?”
아파트 외벽을 보아하니 생긴지 얼마 안 된 듯 보였다.
“설마 재건축된 건가?”
태성은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아파트 경비원에게 물었다. 그의 예상대로 아파트는 5년 전에 재건축된 상태였다.
“하.. 그럼 이 주소에 이분들이 살고 있을 리가 없겠네.”
아니지. 아파트가 재건축된 이후 다시 돌아왔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태성은 경비원에게 부탁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름의 노부부가 아직 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경비원은 안 된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태성은 그의 주머니에 몇 장의 현찰을 넣어주었다. 그러자 경비원은 곧바로 태도를 바꾸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태성은 초조한 마음으로 경비원을 기다렸다. 제발 노부부가 아직 이곳에 살고 있기를 기도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잠시 후 경비원이 돌아왔다.
“어떻게 됐나요? 그분들이 아직 이곳에 살고 계시나요?”
그의 질문에 경비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파트 거주자 명단에는 없네요.”
“아..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아쉽게도 그들은 이곳에 없었다.
“하.. 이제 어쩌지?”
태성은 아파트 단지를 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태성이 알고 있는 정보로는 그 부부가 언제 이사를 갔는지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동사무소에 가서 알아봐야 하나?”
물어본다고 그곳에서 알려주겠는가? 등본이 필요할 텐데.
“그럼 이제 어쩌지?”
경찰에 맡기자니 적당한 핑계가 없었다. 그렇다고 믿을 수 없는 심부름센터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정보를 잘 모으며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려나...?”
태성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안 박사였다. 하지만 안 박사는 자신이 먼저 연락할 때까지 연락을 하지 말라고 했다.
“누구 다른 사람 없나...?”
그 순간, 태성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맞다! 그 사람이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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