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자존심
60화. 자존심
드림 픽처스에서 나온 지수는 카페로 향했다. 언제나와 같이 같은 자리에 앉은 그녀는 노트북으로 은하가 말했던 멜로디라는 제목의 소설을 검색했다. 그녀는 먼저 작가의 이름을 확인했다.
“한태성 작가라...”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이름이었다. 지수는 인터넷으로 한태성 작가를 검색했다. 그동안 태성이 했던 인터뷰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나름 이름 있는 작가님이시네.”
지수는 몇 개의 인터뷰 기사들을 훑어보더니 멜로디를 읽기 시작했다. 현재 멜로디는 10화까지 무료 공개되어 있었다. 하지만 미리 보기를 구매한다면 20화까지 읽을 수 있었다.
“한태성 작가님. 당신의 소설이 얼마나 잘난 소설인지 한번 봅시다.”
어떻게 해서든지 소설의 부족한 점을 찾아 드라마로 제작할 수 없는 꼬투리를 잡겠다 생각한 지수였다.
하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그녀는 점점 더 멜로디에 빠져갔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우스는 다음 화를 클릭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소설에 빠진 그녀는 어느새 20회까지 끝냈다.
“뭐야? 벌써 끝이야?”
더 읽고 싶다는 아쉬움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놀란 지수였다.
“이 소설 더럽게 재미있네...”
그녀는 드라마 작가로서 소설에 담긴 이 이야기를 어떻게 드라마에 옮겨 닮을까 구상했다. 남자 주인공을 중심으로 조연들의 이야기들이 하나로 뭉쳐졌다. 다만,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여자 주인공이 없다는 거였다.
“드라마로 제작되려면 여자 주인공이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새로운 캐릭터가 들어갈 여유 따위는 없어 보였다. 워낙 소설의 구조가 촘촘했으니.
“그렇다면 조연들 중에 한 명을 여자 주인공으로 만들어야겠군.”
20화까지 세 명의 여자 캐릭터가 등장했다. 한 명은 플롯 전공자였지만 결혼을 하고 아기를 가지며 자연스럽게 플롯을 손에서 놓은 엄마였다. 다른 한명은 자신의 몸보다 큰 첼로를 힘겹게 등에 메고 다니는 여고생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여자 캐릭터는 피아노에 타고난 재능이 있지만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감히 피아노 연주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각각의 캐릭터들은 서로 다른 사연을 갖고 있었다. 그들 중, 지수의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마지막 캐릭터였다. ‘만약 그녀가 여자 주인공이라면 어떨까?‘라고 시작한 생각은 너무나도 순조롭게 이야기로 전개되었다.
“이거 드라마로 만들어도 재밌겠는데?”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에 주인공들을 톱스타로 캐스팅하고 나머지 조연들은 잘생기고 예쁜 배우들로 깔아 놓으면 높은 시청률은 보장될 거란 확신이 찼다. 어느새 멜로디에 완전히 매료된 지수는 이 소설을 드라마로 쓰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이렇게 쉽게 생각이 바뀌다니. 뭔가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너무나도 훌륭한 이야기에 굴복해버렸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은하에게 문자를 보냈다.
[언니. 저 이 소설을 원작으로 대본 쓸게요. 서류들 준비해주세요.]
결국 은하가 했던 말들을 인정한 그녀였다. 하지만 마음이 무거운 건 사실이었다.
“세상은 넓고 작가는 많구나..”
지수는 담배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이제 제법 봄 날씨였다. 기분 좋은 햇살과 산뜻한 바람에 기분이 조금은 편안해진 듯했다.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나저나 아직 완결도 안 된 소설이잖아. 그렇다면 드라마가 방영이 될 때도 소설이 연재가 될 거란 소리인데... 이러다 내가 쓴 드라마 버전이랑 원작자가 쓴 소설이랑 맨날 비교되는 거 아냐?”
만약 그렇다면 원작자의 소설보다는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지수였다. 작가의 욕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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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멜로디를 드라마로 제작하고 싶다는 제안에 은우는 적지 않게 놀랐다. 이제 연재를 시작한 지 겨우 2주차였으니.
“도대체 뭘 보고 드라마로 제작하고 싶다고 한 거지?”
미리 보기를 결제한다고 해도 겨우 20화였다. 우선, 은우는 드라마 제작을 제안한 드림 픽처스에 대해서 알아봤다. 드림 픽처스는 10년 동안 무려 16편의 드라마를 제작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드라마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거나 상대적으로 낮은 시청률을 기록했어도 작품성 면에서 극찬을 받은 작품이었다.
“생각보다 굵직한 곳이네.”
드림 픽처스에 대한 간단한 조사가 끝나자 은우는 드림 픽처스에서 보내온 이메일을 자세히 읽었다. 상당히 자세한 내용들이 적혀있었다. 이 소설을 드라마로 제작하고 싶은 이유에서부터 어떤 작가에게 드라마 대본 작업을 맡길 건지, 이 소설이 드라마로 제작됨으로 출판사가 얻게 될 이득까지 말이다.
“아무래도 작가님이랑 상의해야겠는걸?”
은우는 곧바로 태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우의 이야기를 들은 태성은 당장 출판사로 오겠다고 했다. 한 시간쯤 흘렀을까? 태성은 하늘 출판사에 도착했다.
“정말 제 소설을 드라마로 제작하고 싶다고 했습니까?”
목소리에서 태성의 흥분감이 드러났다. 좋아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은우도 기분이 좋았다.
“네. 저도 놀랐다니깐요. 연재를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제안이 들어오다니. 역시 작가님은 대단하세요.”
“아닙니다.”
“그럼 작가님은 이번 일이 진행되기를 원하시는 거죠?”
“진행이 된다면 저야 영광이죠. 아무래도 드라마가 웹 소설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매개체이지 않습니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 이야기가 다가간다는 건데 당연히 좋죠. 근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만약, 드라마로 제작하게 된다면 소설의 연재를 그만둬야 하는 겁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한번 만나보고 조정해야 할 거 같아요. 우선 저쪽의 입장은 아직 유료로 넘어간 건 아니니깐 드라마로 제작하게 되었다고 공지하고 연재를 중단하기를 원하더라고요. 그러다 드라마가 방송되면 그때 맞춰서 책으로 출판하면 어떻겠냐고.”
“아무래도 아직 무료 연재이니 독자들도 이해하겠죠.”
만약, 소설이 유료였다면 연재를 중단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지금까지 돈을 내며 소설을 읽어준 독자들을 배신하는 일이니. 물론, 무료로 연재되는 소설을 중단하는 거 역시 독자들과의 약속을 어기는 일이었다. 하지만 돈이 관련되는 순간 일의 책임감이 높아지고 복잡해지는건 사실이었다.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 연재를 중단하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어차피 나중에 종이책으로 출판 된다면 괜찮을 거 같습니다. 대신 지금까지 소설을 좋아해 주신 독자분들에게 보답을 한다면요.”
“알겠어요. 그럼 독자분들에게 보답하는 방법은 저도 생각해 볼게요.”
“그리고 궁금한 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드라마로 제작이 된다면 소설과 이야기가 같아지는 겁니까 아님 초반 설정과 캐릭터만 가져가고 이야기의 전개는 달라지는 겁니까?”
“그건 아무래도 드라마 대본을 담당하게 될 작가님과 상의해봐야겠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조건을 붙이고 싶습니다.”
“무슨 조건이요?”
“멜로디가 드라마로 제작된다고 해도 이 이야기의 원작자는 저입니다.”
“그건 당연하죠.”
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성의 말에 동의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태성은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말입니다. 저도 드라마 대본 작업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그럼 작가님도 대본 집필에 참여하고 싶으신 거예요?”
“욕심이 나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드라마와 소설은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건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렇겠죠. 드라마와 소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니깐요. 그럼 어떤 의미에서 드라마 대본 작업에 참여하고 싶으시다는 거예요?”
“대본 회의 때 참여하는 것과 대본이 나오면 먼저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럼 작가님이 전반적인 대본 관리를 하고 싶으신 거죠?”
“네. 그렇습니다. 이 소설은 제 이야기입니다. 혹시라도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면 막고 싶습니다.”
그의 말이 백 퍼센트 이해가 되는 은우였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드라마 대본을 쓰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매우 자존심이 상할 일이었다.
“그게 작가님이 원하시는 거라면 우선 계약 조건으로 얘기해볼게요. 드라마의 대본을 맡게 될 작가분이 신인이시면 좋겠네요...”
“은우 씨.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쇼. 저도 드라마 대본을 맡게 될 작가분을 최대한 존중할 겁니다. 다만, 제 이야기를 망치는 일만 막고 싶은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알겠어요. 그럼 작가님의 뜻을 저쪽에게 전달할게요.”
“네. 부탁드립니다.”
은우는 최대한 공손하게 이메일을 작성했다. 그녀의 답장을 받은 은하는 곧바로 지수에게 연락했다. 이번 여름에 드라마를 방송해야했기에 대본을 최대한 빨리 끝낼 필요가 있었다. 어찌되었건 대본이 나와야 모든 일이 시작될 수 있었기에.
“그래서 그쪽은 하고 싶데요?”
지수는 대표실에서 마주 앉은 은하를 보며 물었다.
“당연하지. 드라마로 제작하고 싶다는데 어떤 출판사가 그걸 싫다고 하겠어. 자신들에게 이득이 얼마나 많은데.”
“다행이네요.”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라는 부정적인 단어와 함께 은하는 매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그러자 지수는 뭔가 불길했다.
“왜요? 그쪽에서 뭐라고 하는데요?”
“조건이 하나 있다네.”
“조건이요? 자신이 원작자이니 대본 회의에 참석하고 싶다고 하던가요?”
“응. 맞아.”
“좋아요. 저도 그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원작자가 함께 해주면 저도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잖아요.”
이 정도는 대부분의 원작자들이 원하는 조건이었다. 지수도 그 마음은 이해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쿨하게 동의했다.
“다행이네. 그런데 말이야...”
또다시 ‘그런데’가 나왔다.
“조건이 또 있어요?”
“응. 대본 작업이 끝나면 자신이 먼저 읽어보고 싶다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보고 대본을 검사 맡으라는 거예요?”
“음... 보는 관점에 따라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
“언니. 그 원작자 미친 거 아니에요? 저 서지수라고요! 스타작가 서지수요. 자기의 작품을 원작으로 대본 작업을 하겠다는데 영광으로 생각하고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자기가 뭐라고 제 대본을 검사하겠대요?”
지수는 매우 기분이 나빴다. 아무리 마지막 작품이 망했다고 하지만 아직 영향력 있는 작가였다. 그런 자신의 대본을 감히 검사하겠다고 하다니. 그런 그녀를 보며 은하가 말을 이어갔다.
“그쪽에서는 아직 대본을 맡을 작가가 너란 걸 몰라.”
“그래요? 그럼 빨리 전해줘요. 대본을 맡은 작가가 저라고요.”
“알겠어. 그렇게 할게. 근데 그쪽은 최대한 대본을 집필할 작가를 존중하고 싶대. 그저 대본의 이야기가 제대로 흘러가는지 확인하고 싶다고.”
“확인하고 싶다는 말이 검사하겠다는 말이죠. 그리고 작가를 존중하고 싶다는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대요?”
“우선 너의 뜻을 알았으니. 그대로 전할게.”
“네. 그리고 답장이 오면 뭐라고 했는지 저한테 바로 말해줘요.”
“알겠어. 근데 만약 그쪽에서 뜻을 안 굽히면 어떡할 거야??”
은하의 질문에 지수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저 이번 드라마 안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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