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변화의 시작
42화. 변화의 시작
은우를 만날 생각에 예리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여자를 기다리면서 이토록 긴장된 순간이 있었던가? 스스로의 모습이 웃겼는지 갑자기 피식 웃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승우가 의아한 듯 물었다.
“너 좀 무서울려 그런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몸을 떨면서 웃는 거야?”
“아 그게..”
자신에게 은우가 어떤 존재인지 말하기 괜히 쑥스러운 예리였다.
“누가 지금 너 보면 소개팅 상대 기다리는 중인 줄 알겠다. 지금 긴장하고 있는 거야 아님 좋아하고 있는 거야?”
“음... 아마 둘 다일걸요.”
“둘 다라고? 우리 출판사와 적대 관계에 있는 출판사의 직원을 만나서 그러는 건가?”
“그건 아니에요. 그거라면 좋아하지는 않겠죠.”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럼 뭔데?”
“그게...”
예리가 또다시 머뭇거렸다. 그 순간 승우의 눈에 카페로 들어오는 은우의 모습이 보였다.
“어? 은우야! 여기야.”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승우를 발견한 은우는 웃었다. 최 이사가 훔친 원고 때문에 만나는 거였지만 전혀 화나 보이지 않았다. 승우가 이번 일에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선배 오랜만이에요.”
은우는 그에게 인사를 하며 승우 맞은편에 앉은 예리를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전 하늘 출판사의 편집자 정은우라고 합니다.”
가방에서 명함을 꺼낸 은우는 예리에게 건넸다. 자신의 롤 모델과도 같은 사람이 먼저 명함을 건네다니. 왠지 그녀에게 동등한 편집자로서 인정받는 느낌이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 명함이 없네요. 전 제국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신예리라고 합니다.”
“네. 반가워요.”
은우는 승우 옆에 있는 빈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이 자리에 모인 게 갑.을.썸의 원고 때문인 거죠?”
그녀의 질문에 승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그 원고 한태성 작가님의 작품이 맞는 거지?”
“네 맞아요.”
그 대답을 들은 순간 예전 최 이사가 작가에 대해 언급했던 말이 떠오른 예리였다.
‘분명 나한테는 무명이라는 신인 작가를 키운다고 하셨는데... 거짓말이었구나. 무명... 이름이 없다는 뜻이 애초에 가상의 인물이란 뜻이었구나.’
역시 최 이사가 원고를 훔쳤다는 예상이 맞았다. 예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은우에게 무릎을 꿇었다.
“예리야! 너 뭐 하는 거야?”
“어머! 뭐 하세요? 빨리 일어나세요.”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은우와 승우 두 사람 모두 매우 놀란 눈치였다.
“죄송하다고 사과드리고 싶어서요.”
예리는 진심을 담아 말하고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진심을 느낀 은우였다. 근데 뭐가 죄송하다는 거지?
“왜 그러세요? 그만 일어나세요.”
은우는 예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런 그녀를 보며 예리는 말을 이어갔다.
“그 원고 대표님이 저에게 주셨거든요. 세 권으로 나눠진 분량을 네 권으로 나누라고. 전 정말 몰랐어요. 알았다면 그 원고에 손대지 않았을 거예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야 그녀가 무릎을 꿇은 이유를 이해한 은우였다. 분명 그녀도 모르고 했었을 텐데. 진짜 나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그녀가 사과를 한단 말인가?
은우는 예리를 안아주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쪽도 모르고 한 일이잖아요.”
“대표님이 그러셨거든요. 실력 있는 편집자가 이미 작업한 원고라고. 누가 작업했는지 얘기해주지 않으셔서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설마 누군가가 열심히 쓰고 또 누군가가 열심히 수정한 글을 훔친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 했어요.”
“그만 사과하시고 이만 일어나세요. 그쪽이 잘못한 거 아니에요. 전적으로 최 이사님이 잘못하신 일이니.”
“그래도 사과하고 싶었어요.”
“진짜 사과는 최 이사님이 하셔야죠. 저보다도 저희 작가님한테요.”
은우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예리를 일으켜 세웠다. 눈물로 범벅이 된 예리의 얼굴을 보니 괜히 마음이 아픈 은우였다. 그렇기에 은우는 예리를 안아주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승우는 괜히 뻘쭘했다. 또한, 주변 사람들은 어찌나 쳐다보는지. 민망한 몫은 고스란히 승우의 것이었다.
“이제 상황 대충 알았으니 진정들 하고 자리에 앉자.”
그의 말에 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예리 씨. 우리 이만 자리에 앉아요.”
그녀의 말에 예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여전히 진정이 안 되는지 그녀의 눈에는 계속해서 눈물이 흘렀다. 그러자 은우는 그녀 옆에 앉아 그녀의 등을 천천히 두들겨 줬다. 그녀가 진정할 수 있도록.
“예리가 많이 미안했나 보네.”
승우 역시 울며 사과하는 예리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의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 창작물의 가치를 인정하는 그녀를 보며 뿌듯했다.
“근데 네가 무료 공개라는 카드로 먼저 선수 친 걸 보면 대표님이 원고를 훔쳤다는 걸 미리 알았다는 건데. 어떻게 안 거야?”
그의 질문에 은우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지원의 이야기를 들은 예리는 또다시 멘붕에 빠졌다. 자신에게 미행을 시켰던 이유가 이거였다니. 그동안 최 이사가 자신을 어떻게 자신을 이용했는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안 좋은 일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모든 일의 실체를 알게 되자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저희 대표님 나쁜 사람인 건 알았지만 정말 나쁜 사람이네요.”
예리의 말에 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게요. 최 이사님 처음에는 그러지 않으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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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크리스마스의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풋풋한 연인들, 무심하게 걷는듯하지만 발걸음을 맞춰 걷고 있는 오래된 연인들, 자신들의 젊은 시절을 추억하며 인생의 파트너와 함께 걷고 있는 부부들, 그리고 거리의 사람들을 구경하러 나온 노부부들까지 말이다. 그런 사람들 사이로 승우와 예리가 같이 걷고 있었다.
“선배. 오늘 고마웠어요.”
갑자기 고맙다는 말에 승우는 의아한 듯 물었다.
“고맙다니 뭐가?”
“선배 덕분에 제 돌파구를 만났거든요.”
“그 돌파구가 혹시 은우를 말하는 거야?”
“네. 맞아요. 여자지만 대표님과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거든요. 나도 저렇게 멋있는 여자가 되고 싶다고. 선배도 알잖아요. 전 대표님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하라는 대로 하는 꼭두각시 인형인 거.”
“그야... 네가 약점이 잡혀서 그런 거잖아.”
“맞아요. 약점...”
그녀는 말의 끝을 흐리며 거리에서 멈추었다. 그런 그녀를 따라 승우도 멈췄다. 그리고 그는 예리의 눈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가 은우처럼 되고 싶으면 그 약점을 먼저 해결해야 하는 거 아냐? 그래야 대표님에게서 자유로워질 테니.”
“그러게요. 그래서 말인데요... 만약 제가 선배한테 제 약점을 말하면 지금처럼 제 옆에 있어줄 거예요?”
아무래도 자신의 비밀을 말하려는 눈치였다. 그동안 승우는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당연하지. 솔직히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도 알고 있잖아.”
“그래요. 알아요. 저만 알고 있는 거 아니잖아요. 선배도 제 마음 아시잖아요. 안 그래요?”
승우에게는 그 말이 마치 지금 뭔가를 해야 할 것 만 같은 신호처럼 들렸다. 그렇기에 그는 예리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그러자 예상과 달리 예리는 한 발짝 뒷걸음칠 쳤다. 그러자 승우는 당황스러웠다. 방금 그 말은 뭐였단 말 인가?
“나 이 상황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선배 부탁이에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지금 나한테 해줄 말이 그게 다야?”
“저 선배 좋아해요. 하지만 지금 제 모습으로는 선배한테 다가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거예요. 제가 준비가 되면 선배한테 전부 얘기할게요. 약속해요.”
그녀의 말에 승우는 웃었다. 그리고 말없이 그녀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유치하지만 순수한 행동이었다. 그의 모습에 예리는 말없이 웃으며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그의 새끼손가락에 걸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없이 서로의 눈을 쳐다봤다.
‘선배 고마워요. 제 약점을 극복하려면 힘들겠지만 선배가 있어서 다행이네요.’
예리는 알고 있었다. 앞으로 자신의 돌파구를 만들려면 만만치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녀는 각오하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자신의 힘으로 돌파구를 찾을 거라고.
다음날이었다. 최 이사는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출근했다. 그가 대표실로 들어간 후, 약 5분 뒤 예리는 대표실의 문을 노크했다.
“응. 들어와.”
오늘은 들어오라는 소리도 평소와 달랐다. 보통 좋은 일이 있었던 게 아닌 듯했다. 예리는 어제 승우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며 용기 있게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인쇄소에서 연락이라도 온 건가?”
오늘따라 다정하게 말을 하는 최 이사였다.
“네. 연락 왔습니다.”
“그래? 뭐라고 연락 왔는데?”
“그게..”
예리가 입을 열려는 순간 최 이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잠시만. 나 먼저 얘기할게. 이번에 우리 새로 출판하기로 한 로맨스 소설 있잖아. 그거 드라마로 제작할 거 같다. 그 소설이 아주 복덩이야. 드라마로 제작된다면 책의 판권 수입과 함께 드라마의 후광효과로 책도 많이 팔릴 거 아냐. 아주 좋아. 그치?”
아무래도 최 이사는 갑.을.썸의 원고가 이미 모웹을 통해 공개된 걸 모르는듯했다. 예리의 짓이었다. 그녀는 인쇄소에 미리 전화하여 자신이 직접 대표님에게 말하겠다고 말했다. 최 이사의 성질을 싫어하는 인쇄소의 입장에서는 반가운 말이었다. 피곤한 일을 예리가 대신해주는 거였으니.
“그래서 기분이 좋아 보이셨군요. 저도 갑.을.썸에 대해서 할 얘기가 있습니다.”
“맞아. 갑.을.썸. 소설 이름이 특이한 건 기억하는데 아직 이름을 외우지 못했어. 어쨌든 인쇄소에서 뭐라고 연락이 왔을라나? 인쇄는 시작했대? 책이 빨리 발행되려면 부지런하게 인쇄를 해야 할 텐데.”
“네. 대표님의 지시대로 인쇄를 바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지된 상태입니다.”
“뭐 정지? 도대체 왜? 그 책 빨리 출판되어야 한다고!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드라마로 제작하지!!”
“이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리는 한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 pc를 건넸다. 화면 위로는 모웹에서 연재되고 있는 갑.을.썸이 보였다.
“이게 뭐야? 여기에 언제 올린 거야? 누구 허락받고 이걸 연재하는 거냐고!!”
“자세히 보시면 웹 소설 표지 밑에 하늘 출판사의 로고가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최 이사는 표지의 밑을 확인했다. 정말 하늘 출판사의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설마...”
“네. 하늘 출판사에서 소설을 무료로 공개했습니다. 어제 35까지 업로드되었고요. 오늘 아침에 36화부터 70화까지가 새롭게 업로드 되었습니다. 대표님이 저에게 처음 주셨던 원고의 삼분의 이입니다.”
태블릿 pc를 잡고 있는 최 이사의 손이 떨려왔다. 은우가 이런 방법을 선택할 줄은 몰랐다.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의 이익만을 먼저 생각하는 최 이사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방법이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희의 원고를 훔친 것도 모자라 무료로 공개하다니요. 그렇죠?”
“... 당연하지.”
“근데 더 큰 문제는 인쇄소입니다. 대표님이 말씀하신 대로 많은 양의 책을 최대한 빨리 끝내기 위해 부지런하게 작업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깐 인쇄소의 말은 그만큼 일을 열심히 했으니 빨리 돈을 달라는 거지?”
“네. 맞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최 이사의 표정이 매우 심각해졌다.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잘 풀리는 줄 알았건만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여버렸단 말인가?
“우선 나가.”
“네. 알겠습니다.”
예리는 최대한 공손하게 최 이사에게 인사를 한 후 대표실을 나갔다. 그녀는 닫히는 문 뒤로 최 이사의 짜증 섞인 외침이 들렸다. 그리고 문을 닫는 예리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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