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드라마 전쟁 (4)
70화. 드라마 전쟁 (4)
어느새 드라마 멜로디의 대본은 6화까지 탈고를 끝냈다. 지금 태성과 지수는 7화 대본을 집필하고 있었다.
“작가님. 내일 오디션인 거 잊지 않으셨죠?”
지수는 높이 기지개를 펴며 태성에게 물었다. 그러자 태성은 노트북 화면에 눈을 떼지 않고 타지기 위에 손은 떼지 않은 채 질문에 답했다.
“네. 압니다. 첫 오디션 심사라 기대 중입니다.”
그 순간, 태성이 쓰고 있던 장면이 끝났다. 그러자 노트북 화면에만 고정되었던 그의 시선이 마주 않은 지수에게 향했다. 그런 그를 보며 지수는 말을 이어갔다.
“그 맘 알죠. 저도 그랬으니깐요.”
“작가님의 첫 오디션은 어땠습니까?”
“우선 되게 신기했어요. ‘내 대본에 연기하고 싶은 배우들이 이렇게 많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작가로서 책임감이 들더라고요.”
지수의 말을 듣는 순간 태성은 온몸이 짜릿하며 전율이 느껴졌다. 누군가 자신이 쓴 대본에 감정을 넣어 연기를 하는 모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렇습니까? 아직 캐스팅이 끝난 게 아니지만 모든 배우들이 만족할만한 대본을 써야겠습니다.”
“모든 배우들이 만족할 대본을 쓰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세요? 이야기 구조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데 그들의 분량까지 신경 써야 하니. 요즘은 신인 배우들도 자신이 소속된 회사의 힘이 세면 아주 당돌해요. 먼저 와서 분량 늘려 달라고 하면 괜히 분량 더 주기 싫은 거 있죠. 작가들이 어련히 알아서 챙겨줄 텐데.”
아직은 지수의 말이 자신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태성이었다. 하지만 지수와 이런 얘기를 하면 할수록 내일 있을 오디션이 더욱 기대되었다. 과연 어떤 배우들을 만나게 될지 너무나도 기다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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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오디션이 시작하려면 20분이 남았지만 이미 대기실 안은 밝은 미래를 꿈꾸는 배우들로 넘쳐났다. 서로의 외모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경계하는 사람들 때문인지 아니면 오디션이라는 특정한 장소가 주는 압박감 때문인지 대기실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오디션을 코앞에 앞둔 배우들은 다들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감독과 작가들 앞에서 보여줄 연기의 대사를 조용히 중얼거리며 끊임없이 연습하는 사람도 있었고 남들의 시선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연기에 몰입하여 최종 연습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너무 긴장하여 몸을 덜덜 떠는 사람도 있었고 매우 편안한 자세로 평온한 음악을 듣는 사람도 있었다. 다들 모습은 달라도 배역을 따고 싶다는 마음은 동일했다.
그 순간, 대기실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그러자 각자의 방식으로 오디션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등장에 망연자실하는 사람도 있었고 대놓고 불쾌함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바로 유명 남자 아이돌 그룹 보잉의 멤버 청호였다. 보잉은 지난해 가요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았다. 거리에 지나가는 여학생들 붙잡고 요즘 어떤 가수를 좋아하냐고 물어본다면 열에 여섯은 보잉을 좋아한다 말할 정도였다. 그만큼 보잉의 인기는 수많은 아이돌 그룹 사이에서 당연 탑이었다. 심지어 청호는 인기 많은 보잉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에이스 멤버였다.
연기만 보고 달려온 사람들에게 옆 동네에서 노래를 부르던 그의 등장이 달갑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내가 장담한다. 쟤가 무조건 배역하나 딴다.”
“이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냐?”
“노래도 못하는 게 노래 연습이나 더 하지. 여긴 왜 왔데?”
“얼굴 완전 성형 빨이네. 코에서 분필 떨어지겠다.”
“코만 떨어지면 다행이지. 눈도 떨어지게 생겼는데?”
다들 들으라는 듯이 그에 대해 얘기했다. 하지만 청호는 이 정도 반응은 예상했다는 듯 매우 태연해 보였다. 오히려 그는 대기실 구석에서 자신의 매니저와 자리를 잡고 차분하게 오디션을 준비하고 있었다.
“딕션이 엄청 좋으시네요.”
누군가 청호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준영이었다. 다들 자기를 싫어할 줄 알았는데 칭찬을 건넨 그를 보며 청호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감사합니다.”
“가만 보면 사람들이 남한테 관심이 참 많아요.”
“그러게요.”
“그나저나 연기 연습 많이 하셨나 봐요.”
“그냥. 틈틈이 준비했습니다.”
“그렇구나. 대단하시네요. 바쁘실 텐데.”
“인기 빨로 배우 한다는 소리는 듣기 싫어서요.”
“그 정도 각오시면 연기 준비는 확실히 하셨겠네요. 행운을 빌어요.”
자신에게 행운을 빌어주는 그를 보며 청호는 기분이 묘했다. 이상하게 진 기분도 들었다. 얼마나 연기에 자신 있으면 자기를 응원해줄까라는 생각이 들었으니.
“감사합니다. 저도 행운을 빌게요.”
잠시 후, 대기실에 조감독이 찾아와 오디션의 시작을 알렸다. 자신의 번호가 불리자 그 번호의 응시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감독과 작가들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53번이요..”
53번. 준영의 대기 번호였다. 준영 자리에서 일어나자 옆에 있던 청호가 그를 보며 웃어줬다. 그의 미소에 준영도 미소를 지었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진심으로 서로를 응원했다.
준영은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더니 감독과 작가들이 기다리고 있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현 피디와 태성 그리고 지수는 긴 테이블의 한쪽 면에 함께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옆에는 카메라로 오디션 응시자들의 연기를 촬영하는 조감독이 있었다.
“거기 의자에 앉아주세요.”
현 피디는 자신들의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준영은 ‘네’라는 말고 함께 의자에 앉았다. 그를 보며 현 피디가 말을 이어갔다.
“카메라 보고 자기소개해주시죠.”
“네. 저는 스물아홉 살 김준영이라고 합니다. 비록, 늦은 나이에 연기를 시작했지만 진심을 다해 연기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준비한 거 한번 볼까요?”
“네.”
준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준비한 연기를 보여줬다. 그가 준비한 상황은 학창시절 잘 나갔지만 지금은 백수인 남자가 우연히 거리에서 대기업에 취직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는 장면이었다. 지질하면서도 친구에게 자신이 취업하지 못한 핑계를 대는 그의 연기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잠시 후, 그의 연기가 끝나자 지수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우선 연기는 잘 봤습니다. 비주얼도 훌륭하시고 연기도 안정적이네요. 근데 연기를 늦게 시작하셨네요. 그 이유가 뭐죠?”
“다른 분들에 비해 늦게 꿈이라는 걸 가졌으니깐요.”
“그렇군요. 아직 레벨도 낮으시네요. 어머. 여기 보니 아직 대학생이시네요?”
지수는 준영이의 오디션 신청서에 적힌 내용을 가리켰다. 현재 29살인 준영이는 대학교 2학년의 연기과 학생이었다.
“네. 맞습니다. 늦은 만큼 더 열심히 하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그 말은 캐스팅되면 그때 하셔도 늦지 않겠죠?”
“아... 네.”
그를 유심히 관찰하던 태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 준영 씨의 연기를 봐서 매우 좋았습니다. 이상하게 준영 씨를 계속 보면 멜로디에 나오는 한 캐릭터가 떠오르네요. 재가 찾던 배우를 만난 거 같아 기쁩니다.”
마치 지금 당장 너를 캐스팅하고 싶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의 말에 현 피디와 지수 그리고 준영 세 사람이 모두 놀랐다. 현 피디는 태성과 준영이를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한 작가님이 준영 씨의 연기를 엄청 마음에 들었나 보네. 하지만 아직 오디션이 끝난 게 아니니 작가님은 그런 말은 아껴주시고. 준영 씨도 그냥 칭찬으로 들어줘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준영은 태성을 보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연기를 보며 솔직한 마음을 얘기한다는 게 그만. 제가 너무 무책임한 말을 한 모양입니다. 부디 준영 씨를 배우로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뒤에 많이 남았으니. 슬슬 여기서 끝낼까요?”
지수의 말에 현 피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게 좋겠군. 준영 씨 수고했어요.”
준영은 현 피디, 태성 그리고 지수에게 인사를 하고 오디션 장을 나갔다. 그러자 현 피디는 태성을 보며 얘기했다.
“한 작가. 저 친구가 엄청 마음에 들었나 봐?”
“네. 저 친구가 연기하는 윤호의 모습이 자꾸 상상됐습니다.”
“확실히 잘 어울리긴 하겠군. 하지만 아직 오디션이 끝난 게 아니니 그 생각은 잠시 미뤄두자고.”
“죄송합니다.”
“아니야 오늘이 처음이니 그럴 수도 있지. 배우들 괜히 기대시켰다가 실망감은 주지 말자는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네. 압니다.”
오디션은 계속 진행되었다. 어느새 번호 70번이 호명됐다. 청호였다. 그가 오디션 장으로 들어가자 현 피디의 얼굴에 함박 미소가 지어졌다.
“드디어 청호 씨 차례네. 내가 청호 씨를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알아?”
“하하. 감사합니다. 감독님.”
현 피디가 방금 들어온 응시자를 알아보자 태성은 의아한 듯 지수에게 조용히 물었다.
“방금 들어온 사람과 감독님이 아는 사이입니까?”
“어머. 작가님 청호 씨가 누군지 모르세요? 아이돌이잖아요.”
태성은 청호의 번호인 숫자 70이 적혀 있는 참가 서류를 읽었다.
“여기 적혀있군요.”
“그럼 우리 청호 씨 연기 한번 볼까?”
현 피디는 싱글벙글 웃으며 얘기했다. 그의 미소를 보며 청호는 자신 있게 자신이 준비한 연기를 보여줬다. 그가 준비한 상황은 로미오가 줄리엣에게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그의 연기가 끝나자 현 피디는 손뼉을 쳤다.
“역시 청호 씨야. 남자가 이렇게 멋있어도 되는 거야? 이러니 여자들이 좋아하지.”
“감사합니다.”
청호는 자신의 연기에 만족스러웠는지 미소를 지었다. 이런 훈훈한 상황에 태성은 혼란스러웠다.
‘방금 그 연기가 정말 좋은 연기인 거야..? 내가 보는 눈이 없는 건가?’
물론 안정적인 연기였다. 하지만 여운이 남는 연기는 결코 아니었다. 솔직히 얼굴이 다한 연기였지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의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좋은 연기 잘 봤습니다.”
지수는 그렇게 짧게 얘기했다. 이번엔 태성의 차례였다. 청호는 자신 있는 눈으로 태성을 바라봤다.
“잘 생긴 남자가 고백하는 장면이었네요.”
“네. 맞습니다.”
“정말 눈에 보이는 게 다였던 연기였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태성의 말에 순간 청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눈에 보이는 게 다였던 연기라니?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그 말... 칭찬입니까?”
“그건 직접 생각해보시죠.”
태성과 청호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감지되자 현 피디가 입을 열었다.
“당연히 칭찬이지. 누가 봐도 고백하는 연기를 잘 했다는 뜻 아니겠어? 원래 작가들이 돌려 말하잖아.”
“아. 그런가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청호 씨. 수고 많았어. 다음에 또 보자고.”
“네. 수고하셨습니다.”
청호는 현 피디와 지수 그리고 태성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태성은 현 피디를 보며 물었다.
“감독님. 정말 방금 저 연기가 좋으셨습니까?”
“안정적이었잖아. 가수가 저 정도면 잘하는 거지. 안 그래? 내 생각엔 말이야 청호를 윤호 역으로 캐스팅하면 딱일 거 같은데. 잘생긴 얼굴에 약간 반항 끼도 있고. 어떤가?”
맙소사. 분명 30분 전에 현 피디는 준영이의 연기가 마음에 든 태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직 배우들이 많이 남았으니 벌써부터 마음을 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지금 보니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윤효 역으로 점찍어둔 친구가 있었던 거였다.
“감독님. 저 친구를 캐스팅하고 싶으신 거군요?”
“당연하지. 시청률과 화제성. 그리고 해외 시장을 생각하면 아이돌은 필수라고.”
“그럼 아까 김준영이라는 배우는요?”
“김준영? 그 연기 늦게 시작했다는 친구?”
“네. 객관적으로 그 친구 연기가 훨씬 좋지 않았습니까? 분명 그 친구의 윤호가 방금 들어온 친구의 윤호 보다 훨씬 좋을 겁니다.”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배우는 준영이보다는 청호야. 서지수 작가한테도 한번 물어보게. 아마 나랑 같은 생각일걸?”
태성은 고개를 돌려 지수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그건 감독님 말이 맞아요. 연기도 나쁘지 않고 청호 씨를 캐스팅하면 우리가 얻게 될 이득이 많으니깐요.”
“하지만...”
“네. 작가님이 무슨 말씀하실지 저도 알아요. 하지만 프로 작가라면 좋은 대본 좋은 연기도 좋지만 어떻게 하면 자신의 드라마가 치열한 드라마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도 고민해야 해요. 지금 저희에게 필요한 배우는 청호 씨라고요. 오디션은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찾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배우를 찾는 자리예요.”
“애초에 청호라는 가수... 아니 배우를 캐스팅할 생각이었다면 이 오디션은 의미가 없는 거 아닙니까?”
“단순히 아이돌이라서 캐스팅된 게 아니라 정정당당하게 오디션으로 캐스팅했다고 말할 수 있는 명분은 생기겠죠. 그리고 아직 다른 역할들이 많이 남았잖아요.”
“그럼 아까 김준영이라는 배우는요?”
“아무리 연기가 좋았어도 그에게 어울리는 배역이 윤호 뿐이라면 이번 오디션에서는 탈락인 거죠. 원래 전쟁을 하면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안타깝지만 그 배우가 그런 거죠.”
연기를 아무리 잘해도, 배역에 아무리 잘 어울려도, 드라마 전쟁에서 희생을 당해야 한다니. 태성은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의 힘으로는 준영이라는 배우를 건져줄 힘이 없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말이다. 드라마 작가로서 그는 신인 작가였으니.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 작가의말
오늘 등장한 김준영이라는 친구를 잊지 말고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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