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전쟁의 서막
64화. 전쟁의 서막
혁준은 자신을 보고 있는 태성과 지수를 번갈아 보며 말을 이어갔다.
“두 분이 생각하고 있는 스토리의 줄거리를 각자 써보는 겁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읽어보는 거죠.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직접 보면 좀 다르지 않을까요?”
제법 그럴듯한 말이었다. 우선 태성은 혁준의 제안을 긍정적이게 생각했다. 각자가 생각하는 줄거리를 정리해서 온다면 서로가 그리고 있는 이야기의 큰 그림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깐.
“그거 좋은 생각인데?”
태성은 맞은편에 앉은 지수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서지수 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음.. 글쎄요..”
사실, 지수도 혁준의 생각에 동의했다. 태성에게 드라마는 소설과 달리 이야기를 어떻게 구상해야 하는지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직접 눈으로 보여 주는 게 좀 더 효과적인 거 같았으니. 하지만 괜히 혁준의 말이었기에 한 번에 동의하고 싶지가 않았다.
“뭐... 나쁘지 않은 거 같기도 하네요.”
한편, 그녀의 말에 기쁜 건 혁준이었다. 어쨌든 자신이 한 말에 대답을 해준 거니. 지금 그는 커피 주문 외에 지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그럼 그렇게 할까요?”
태성의 제안에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저만 줄거리를 적으면 되는 거죠? 어차피 작가님은 소설의 이야기를 그대로 하시고 싶으신 거잖아요.”
“그건 아닙니다. 저도 나름 드라마와 소설의 차이를 생각하며 약간의 차이를 뒀습니다.”
“그래요? 그럼 지금 각자 내용을 정리해볼까요?”
“좋습니다.”
그렇게 태성과 지수는 각자의 노트북으로 자신들이 구상하고 있는 드라마 멜로디의 전체 줄거리를 정리했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같았지만 그들의 관계와 비중에 약간의 변화를 주자 흘러가는 이야기는 많이 달라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리를 끝낸 두 사람은 상대방이 쓴 줄거리를 읽었다. 어찌 되었건 두 사람 모두 글 좀 써봤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단지 줄거리를 읽는 거였지만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즐거웠다.
‘확실히 내가 쓴 것보다 분위기가 밝네. 활기차 보이기도하고.’
태성은 지수의 줄거리를 보며 감탄했다. 확실히 이런 스타일로 작업하면 나이가 어린 친구들과 여자 시청자들이 좋아할 거 같았다. 특히, 남녀 사이의 미묘한 감정 변화와 여심을 저격하는 남자 캐릭터들이 인상 깊었다.
반대로, 지수는 태성의 줄거리를 보며 그의 필력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캐릭터들의 감정도 다양했고 이야기에는 적당한 무게감과 진중함이 있었다. 그리고 달라진 게 있다면 복잡했던 주인공의 감정선이 약간은 쉬워졌다는 점이었다.
‘확실히 소설을 쓰셔서 그런가 줄거리를 읽는 것만으로도 금방 몰입되네. 에피소드들도 다양하고 재밌어.’
서로가 작성한 줄거리를 읽은 태성과 지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함께 작업하게 된다면 정말 재밌는 이야기가 나올 거 같다는 기대감이었다.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니 로맨스적인 요소가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분량을 조금만 줄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조심스럽게 듭니다.”
태성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지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전 좋아요. 한태성 작가님의 줄거리를 보니 조연들의 이야기들이 너무 재밌네요. 로맨스를 조금 줄이고 원래대로 남자 주인공과 조연들의 이야기가 더해지면 드라마의 즐거움이 풍성해질 거 같아요.”
“좋습니다. 거기에 혜정이라는 캐릭터의 분량을 늘린다면 여자 주인공으로서 역할도 확실해질 거 같습니다.”
“저랑 같은 생각을 하셨네요.”
그렇게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던 두 사람의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한 듯 보였다. 카페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끊임없이 대화를 하며 드라마 멜로디의 줄거리를 함께 만들어갔다. 지금 두 사람은 서로의 장점을 인정하며 오직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힘을 합치고 있었다.
작품에 심취한 두 사람은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혁준은 멀리서 집중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그의 눈에는 두 사람이 마치 고대 아테네 학당에 모여 토론을 하는 천재 철학자들처럼 보였다. 한 마디로, 자신은 그곳에 범접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노력한다면... 언젠간 저런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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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과 지수의 새로운 시놉시스는 마치 두 사람이 그렸던 이야기의 큰 그림이 애초에 하나의 퍼즐이었던 것처럼 서로 조화를 이루며 맞춰졌다.
“이 정도면 멜로디가 새로 태어난 거 같습니다.”
태성은 결과물에 매우 만족스러웠다. 이렇게만 대본이 나오게 된다면 너무나도 재밌는 드라마가 탄생할 거 같았다.
“그럼 제가 섭섭하죠. 제가 원작을 유지하려고 얼마나 많이 양보했었는데.”
지수의 말에 태성은 웃었다.
“고맙습니다. 서지수 작가님 덕분에 멜로디의 이야기가 드라마에 어울리게 변한 거 같습니다.”
“저도 감사해요. 한태성 작가님 덕분에 제가 지금까지 썼던 대본들 중에 가장 훌륭한 대본이 나온 거 같거든요.”
“시놉시스도 나왔으니 이제 본격적인 시작인 거죠?”
“네. 맞아요. 이제 대본을 작업해야 하니. 우선, 완성된 시놉시스는 은하 언니한테 보낼게요. 이 드라마가 계획대로 여름에 방송되려면 제작사도 바쁘게 움직여야 할 테니까요.”
이제 제작사도 본격적으로 일을 할 차례였다. 우선, 방송국과 드라마의 방영 날짜를 최종적으로 조율해야했다. 거기에 드라마의 제작비를 측정하고 제작비를 마련해야했다. 그와 동시에, 캐스팅 작업과 촬영 로케이션 헌팅도 진행해야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드라마의 OST는 물론이고 클래식이 주재인 드라마인 만큼 클래식 악기 연주자들도 찾아야했다.
다행히, 드림 픽처스의 대표인 은하는 능력자였다. 그녀는 능숙하게 많은 일들을 신속하게 처리했다. 덕분에 태성과 지수는 온전히 대본에만 신경 쓸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드라마는 7월 중순에 편성되었다. 앞으로 대략 100일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하나의 드라마를 만들기까지 결코 긴 시간은 아니었다.
태성과 지수는 로맨스적인 부분과 아닌 부분을 나누어 분담해서 대본을 작업했다. 물론 지수가 로맨스를 담당했고 그 외적인 부분을 태성이 담당했다.
홀로 드라마의 대본을 작업한다는 건 혼자서 편당 약 60분의 분량을 채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공동 작업하게 된다면 약 30분의 분량만 채우면 됐다. 그렇다고 작업할 분량이 줄어 시간이 남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드라마 한편의 분량을 작업할 시간과 정성을 온전히 반쪽 대본에 신경 써 그 반쪽의 퀄리티를 높여야했다. 거기에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하자 각자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채워 줄 수 있었다. 그렇게 대본은 과거 지수가 홀로 작업했을 때보다 월등히 좋아졌다.
대본이 훌륭했기에 지수는 이번 드라마의 성공에 자신 있었다. 그 어느 드라마와 편성에서 맞붙어도 대중성과 작품성 두 방면에서 모두 이길 수 있을 거 같았다.
“언니. 주인공들은 당연 톱스타로 할 거지?”
지금 지수는 드림 픽처스의 대표실에서 은하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수의 질문에 은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누구 작품인데 당연히 그래야지. 그거 알아? 지금 벌써 우리 대본 좋다고 소문난 거?”
“하긴. 대본이 훌륭하지.”
“그래. 내가 뭐랬어. 넌 멜로디를 원작으로 대본을 써야 한다고 내가 말했잖아.”
“한태성 작가님이랑 공동으로 작업하겠다고 말한 건 나였어.”
두 사람은 서로 자신들이 잘했다며 장난스럽게 얘기했다.
“근데. 언니. 우리 드라마 예산이 얼마 정도야?”
“지금 예상하고 있는 건 대략 60억 정도야.”
“16부작에 60억이면 편당 3억에서 4억 사이네.”
“그치. 평균 보나 약간 높은 금액이야. 우리 서지수 작가의 신작인데 내가 신경 좀 썼지. 왜? 섭섭한 거야?”
“아냐. 아직 우리랑 붙게 될 작가가 누군지는 모르지?”
“응. 우리가 먼저 홍보하고 선수쳤어. 비록 저번 드라마가 망했지만 그래도 너의 신작이라고 하니깐 아마 다들 눈치 보고 있을걸?”
은하의 말에 지수는 웃었다.
“과연 그럴까? 아마 많은 작가들이 내 대본이 별로일 거라고 예상할걸? 대본이 좋다는 소문도 전부 우리가 퍼트린 거짓이라고 생각할 거야.”
“왜 그렇게 비관적이야. 만약 그렇다면 진작에 붙어 보겠다고 나서는 작가들이 있겠지. 지금 다들 우리 거랑 안 붙으려고 눈치 본다니깐.”
“정말?”
“그래. 이번에야말로 작가로서 너의 능력을 제대로 보여줄 기회야. 지난번 치욕은 싹 지워버릴 수 있다고. 이번엔 꼭 작가로 인정받아 너가 그렇게 들어가고 싶어하는 작가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을 거야.”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순간, 지수는 작가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이웃으로 사는 다른 작가들과 교류하며 살아가는 생활은 정말 꿈과도 같았다.
“그렇게 되려면 대본을 열심히 써야겠지?”
“그래. 알아. 여기서 이러고 떠들 시간에 대본이나 작업하라고 잔소리하려고 했지?”
“그래. 괜히 한태성 작가님 덕분에 대본이 잘 나왔다는 소리 듣지 말고.”
“알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일어나려고 했어.”
지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어갔다.
“그나저나 우리 거랑 붙게 될 드라마 편성되면 바로 알려줘.”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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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본 아주 재미있습니다. 제법 아름다운 스토리예요.”
박 회장은 손에든 대본이 매우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지금 그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가장 화려한 소파에 앉아 대본을 읽고 있었다. 그의 소파는 마치 바로크 시대의 유럽 왕족들이 사용했을 거 같은 소파였다. 붉은색과 금색으로 꾸며져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러웠다. 거기에 레이스 장식까지 달려있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박 회장의 취향을 정확히 저격했다.
“회장님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박 회장의 맞은편에 앉은 여 대표가 씩 웃었다. 40대 중반의 남성인 그는 영화사 파티오의 대표였다.
“아주 좋아요. 이 아름다운 드라마를 늦어도 여름에는 보고 싶은데. 물론 가능하겠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회장님. 이 드라마는 7월쯤에 방송될 예정입니다.”
“벌써 편성을 받은 겁니까? 아주 좋아요. 역시 여 대표는 능력이 있어요. 능력이 있는 사람은 거기에 합당한 아름다운 대우를 받아야죠. 20부작 드라마이니 200억이면 충분하겠죠?”
200억이라는 소리에 여 대표는 절로 미소가 번졌다.
“당연하죠. 200억 이상의 가치가 되는 드라마를 만들겠습니다.”
“아주 좋아요. 그럼 이 드라마에 200억을 투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여 대표는 자신의 오른쪽 검지에 끼고 있는 금색 반지에 입술을 갖다 댔다. 반지에는 알파벳 P가 새겨져 있었다. 그의 충성스러운 모습에 박 회장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들고 있는 대본을 쳐다봤다.
지금 그의 손에 있는 대본의 제목은 아레스였다. 아레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쟁과 파괴의 신이었다. 이 대본이 바로 지난번 그가 지시했던 블록버스터 액션 첩보 드라마였다.
“전 개인적으로 이 드라마의 액션 스케일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우면서도 드라마의 제목과 어울려야 할 겁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여 대표는 박 회장에게 인사하고 그의 방을 나갔다. 그러자 구석에서 가만히 서있던 한 비서가 박 회장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회장님. 재밌는 소식이 있습니다.”
“재밌는 소식은 언제나 좋은 소식이죠. 그게 뭡니까?”
“혹시 소설 갑.을.썸을 기억하십니까?”
“당연히 기억하죠. 참으로 아름다운 소설이었는데. 결국 놓치지 않았습니까?”
“네. 그 소설의 작가가 이번에 드라마 작가로 데뷔한다고 합니다.”
“오호. 그래요? 근데 그게 재밌는 소식입니까?”
“아닙니다. 진짜 재밌는 소식은 그 작가의 드라마와 이번 회장님의 드라마가 같은 시간에 편성될 거 같습니다.”
“그럼 그 작가님의 드라마와 제 드라마가 맞붙는다는 거군요.”
“네. 그렇습니다.”
한 비서의 말에 박 회장의 얼굴에 깊은 미소가 번졌다. 지금 그는 설레는 마음에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아주 기대되는 대결이군요. 궁금합니다. 과연 누구의 드라마가 더 아름다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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