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드라마 전쟁 (3)
69화. 드라마 전쟁 (3)
태성은 현 피디와 지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두 사람은 이미 결정이 난 일로 너무 깊게 걱정하고 있었다. 걱정한다고 마법처럼 편성이 다시 바뀌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찌 되었건 이미 끝난 일 아닙니까?”
태성의 말에 지수는 속상한 듯 대답했다.
“그러게요. 이미 시청률 싸움은 끝났네요. 장두성에 2주 앞선 편성까지. 이번에 파티오한테 제대로 당했어요.”
지수는 태성의 말을 잘 못 이해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태성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제 말은 그 뜻이 아닙니다. 남자 주인공 캐스팅과 편성은 이미 끝난 일입니다. 지금 저희에게 유익한 걱정은 시청률에 대한 고민보다는 어떻게 더 좋은 대본을 만들지 그리고 어떻게 더 좋은 연출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일 듯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쪽에선 대본을 쓰고 연출을 고민하고 있을 테니깐요. 안 그렇습니까?”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뒤숭숭한 마음을 어찌 그리 쉽게 정리할 수 있겠는가?
“저도 머리로는 알죠. 하지만 그게 쉽나요.”
지수의 말에 현 피디도 동의했다.
“그건 서지수 작가의 말이 맞아. 힘 빠지는 일 인건 사실이니깐. 그래도 멘탈이 튼튼한 한태성 작가가 있으니 다행이네. 그래. 기왕 하는 걱정 좀 더 유익한 걸로 하자고.”
현 피디는 감독으로서 방금처럼 자신이 낙담하고 있는 모습이 결코 팀에 좋은 영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감정 조절이 어려웠다. 만약, 한태성이 옆에 없었다면 지수와 함께 전의를 잃었을 수도 있었다. 그는 어두운 표정의 지수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서지수 작가는 대본만 신경 써. 나머지는 내가 걱정할게. 상대방의 무기가 물량이랑 톱스타라면 우리의 무기는 대본이니깐.”
대본이 무기라는 말에 지수는 기분이 약간은 좋아진 듯 작은 미소를 지었다.
“네. 노력해볼게요.”
노력해보겠다고 말은 하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현 피디와 미팅을 끝내고, 태성과 지수는 방송국을 나왔다. 포근한 봄의 햇살이 두 사람을 기분 좋게 안아주었다.
“날씨도 좋은데 잠시 앉았다 가는 게 어떻습니까?”
“가만 보면 한태성 작가님은 너무 여유롭다니깐요.”
“잠시라도 기분 좋은 햇살과 함께 여유를 즐기다 보면 오늘의 날씨와 같이 기분 좋은 영감이 떠오를 겁니다. 억지로 악쓰며 쓰는 글보다는 훨씬 좋겠죠.”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지금 마음으로 대본을 집필했다가는 치정으로 치닫는 막장을 쓸 거 같았으니.
“그거 아세요? 작가님이랑 얘기하면 항상 묘하게 설득되는 거.”
지수는 눈앞에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항상 툴툴 거리지만 자신의 말을 잘 듣는 그녀의 모습에 태성은 미소가 지어졌다. 남자가 여자를 이성적으로 보며 짓는 그런 미소가 아니었다. 지금 태성이 짓는 미소는 인생의 선배가 좋게 변하는 후배의 모습을 보며 짓는 뿌듯한 미소였다.
“가만히 서서 뭐하세요? 작가님이 먼저 잠시 앉았다 가자고 했잖아요. 빨리 와서 앉으세요.”
“네. 알겠습니다.”
태성은 자신을 부르는 지수의 옆에 앉았다. 지금 두 사람이 앉은 벤치는 방송국 앞에 위치한 정원 앞에 있었다. 이 넓은 정원에는 예술적으로 조각된 조각상들도 세워져 있었다. 또한, 정원 가운데는 하늘 높이 올라가는 분수가 위치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은 하나의 조화를 이루며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곳을 지나다니는 방송국 직원들은 언제나 바빠 보였다. 어디론가 급하게 뛰어가는 사람들. 여기저기서 까여 지금 피고 있는 담배로 자신을 위로하는 사람들. 무거운 방송 장비를 낑낑 들고 다니는 사람들. 전부,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처럼 자신들의 삶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을 보며 지수가 대화를 이어갔다.
“방송국에 올 때마다 느끼는 건데요. 이곳은 항상 바쁜 거 같아요. 저렇게 살다가는 다들 금방 지치겠죠?”
“아마 그러겠죠. 인간의 힘은 한계가 있어 휴식이 필요하니. 그거 아십니까? 서지수 작가님도 저들처럼 보이는 거.”
“알겠어요 작가님 말대로 잠시 여유를 가지며 글 쓸게요. 됐죠? 가만 보면 작가님이 제 엄마보다 잔소리가 심한 거 같아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말을 좀 줄여야겠습니다. 이상하게 서지수 작가님을 보면 더 잘 됐으면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됐어요. 줄이실 필요 없어요. 듣고 보면 항상 옳은 말만 하시니. 작가님을 보면 할아버지가 제게 보내준 사람 같아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전 항상 할아버지와 같은 작가가 되고 싶었거든요.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작가님이랑 함께 있으면 제가 상상했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제가 닮아 가는 거 같아요.”
지수의 할아버지가 작가였다니. 태성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지수 씨 할아버님이 작가셨습니까?”
“사실 확실하지는 않아요. 할아버지의 노트에 쓰인 이야기를 보며 그렇게 짐작만 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할아버님이 지금의 지수 씨를 본다면 무척이나 뿌듯해하실 겁니다.”
태성의 말에 지수는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어쩌면 화내실 지도 몰라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그게 제가...”
지수는 말끝을 흐리며 얘기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태성은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야기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그럼 이제 가볼까요? 빨리 가서 대본 써야죠.”
“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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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과 지수는 최선을 다해 대본을 집필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만든 캐릭터를 상상하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대입했다.
비록, 멜로디의 대진 운이 좋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최선을 다했다.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그거 뿐이었으니.
“작가님. 구성이 너무 훌륭한데요. 근데 이거 너무 복잡하지 않을까요?”
지수는 조심스럽게 태성이 쓴 대본을 보며 얘기했다. 태성은 자신의 대본에 뿌듯했는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완성도 높은 대본을 쓰기 위해서 플롯을 약간 꼬았습니다.”
“네. 대본의 완성도는 상당히 높아요. 하지만 이건 너무 높은 거 같아요. 지금 저희가 쓰는 건 드라마 대본이지 영화 시나리오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드라마 대본이니 좀 더 간단하게 쓰자는 겁니까?”
“네. 완성도도 좋지만 시청자를 배려해야 하니깐요.”
“비록 구성은 복잡하지만 이해하기 쉽게 풀었습니다. 전 충분히 시청자를 배려하며 썼습니다.”
“네. 맞아요. 정말 잘 쓰셨어요. 그래도 이번에는 너무 심한 거 같아요.”
태성은 지수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 그의 귀에는 너무 심하게 잘 써서 문제라는 것처럼 들렸다.
“서지수 작가님. 미안하지만 지금 작가님이 하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작가님이 드라마를 처음 쓰셔서 그런 거 같아요. 저랑 잠시 어디 좀 가시겠어요?”
지수는 태성을 한 아파트의 단지 안으로 데려갔다. 태성은 지수가 왜 자신을 이곳에 데리고 왔는지 혼란스러웠다.
“이곳에는 왜 온 겁니까?”
“작가님이 간과하고 있는 드라마의 큰 시청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요.”
“그게 누구입니까?”
“보시면 아세요.”
지수는 태성을 데리고 아파트 단지의 중앙으로 갔다. 그곳에는 한옥으로 만들어진 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은 주변에 둘러싼 현대식 아파트와 묘하게 어울리고 있었다.
“이곳이 어디입니까?”
“제가 가끔 와서 쉬는 곳 이예요. 이곳에서 봉사도 하고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죠. 이 안에 들어가면 드라마 전문가들이 가득하거든요.”
“그럼 학교인 겁니까?”
“아니요. 여긴 노인정이에요.”
자신을 데리고 온 곳이 노인정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곳이었다. 도대체 이곳에 자신을 왜 데리고 왔단 말인가? 혼란스러운 그를 보며 지수가 말을 이어갔다.
“언제까지 그렇게 서 계시기만 할 거예요. 따라오세요.”
태성은 지수를 따라 한옥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스무 명쯤의 노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옹기종기 모여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었다. 지금 그들이 시청하고 있는 건 드라마였다.
“거봐. 내가 말했잖아. 둘이 자매라니깐.”
“나도 알고 있었거든. 척 보면 척 이지.”
“어머. 둘은 알고 있었어? 나는 몰랐네.”
“좀 조용히 해. 뭐라고 하는지 안 들리잖아!”
드라마에 대한 얘기를 나누던 노인분들 중 자주 색의 조끼를 입은 백발의 할머니가 지수를 발견했다.
“아이고! 작가님 오랜만에 왔네. 어서 와.”
“네. 할머니. 그동안 잘 계셨죠?”
“그럼. 새로운 드라마 쓴다더니. 그건 잘 되고?”
“네.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이쪽은 이번에 저랑 같이 집필하시는 작가님이세요.”
지수는 할머니에게 태성을 소개했다. 그러자 태성은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했다. 예의 바른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잘 왔어. 어서 와 앉아.”
할머니는 태성과 지수를 빈 소파로 안내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노인분들과 함께 드라마를 시청했다.
“제가 간과하고 있다는 시청자가 노인이었습니까?”
“네. 맞아요. 그 누구보다도 드라마를 사랑하시는 분들이죠. 이제 그만 조용히 하고 드라마 봅시다. 더 이상 얘기했다간 우리도 혼날 테니.”
지수는 옆에 있는 쿠션을 안으며 편안한 자세로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드라마를 시청했다.
한편, 태성은 드라마를 시청하고 계시는 노인분들을 관찰했다. 어떤 할머니는 한 손에 작은 칼을 들고 산처럼 쌓여있는 마늘들을 능숙하게 까고 있었다. 또, 어떤 할머니는 양손에 실뜨기 바늘을 들고 털 모자를 만들고 있었다. 어떤 분들은 화투를 치면서, 또 어떤 분들은 신문을 읽으며 드라마를 시청했다. 물론, 텔레비전의 화면에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심취하신 분들도 계셨다. 그렇게 각자 다른 모습으로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태성은 지수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작가님. 구성이 너무 훌륭한데요. 근데 이거 너무 복잡하지 않을까요?
이제야 태성은 지수가 자신에게 했던 말들의 의미를 깨달았다. 영화란 영화를 보고 싶은 관객이 영화관을 찾아와 표를 구매한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자리에 앉아 온전히 영화에 집중한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렇지 않았다.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편하게 시청하는 게 드라마였다. 때로는 자신의 일을 하면서 볼 수도 있고 때로는 소파에 앉아 온전히 집중하면서 볼 수도 있었다.
또한, 드라마의 시청자는 영화보다 다양했다. 집에 텔레비전만 있다면 누구든지 볼 수 있었으니. 어린아이부터 나이가 많은 노인들까지 전부 시청자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적당한 연령층을 정해 그들을 타깃으로 삼는 건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연령층을 버릴 수는 없었다.
태성은 드라마에 대한 자신의 이해도가 낮았음을 깨달았다.
“이럴 때 보면 서지수 작가님이 확실히 드라마 작가는 맞나 봅니다.”
“그걸 이제야 아셨어요? 말 그만 거세요. 저 드라마 볼 거니깐. 이제 곧 절정이거든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태성은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는 이 자리에 동참했다. 객관적으로 드라마의 내용은 별로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시청하고 있는 이 드라마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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