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보이지 않는 관계의 끈 (2)
80화. 보이지 않는 관계의 끈 (2)
노트 밑에는 분명 ‘한태성’이라고 적혀있었다. 다시 봐도 노트에 적힌 이름은 ‘한태성’이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여전히 노트에는 ‘한태성’이라 적혀있었다.
“나랑 동명이인의 어떤 작가님 노트인 건가?”
하지만 사과나무는 서지수 작가님의 드라마 데뷔작이지 않는가?
“그럼 설마... 표절?”
띠리리링. 그 순간, 태성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김나리 기자에게서 온 전화였다. 태성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기자님!”
[작가님. 저예요.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통화 괜찮습니다. 다른 흔적을 더 찾으신 겁니까?”
[작가님. 저 칭찬해주시겠어요? 제가 찾은 거 같거든요.]
찾다니! 설마..!?
“한유리 씨를 찾은 겁니까?”
[네. 드디어 찾았어요.]
‘찾았어요’라는 이 네 글자의 말이 태성의 귀에 박혔다.
“정말입니까? 정말 찾으셨습니까?”
[네.]
“말씀해주시죠.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전에요. 제게 했던 약속 잊으시진 않으셨죠?]
“약속이라면...”
태성은 분명 나리에게 이런 약속을 했다. 나리가 태성이 찾고 있는 사람을 찾아주면 태성은 나리에게 그 사람과 자신이 어떤 관계인지 설명해주겠다고.
[말씀해주세요. 이 중년의 여성분과 작가님은 어떤 사이시죠?]
“만약 제가 답을 안 드리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럼 저도 말씀드릴 수 없죠. 약속은 약속이었으니.]
나리의 입에서 유리의 행방을 들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는 듯 보였다.
“좋습니다. 말씀드리죠. 아마 말씀을 드려도 믿지 않으실 겁니다.”
[저 기자 생활하면서 별의별 이야기 다 들었어요. 괜찮으니 말씀하세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가만 보면 작가님 조건 거는 거 엄청 좋아하신 다니깐요. 좋아요. 그 조건이 뭔데요?]
“제가 이제 말할 이 이야기는... 절대로 기사로 쓰시면 안 됩니다. 약속해주시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기사로 쓰면 안 된다고 말한단 말인가? 작가로서 나리는 태성이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졌다.
[알겠어요. 알겠으니 빨리 말해주세요. 궁금해서 미칠 거 같단 말이에요.]
“그럼 기자님을 믿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네. 그래서 한유리 씨와 작가님이 무슨 관계이신데요? 도대체 이 중년의 여성을 왜 찾으신 거예요?]
“제... 친 딸입니다.”
[네? 뭐라고요!?]
나리는 황당했는지 웃기 시작했다. 전화기 넘어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작가님 지금 저랑 장난치시는 거예요? 한유리 씨가 어떻게 작가님의 딸이 될 수가 있어요. 작가님보다 나이가 많은데.]
“사실입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말씀을 드려도 믿지 않으실 거라고.”
[무슨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죠.]
“이제 알려주시죠. 지금 유리... 어디 있습니까?”
[정말 작가님이 이 한유리 씨의 아빠라고요?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이 사람이 맨날 글만 쓰더니 현실과 가상을 구분 못하게 진짜 미쳐버린 게 아닌가라는 생가기 지수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진짜입니다.”
[와... 태어나서 이렇게 황당한 이야기는 처음 들어봐요.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어떻게 작가님이 이 여성분의 아빠가 될 수 있어요? 작가님 혹시 나이가 80세라도 되시는 거예요? 나이 속이셨어요? 아무리 나이를 속였다고 작가님이 80세라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아무래도 나리는 자신이 이해하기 전까지 한유리의 행방을 쉽게 얘기해줄 거 같지가 않았다.
“사실 전... 냉동인간이었습니다.”
태성의 전화를 듣는 순간 나리는 이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어이가 없었다. 너무 황당한 나머지 실성할 것 만 같았다.
“작가님. 장난이 지나치세요. 제게 사실을 말하기 싫다고 너무 거짓말하시는 거 아니에요?”
[거짓말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분명 진지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나리가 알고 있는 한태성이라는 작가는 결코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냉동인간이시라면 분명 연구실에서 깨어나셨을 텐데 어디 연구실인지 말씀해주시면 저도 알려드릴게요.”
[기자님도 S.W 바이오닉이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S.W 바이오닉? 익숙한 이름인데... 내가 어디서 들어봤더라..? 그 순간, 나리의 시선이 자신의 책상 위에 있는 수분크림으로 향했다. 통의 표면에는 S.W 바이오닉이라고 적혀있었다.
“거기 화장품 회사잖아요.”
[화장품도 하고 여러 가지 많은 생체 실험을 하는 곳입니다. 최근에도 뉴스에 나온 곳입니다. 기자시니 분명 아실 거 같은데...]
“최근에 뉴스에요?”
그 순간, S.W 바이오닉의 젊은 대표와 한 박사가 사라졌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맞다! 저 거기 알아요. 거기 대표가 갑자기 사라져서 지금 경찰이 수사 중이잖아요. 근데 거긴 왜요?”
[맞습니다. 그곳의 연구실에서 제가 깨어났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기자님이 말씀해 주시죠. 제 딸 지금 어디 있습니까?]
너무나도 황당한 이야기였지만 태성이 답을 준 건 맞았다.
“알겠어요. 지금 한유리.. 아니 작가님 따님은 병원에 입원해 계세요. 그 병원 주소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그럼 전화 끊겠습니다.”
나리는 황당했던 전화를 끊었다. 냉동인간이라니... 냉동인간이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닌가?
“우선 주소부터 보내드리자.”
나리는 약속대로 태성에게 병원의 주소를 보내줬다.
“정말 냉동인간이 깨어날 수 있는 거야? 현대 과학이 그렇게나 발전했다고? 그럼 그 루머가 사실인 건가?”
나리는 최근 기자들의 모임에서 냉동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언뜻 들은 적이 있었다.
- 요즘 높은 레벨의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게 냉동인간이래. 최근에 깨어난 냉동인간이 있다고 소문이 돌더니 다들 냉동인간을 연구하고 있다고 알려진 연구실에 예약한다더라.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어요. 다들 지금 누리고 있는 부귀영화를 아주 오래 느끼고 싶은 거겠지.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했어도 사람이 냉동인간에서 다시 깨어난다는 건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터무니없는 상상이라 생각했으니.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 루머의 주인공인 그 냉동인간이 한태성 작가님이란 소리인가?
“에이 말도 안 돼! 냉동인간이 진짜로 깨어났다면 이미 벌써 뉴스에서 뜨겁게 떠들었겠지.”
하지만 태성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거 같았다.
“S.W 바이오닉이라.. 아무래도 이곳을 파야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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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의 엄마는 딸이 말을 하지 못하자 답답해졌다.
“왜 그래? 뭔데 그래? 누가 그 쪽지를 썼는데?”
“할아버지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할아버지가 쪽지를 쓰시다니? 죽은 할아버지가 살아 돌아와서 그 쪽지를 썼다고?”
“아니. 그 할아버지 말고. 엄마의 친아빠 말이야. 노트를 남겨주신 그 할아버지!”
엄마는 지금 딸이 무슨 말을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쪽지 안에 무슨 내용이 적혀있길래 저런 소리를 하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 쪽지 줘봐.”
지수는 멍한 표정으로 엄마에게 쪽지를 건넸다. 엄마는 쪽지 안에 손으로 적힌 내용을 읽어갔다. 그녀의 표정은 1분 전 지수의 표정처럼 변해갔다.
“이 쪽지.. 사실일까?”
“모르지. 그 밑에 번호 적혀있지 않아? 전화해보면 알지 않을까?”
“번호?”
엄마는 쪽지의 아래를 쳐다봤다. 정말 그곳에는 번호가 적혀있었다.
“번호.. 진짜 번호다. 이 번호가 아빠의 번호라고...?”
“엄마. 정말 할아버지일까?”
지수 엄마의 손이 떨려왔다. 그토록 오랜 시간 그리워했던 사람의 전화번호라고 생각하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수야... 엄마... 핸.. 핸드... 핸드폰...”
“엄마!!”
핸드폰을 찾던 엄마는 갑자기 정신을 잃더니 휠체어에서 떨어졌다. 지수는 다급하게 엄마를 흔들었지만 엄마는 깨어나지 않았다.
“엄마. 정신 좀 차려봐! 엄마!!”
다급하게 엄마를 불러봤지만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지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119에 전화를 걸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지수는 너무나도 두려웠다. 엄마가 어떻게 될까 봐 걱정되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119죠? 빨리요. 빨리 좀 와주세요!! 엄마가 쓰러지셨어요!”
지수 엄마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향했다. 구급차 배드에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엄마를 보며 지수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엄마! 엄마!!”
아무리 엄마를 불러보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엄마. 제발...”
지수는 엄마의 손을 꼭 잡고 기도했다. 제발 이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자신의 엄마를 살려달라고 말이다.
구급차가 병원에 도착하자 미리 나와 있던 병원의 의료진들이 엄마를 들것에 실어 병원 안으로 데리고 갔다. 지수는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의사들을 따라갔다.
의료진들은 지수의 엄마를 응급실로 데리고 갔다. 지수는 엄마를 따라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밖에서 기다려달라며 간호사가 그녀를 막았다.
“엄마! 엄마!!”
지수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엄마를 끊임없이 외쳤다. 몸도 안 좋은데 갑자기 기절이라니. 아무래도 친아빠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너무 가슴이 벅찬 나머지 쇼크가 온 듯 했다.
“맞다. 그 쪽지.”
그제야 안치단 유리 표면 위에 붙어있던 쪽지가 떠오는 그녀였다. 지수는 자신의 주머니를 뒤져 쪽지를 찾았다.
“정말 제 할아버지신가요?”
그녀는 쪽지에 적힌 내용을 살폈다. 지금으로서 이 쪽지의 내용을 확인할 방법은 단 하나였다.
“그래. 이 번호로 전화해보자.”
지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배터리가 방전이 된 상태였다. 그녀는 마침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잡아 핸드폰을 빌렸다.
환자의 보호자가 애타게 핸드폰을 빌려달라고 하자 그 간호사도 순순히 자신의 핸드폰을 빌려줬다. 정신없는 상황이었지만 지수는 최대한 정신을 차리며 쪽지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통화 연결음이 들렸다.
‘제발... 제발.. 받으세요. 제발 전화받으라고요!!’
귓가에 연결음이 들릴 때마다 심장의 박동이 점점 더 빨라지는 듯했다. 그 순간, 연결음의 끊기더니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납골당에 쪽지를 남기신 분 맞죠?”
[서지수 작가님?]
응!? 뭐야. 나를 알고 있잖아. 근데.. 이 목소리..
“설마...”
“서지수 작가님 맞죠?”
이건 핸드폰을 통해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지수는 몸을 돌려 뒤를 쳐다봤다. 그곳에는 핸드폰으로 누군가 전화를 하고 있는 태성이 서 있었다.
“한태성 작가님이... 여긴 왜...”
지수는 그의 등장에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이니다. 그 쪽지를 왜 서지수 작가님이...”
태성은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혹시라도 자신의 딸이 발견할까 납골당에 남기고 온 그 쪽지가... 왜 서지수 작가님의 손에 들려있단 말인가?
“작가님 딸 이름이 뭐였죠?”
“한유리입니다.”
“한유리.. 제 엄마랑 같은 이름이네요. 혹시 작가님이 제 엄마의 친아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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