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돌파구
21화. 돌파구
“열흘 뒤 전권을 동시에 발행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전권을 동시에 발행하자고!? 은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다섯 권을 한번에요!?”
“네. 맞습니다. 지금 1권과 2권은 이미 작업이 끝나지 않았습니까? 현재 은우 씨가 3권을 작업 중입니다. 그리고 전 4권의 끝부분을 쓰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건 마지막 5권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내용은 이미 머릿속에서 정리를 끝냈습니다. 즉,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란 말입니다.”
듣고 보니 가능할 것도 같았다. 하지만 전권을 동시에 발행하다니. 보통 출판사에서는 전권을 동시에 발행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권을 동시에 발행한다는 건 큰 모험이기 때문이다. 전편들이 성공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보장이 있다고 그러겠는가?
“하지만... 그러면 출판사의 부담이 너무 커집니다.”
“그러겠죠. 하지만 지금 무슨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동시에 발행하게 되면 분명 사람들의 관심을 살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제국 출판사가 대형 출판사지만 저희 작품이 분명 이슈가 될 겁니다.”
“당연히 이슈야 되겠죠.”
“그럼 된 거 아닙니까? 솔직히 은우 씨도 책으로만 보면 자신 있잖아요. 다만, 홍보에서 밀리는 게 걱정이 되는 거지. 전권을 출판만 할 수 있다면 분명 저희가 이깁니다.”
은우는 다크 드래곤과 시작부터 만렙이야를 모두 작업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어떤 책이 더 재밌는지를. 수십 번 생각해도 시작부터 만렙이야가 더 재밌었다.
“좋습니다. 한번 해보죠. 전권 동시 발행.”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을 역전시킬 돌파구는 이거 밖에 없었다. 무모한 선택인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태성과 그의 작품을 믿기에 내릴 수 있는 선택이었다.
“근데 작가님.”
“네?”
“현재 작가님 레벨이 어떻게 되시죠?”
“아직 59입니다. 최근에 작업하고 유리를 돌보느라 바빠서 책을 읽지 못했거든요.”
“그니깐 작가님은 책을 읽을 때만 경험치를 빨리 획득하시는 거죠? 소설을 쓰실 때는 다른 작가들과 같은 경험치를 얻으시고.”
“네. 맞습니다.”
“그럼 스킬은요? 아직 레벨이 60이 되지 않으셨으니 작가 스킬은 없으시겠네요?”
“하나 있습니다. 보여드릴게요.”
태성은 은우에게 자신의 레벨증을 건넸다. 은우는 레벨증의 화면을 넘겨 스킬창을 확인했다.
[기본 액티브 스킬]
[1. 체력 업! (Lv 14.) - 60분 동안 체력 7% 상승]
[2. 천운 (Lv 12.) – 60분 동안 운 5% 상승.]
[직업 액티브 스킬]
[1. 속독 (Lv 1.) – 5분 동안 책을 두 배속으로 읽을 수 있다.]
[2. 레벨 65에 활성화됩니다.]
[직업 패시브 스킬]
[1. 독서왕 – 책의 글자를 100개 읽을 때마다 경험치 10 획득.]
[2. 작가왕 – 레벨 100에 활성화됩니다.]
[3. 독자의 미소 (Lv 1.) - 자신의 글을 읽은 독자들이 행복해짐]
태성의 세 번째 패시브 스킬을 확인한 은우는 매우 놀랐다. 이렇게 고급 스킬을 태성이 갖고 있었다니.
“작가님 패시브 스킬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그래서 그렇게 글을 빨리 쓰시고 잘 쓰시는 건가...?”
아무리 스킬이 좋다고 하지만 태성의 레벨은 59였다. 즉, 현역에서 활동하는 다른 작가들과 비교했을 때 직업 스탯과 직업 스킬이 결코 높은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글을 잘 쓰는 건가?
그 순간, 은우는 태성이 냉동인간 전부터 작가였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 태성은 레벨 시스템이 존재하기 전부터 작가였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작가님의 수치는 지금의 레벨 시스템에서 별 의미가 없는 건가?’
다른 말로 말하면 태성은 레벨 시스템에서 자유로운 존재였다.
45년 전, 정부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능력을 수치화 시켰다. 그리고 그것을 전산화시키면서 현재의 레벨제도를 완성시켰다. 만약, 태성이 냉동인간이 아닌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었다면 그의 능력을 수치화 시켜 거기에 적합한 레벨이 정해졌을 거다. 그렇기에 현재 태성의 레벨은 레벨증에 나오는 수치 그 이상일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한편, 태성은 은우의 마지막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잘 쓰시는 건가...?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은우씨. 정말 제가 글을 잘 쓰는 편입니까?”
깊은 생각에 빠진 은우는 방금 태성의 입에서 나온 말을 제대로 듣지 못 했다.
“네?”
“방금 은우 씨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글을 잘 쓴다고.”
“아. 네. 사람마다 잘 쓰는 글의 기준이 다를 수는 있지만 제가 생각할 때 작가님은 글을 매우 잘 쓰십니다.”
“그거 압니까? 은우 씨가 글 칭찬해주면 기분이 매우 좋아지는 거. 곧 저녁 시간인데 기왕 오신 거 저녁 식사하고 가세요. 제가 맛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테이블 위에는 빨간 국물에 흐르는 윤기가 더해진 제법 맛있어 보이는 닭볶음탕이 자리를 차지했다.
혁준은 자신의 숟가락을 들어 닭볶음탕의 국물을 한입 떠먹었다.
“키야. 역시 맛있어. 편집자님도 어서 드셔보세요. 형이 요리를 기가 막히게 하거든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혁준이 다시 한 번 국물을 떠와 자신의 흰밥에 썩었다. 옆에 앉은 은우는 그의 모습을 보자 침을 꿀꺽 삼켰다.
“맛있어 보이네요. 그나저나 작가님은 안 오세요?”
“네. 갑니다.”
태성은 유리를 데리고 와 은우의 앞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그는 유리의 옆자리에 앉았다.
“유리야. 닭도리탕은 네가 먹기 너무 매우니깐 물에 씻어먹자.”
태성은 살코기를 발라낸 후 미리 준비한 미지근한 물에 양념을 씻었다. 그리고 그 고기를 유리 앞에 있는 작은 접시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유리는 자신의 숟가락을 이용해 고기를 먹었다. 작은 아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우리 공주님 맛있어요?”
태성의 질문에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혁준은 웃으며 은우에게 말했다.
“유리가 오고 형의 멘트가 부쩍 오글해진 거 아세요? 정말 애 아빠 다 됐다니깐요.”
“그러게요. 정말 친아빠 같네요.”
입양 과정에서 큰 도움을 준 은우는 뿌듯했다. 그녀는 웃으며 태성에게 말을 이어갔다.
“다행히 유리가 작가님 음식을 맛있게 먹네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지금은 잘 먹지만 낮에 점심을 너무 안 먹어서 걱정입니다.”
“그래요? 혹시 간식 같은 거 자주 주세요?”
“아니요. 그렇진 않습니다.”
“흠... 그럼 왜 안 먹는 거지... 주로 점심에 뭘 주시는데요?”
“점심은 간단하게 국에 밥을 말아서 줄 때가 많습니다.”
밥을 먹던 혁준이 두 사람의 대화에 꼈다.
“혹시 고기 안 줘서 그런 거 아닐까요?”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한 태성이었다. 보육원에서 고기를 많이 못 먹었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은우의 생각은 달랐다. 반찬투정을 하는 아이 치고는 유리는 시금치를 너무 잘 먹었다.
‘그럼.. 혹시..?’
은우는 숟가락으로 그릇에 담긴 뭇국을 한입 먹었다. 그리고 그녀는 뭔가 알겠다는 듯 묘한 미소를 지었다. 태성은 그녀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은우씨 생각엔 왜 유리가 점심을 안 먹는 거 같죠?”
“제 생각엔...”
유리에게 밥을 먹이려고 고생한 경험이 있는 태성과 혁준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은우의 말에 집중했다.
“국물이 너무 짜서 그런 거 같아요.”
국물이 짜다고? 간을 많이 하지 않았는데... 태성은 숟가락을 들어 자신이 만든 뭇국을 먹었다. 그의 입맛에는 전혀 짜지 않았다.
“전 괜찮은데...”
혁준도 자신의 숟가락으로 국물을 먹었다. 그 역시 짜지 않았다.
“저도요.”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짤 수 있어요. 아직 어리잖아요.”
은우는 자신의 컵에 담긴 물을 유리의 국물에 부었다. 그리고 숟가락으로 밥을 떠 국물에 담근 후 유리의 입에 갔다 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렇게 밥 앞에서는 입을 굳게 다물었던 유리가 은우가 건넨 밥을 먹은 것이었다.
그 광경에 적지 않게 놀란 태성과 혁준이었다. 특히 혁준은 얼마나 놀랐는지 박수를쳤다.
“역시. 이래서 아이에게는 엄마가 있어야 하나 봐요. 아무래도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섬세할 테니.”
그 말을 들은 순간 유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린 소녀는 은우를 보며 해맑게 말했다.
“엄마다.”
아뿔싸. 혁준은 자신의 입을 막았다. 당분간 절대로 엄마 얘기를 하지 말라는 태성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태성의 눈치를 살폈다. 태성은 난감해하는 표정이었다.
“유리야. 말했잖아. 저분은 엄마가 아니야.”
“엄마 아니야?”
“응. 아니야. 미안해. 아빠가.”
“엄마 아니야... 아니야...”
유리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토라졌다. 그런 아이의 모습이 귀여웠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픈 태성이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딸의 안아주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 밥 다 먹으면 아빠가 소피아 공주 보여줄게. 어때?”
“응.”
소피아 공주도 통하지 않았다. 유리는 여전히 토라져 있었다. 그러자 은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리야.”
은우의 부름에 유리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은우는 말을 이어갔다.
“엄마 대신 이모는 어때? 이모랑 같이 밥 먹고 소피아 공주 보자.”
그 말을 들은 순간 어린 소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좋아요!”
너무나도 좋아하는 유리를 보며 태성은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유리에게는 엄마까지는 아니어도 엄마를 대신해 사랑을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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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출판사 사옥의 옥상이었다. 저녁 시간의 바람이 쌀쌀했지만 마음이 뻥 뚫리는 거 같았다. 그곳에서 예리는 벤치에 앉아 서울의 야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도로 위로 달리는 차들은 각자의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 가면 나의 목적지는 어딜까...?’
어린 시절 그녀의 인생은 결코 밝지 않았다. 아버지는 범죄자였고 어머니는 도망갔으니. 그렇게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홀로 컸다. 그렇기에 부모님의 보호와 가르침이 필요한 시기에 그녀는 삐뚤어졌다.
길거리에서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린 그녀는 방황했다. 그리고 방황의 끝에서 정신을 차려보니 오피걸이 돼있었다.
예쁜 얼굴에 길쭉한 키. 거기에 테크닉이 더해지자 그녀를 부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렇게 업계에서 유명해진 예리는 소위 말하는 VIP 손님들만 상대하는 에이스가 되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최 이사를 손님으로 만나게 되었다. 순수했던 어린 시절 그녀는 책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 시절 그녀의 꿈은 출판사에서 일하는 편집자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자신의 손님이 출판사의 대표라는 걸 알았을 때 그녀는 희망을 보았다. 그를 꾀어내서 지긋지긋한 자신의 인생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결국, 최 이사는 예리의 신분을 세탁해 주었다. 덕분에 특수직이라고 적혀있던 직업 칸에 현재는 편집자가 적혀있었다.
레벨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나이가 스무 살이 되면 네 개의 진로중 하나를 결정해야한다. 대학교를 가게 되면 대학생. 직업을 얻게 되면 사회인. 둘 다 아니면 백수. 마지막으로 원래는 불법이었지만 레벨제도와 함께 합법이 된 일들을 특수직이라 부른다.
사회인 그리고 특수직은 전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뜻한다. 하지만 두 개의 그룹 사이에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사회인의 경우 자신의 전문 직업이 레벨증에 나타난다면 특수직은 자신의 전문 직업을 대신해 특수직이라고 표시된다. 아무래도 공개적으로 오피걸 혹은 호스트빠 선수 라고 표시하기에는 난감했으니.
물론, 레벨증에 특수직이라 적혀있으면 사람들은 대충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특수직을 가진 사람들을 홀대했다. 그렇기에 예리는 특수직에서 편집자로 직업란이 바뀌었을 때 그동안 시궁창 같은 자신의 인생에서 탈출한 줄 알았다.
그건 착각이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악랄한 어른들한테 배웠던 레슨이었지만 까먹고 있었다. 대가 없는 호의가 없다는 것을. 그렇게 예리는 최 이사에게 붙잡혀 살았다. 그의 노예가 된 거였다. 그렇기에 그녀의 눈에 최 이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상대하기 힘든 여자가 있다니. 예리에게는 충격이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하지만 방법이 있을까...?
“여기서 뭐해?”
승우의 목소리였다. 예리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잠시 생각 좀 하고 있었어요. 이제 내려가서 일 마무리 해야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뭔가 단순한 생각은 아닌 거 같아서.”
“가끔 보면 선배는 신기해요. 어떻게 그렇게 사람 마음을 잘 알아요?”
“그럼 지금 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맞춰볼까?”
“왠지 선배는 알 거 같네요. 맞춰보세요.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너...”
은근히 긴장이 되기 시작한 예리였다. 그녀를 보며 승우가 말을 이어갔다.
“내가 되게 잘 생겼다고 생각했지.”
“선배!!”
예리는 승우의 어깨를 쳤다. 그녀의 모습에 재밌다는 듯 승우는 크게 웃었다.
“네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내가 어떻게 아냐? 말하지를 않는데. 정말 답답하고 미칠 거 같으면 나한테 말해도 돼. 내가 고민 들어줄게. 같이 고민도 해주고.”
그의 말에 예리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선배. 그거 알아요? 남자가 그렇게 말하면 여자는 되게 설레는 거. 그것도 선배처럼 근사한 남자가.”
“그래? 그럼 기왕 설레는 거 고민 한번 말해봐. 네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그래.”
“맞아요. 저 힘들어요. 그래서 고민하고 있었어요. 지금 제 인생에서 어떻게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 말이에요.”
“돌파구?”
“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저의 돌파구를 스스로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번에 알게 된 어떤 멋진 여자처럼.”
“스스로의 길을 찾겠다는 말이네. 멋지다. 너도 많이 성장했구나.”
승우는 예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선배 하나만 약속해줘요.”
“뭘?”
“제가 저의 돌파구를 찾을 때까지 절 응원해주겠다고요.”
예리는 승우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러자 승우는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그녀의 새끼손가락에 걸며 약속했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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