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욕심
78화. 욕심
여 대표는 떨리는 마음으로 박 회장을 만나기로 한 골프장으로 향했다. 이곳은 평일에도 골프를 치러 오는 VIP 회원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박 회장이 왔기에 아무도 이곳에 들어올 수 없었다.
“바쁜 사람 불러다가 왜 이렇게 멀리까지 오라고 한 거야.”
서울에서 이곳까지 오기 위해 차를 타고 40분을 달렸다. 오는 길이 귀찮았지만 별 수 없었다. 박 회장의 부름이었으니.
한편, 여 대표는 명품 크리스털이 가득 박힌 골프채를 손에 쥐고 있었다. 햇빛을 받아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골프 채는 박 회장의 취향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운 골프 채와 함께 아름다운 자세로 스윙했다.
[탕]
자그마한 골프공에 정확히 들어가자 경쾌한 소리를 내며 골프공이 청공을 가르며 멀리 날아갔다.
“아름다운 스윙이셨습니다.”
그의 뒤에 서있던 한 비서가 가볍게 박수를 치며 칭찬했다. 그러자 박 회장은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오늘 샷이 아주 아름답게 잘 들어가는 거 같습니다. 아주 좋아요.”
“회장님.”
“네. 말하세요.”
“여 대표가 도착한 거 같습니다.”
한 비서의 말에 박 회장이 도도하게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걸어오는 여 대표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렇군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꽃처럼 사람도 천천히 아름다움을 잃어간다는 사실이 난 너무 슬퍼요. 여 대표도 분명 처음에는 아람다웠는데 말이죠.”
잠시 후, 박 회장 앞에 도착한 여 대표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네. 어서 와요. 여기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맑은 하늘에 푸른 풀밭. 거기에 골프라는 아름다운 스포츠까지. 이곳은 정말 절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공간이죠. 여 대표도 이곳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어때요?”
그의 질문에 여 대표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골프장의 모습을 구경하는 척 했다.
“네. 이곳은 회장님 말씀대로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아름다운 회장님이랑 아주 잘 어울리는 곳입니다.”
“하하. 그래요? 전 이곳이 여 대표와 잘 어울렸으면 하는데.”
그 순간, 여 대표는 머릿속에서 수십 개의 생각을 했다. 나와 잘 어울리는 곳이라... 이게 무슨 소리지? 이곳을 나한테 준다는 건가? 설마 이곳을 경영하라고? 오호. 진짜? 그래서 날 부른 거야? 아레스 때문이 아니라!?
“그나저나 그 키스 신은 아주 잘 봤어요. 근래에 봤던 드라마 키스 신 중에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인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여 대표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박 회장에게 인사했다.
“근데 말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모든 게 조화를 이룰 때 나타나는 겁니다. 드라마 내용은 결코 아름답지 못했어요. 도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작가들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그래요? 그럼 여 대표가 피디도 교육을 잘 못 시키고 있는 모양입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번에는 연출로 혼을 내려는 모양인 듯했다. 하.. 미친 노인네 말만 많아가지고는...
“난 분명 200억을 투자한 거 같은데. 어째 드라마의 비주얼이 20억도 안 되는 거 같아요. 화려한 액션을 기대했는데 허군날 가만히 앉아서 이야기만 하고. 가끔 나오는 액션이랑 폭파 장면도 점점 허접해지고. 도대체 왜 그러는거죠?”
순간, 박 회장의 말에서 살기를 느낀 여 대표였다. 간담이 서늘해지며 등 뒤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 그게... 죄송합니다. 피디들 교육도 다시 시키겠습니다.”
“오늘 제가 여 대표에게 듣는 소리라고는 죄송하다는 말밖에는 없군요. 알겠습니다. 이만 가보세요. 더 이상 여 대표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네. 회장님. 그럼.”
여 대표는 공손하게 손을 모아 깍듯하게 박 회장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박 회장을 등지는 순간 그의 표정이 싸하게 변했다.
‘하... 시발 미친 노인네 곱게 미칠 것이지.’
한편, 박 회장은 자신의 자리에 가만히 서서 멀어지는 여 대표를 바라봤다.
“여 대표가 요즘 도박에 빠졌다고 했었죠?”
“네. 그렇습니다.”
“도박이라...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아름다웠던 인재의 추락을 지켜봐야 하는 게 참으로 슬퍼요.”
“앞으로 여 대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나의 돈으로 아레스를 아름답게 제작하기는커녕 자신의 노름에 썼으니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겠죠. 하지만 우선은 계속 지켜볼 겁니다. 되도록 여 대표가 아름답게 추락했으면 좋겠어요. 그 모습도 나름 볼만할 텐데 말이에요.”
“알겠습니다. 그럼 오 피디에게 계속해서 여 대표를 감시만 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부탁해요.”
박 회장은 자신의 골프채를 들고 자신의 카트로 향했다. 그가 사용하는 카트도 다른 일반 카트와는 매우 달랐다. 그의 골프 채와 마찬가지로 카트 역시 명품 크리스털로 꾸며져 있었다.
한 비서도 카트로 향했다. 운전석에 앉은 그가 카트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뒷자리에 앉은 여 대표는 골프장의 아름다운 광경을 살피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묻히는 결말도 나름 아름답겠어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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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스의 13화의 시청률은 다시 한 번 하락하며 17.5%를 기록했다. 비록 시청률이 소폭 하락했지만 여전히 아레스는 동시간대 시청률 1위의 자리는 지키고 있었다.
그런 아레스의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는 멜로디의 9화 시청률은 전편보다 소폭 상승하며 12.4%를 기록했다. 하루가 다르게 자체 최고 시청률을 갱신하고 있는 멜로디였다.
두 드라마의 치열한 시청률 싸움에서 가장 피해를 보고 있는 건 뒤늦게 시작한 희망이었다. 희망의 5화 시청률은 3.5%를 기록하며 여전히 3.0%대의 시청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세 드라마의 싸움은 다음 화에서도 이어졌다. 아레스의 14화 시청률은 또다시 하락하며 17.1% 기록했다. 이는 1화와 같은 시청률이었다. 다른 말로 말해 자체 최저 시청률이라는 소리였다. 이대로 시청률이 계속 하락하게 된다면 이제는 자체 최저 시청률을 갱신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암울한 상황인 아레스와 달리 멜로디의 10화 시청률은 전편보다 1.3% 상승하며 13.7%를 기록했다. 이제 아레스와의 시청률 차이는 3.4%였다.
멜로디의 1화 시청률과 아레스의 5화 시청률의 차이가 무려 17.1%였다는 걸 감안해본다면 엄청난 결과였다. 힘겨워 보였던 시청률 전쟁에서 멜로디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선전을 하고 있었다.
이제 아레스와 멜로디 두 드라마 모두 6편을 남기고 있었다. 기간으로 따지만 총 3주였다. 언론에서는 마지막 시청률 싸움에서 과연 어떤 드라마가 최종 승리를 하게 될지 두 드라마의 시청률 싸움을 기사로 흥미롭게 다뤘다. 한편, 두 드라마의 그림자에 가려진 희망의 6화 시청률은 전편과 마찬가지로 3.5%를 기록했다.
연이은 멜로디의 시청률 상승에 지수는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만약, 멜로디를 연장한다면 아레스의 종영과 함께 시청률이 폭발하듯이 상승할 거라 확신했다. 만약 연장을 하려면 지금 당장 대본을 수정해야 했다. 현재 멜로디는 12회를 촬영하고 있었고 대본은 14회가 마무리 단계였으니.
우선 지수는 은하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멜로디의 제작사인 드림 픽처스의 대표였으니.
사실, 은하도 멜로디의 시청률에 욕심이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지수의 의견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렸다.
“감독님과 작가님 그리고 배우들만 찬성한다면 나는 좋아.”
제작사 대표에게 허락을 받았으니 이제 감독에게 연락할 차례였다. 드라마 피디로서 높은 시청률의 드라마를 제작한다는 건 먼 미래에 있을 국장 승진에 매우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야 좋지. 지금 현장 분위기도 좋고. 대본만 계속해서 나올 수 있다면 배우들과 스텝들은 내가 책임지고 설득할게.”
예상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나오는 현 피디였다. 제작사 대표와 드라마의 감독이 동의했으니 이제 설득할 사람은 단 한 명만 남아있었다. 그렇다. 그건 바로 공동으로 대본을 집필하고 있는 태성이었다.
지수는 태성을 설득하기 위해 그의 집으로 향했다. 태성이 집에서 대본을 작업하고 있었으니.
태성의 집에 처음 온 지수였다. 두 남자와 어린아이가 살고 있는 집이라 너저분할 수도 있겠구나 예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간단하게 집 구경을 하던 지수의 눈에 텔레비전 옆에 위치한 작은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액자가 품고 있는 사진 안에는 태성, 혁준, 유리 그리고 은우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유리가 처음 집에 온 날 찍은 그 사진이었다.
“아.. 이분이 한태성 작가님의 여자 친구분이시구나.”
사진 속에 있는 네 사람은 참으로 화목한 가족처럼 보였다.
“쿠키랑 커피 좀 드시죠.”
고급 쿠기와 커피가 들린 쟁반을 들고 태성이 주방에서 나왔다. 그는 거실 소파 앞에 위치한 테이블 위에 쿠키와 커피를 올려놓으며 소파에 앉았다.
“무슨 일이기에 직접 오신 겁니까?”
“작가님이랑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지수가 소파에 앉으며 말을 이어갔다.
“혹시 저의 드라마 연장하는 거 어떠세요?”
“16부작으로 기획된 드라마를 늘리자는 말입니까?”
“네. 은하 언니랑 감독님한테도 여쭤봤는데 다들 좋다고 하더라고요...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
“연장이라...”
태성은 고민에 빠졌다. 종영을 3주 앞두고 연장이라니. 애초에 16부작으로 기획되어 만든 줄거리였다. 연장을 하려면 내용을 늘리거나 새로운 내용을 만들어야 했다.
“얼마나 연장하고 싶으신 겁니까?”
“한 4회 정도요.”
순간 태성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4회라고 하셨습니까?”
“네.. 좀 많죠?”
“도대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남았기에 4회나 연장하는 겁니까?”
“어.. 사실은 연장의 이유가 하고 싶은 이야기보다는 다른 곳에 있어요. 아마 그 이유를 말하면 작가님이 싫어하실 거예요.”
“제기 싫어할 이유라...”
지수가 매우 중요시 생각하지만 자신은 그렇기 중요시 생각 안 하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해본 태성이었다. 답은 간단해 보였다.
“혹시 시청률에 관한 겁니까?”
“네. 맞아요. 만약 4회를 연장한다면 저희 드라마 시청률이 엄청 오를걸요? 아무래도 아레스가 종영되면 아레스를 보던 시청자들이 우리 드라마로 유입되겠죠. 지금 분위기로 봤을 때 시청률 20%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요!”
멜로디의 시청률이 벌써 20%를 돌파한 것처럼 매우 신나 보이는 지수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태성이 답했다.
“시청률을 매우 중요시하는 드라마 사업이니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내용이 없지 않습니까?”
“그건.. 이제 저와 작가님이 고민해볼 문제죠.”
자신이 얘기해도 조금은 창피한 지수였다. 작가라는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보다는 무조건 드라마를 연장해서 시청률을 높일 생각을 먼저 했으니.
“만약 이 연장이 온전히 시청률을 위한 거라면 전 반대입니다.”
“작가님. 너무 그렇게 단칼에 거절하지 마시고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만약 드라마가 연장돼서 시청률이 높게 나온다면 이건 작가님한테도 좋은 일이라고요. 드라마 작가한테 데뷔작 시청률이 얼마나 중요한데요. 데뷔작 시청률이 높아야 다음 작품도 쉽게 시작할 수 있다고요. 작가님 레벨이 엄청 높지 않은 이상 첫 작품은 무조건 시청률이 좋아야 해요. 데뷔작 드라마가 자신의 마지막 드라마가 된 작가들도 얼마나 많은데요.”
지수는 태성을 설득하기 위해 드라마 작가의 세계를 현실적으로 말해주었다.
“그런 현실이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더욱 이번 연장에 동의하셔야겠네요.”
“하지만 내용이 없지 않습니까?”
“내용이 없으면 지금 준비된 이야기를 좀 늘리면 되죠. 적당한 에피소드 추가해서요.”
“그럼 완성도가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렇겠죠. 그래도 시청률이 높아지잖아요.”
이제 대화의 주제는 드라마의 완성도와 시청률로 바뀌었다.
“서지수 작가님. 처음에 멜로디를 드라마로 제작하겠다고 했을 때 제가 걸었던 조건 기억하십니까?”
“그야 기억하죠. 그거 때문에 제가 화났었으니. 지금 작가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지 저도 알아요. 멜로디의 작품성이 걱정되시는 거잖아요.”
“네. 맞습니다. 저한테는 대본의 작품성이 최우선입니다.”
“대본의 작품성을 중요시하는 건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융통성이라는 게 있잖아요. 시청률을 위해서 대본을 연장하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잖아요!”
융통성이라... 하지만 태성은 드라마의 완성도를 낮추는 일은 너무나도 싫었다. 그 순간, 태성의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번뜩 떠올랐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심각했던 표정에서 갑자기 밝아진 태성이었다. 이건 필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신호였다.
“지금 작가님 좋은 생각이 떠오르셨죠? 그게 뭔데요?”
“그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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