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피노키오
36화. 피노키오
“지원이는 하루 종일 연락이 없네. 많이 아픈가?”
평소였다면 아파도 심심하다고 연락 올 지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찌 된 영문인지 한 통의 연락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은우는 지원에게 연락하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
[따르르릉.]
통화 연결음이 계속해서 들렸다. 친구의 목소리를 기다렸지만 상냥한 언니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음성 사서함으로 안내됐다.
“뭐야? 얘 많이 아픈가 보네?”
얼마나 아프면 전화도 못 받는 건지...
“오늘 집에 찾아가 볼걸 그랬나?”
만약 내일도 지원이 아파서 회사에 못 온다고 하면 무조건 집에 찾아가겠다고 다짐한 은우였다.
“하.. 그나저나 작가님은 뭐 하시려나?”
은우는 핸드폰의 전화 목록에서 한태성이라는 이름을 쳐다봤다.
“연락 한 번도 없고. 너무하시네요 작가님. 나 같으면 원고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라도 연락하겠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여자라면 남자에게 먼저 연락하기보다는 그에게서 연락이 오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존재한다. 은우에게는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면 먼저 연락하고 싶은 사람이 연락하면 되는 게 아닌가?
현재 시간은 저녁 7시 30분이었다. 이 시간에 전화를 거는 건 결코 피해를 주는 게 아니었다.
“아쉬운 사람이 먼저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니겠어?”
은우는 핸드폰으로 태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따르르릉.]
지원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통화 연결음 밖에 듣지 못 해서 그런가 괜히 긴장이 되는 은우였다.
‘설마 이번에도 안 받는 건 아니겠지?’
통화 연결음 소리만 계속해서 들릴수록 심장도 빠르게 뛰는 거 같았다. 잠시 후면 또다시 예쁜 언니의 목소리와 함께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갈 거 같았다. 그때였다.
[은우 씨?]
태성의 목소리였다! 오랜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에 얼굴에 미소가 번진 은우였다. 근데 오늘따라 딱딱한 말투였다.
“네. 작가님. 어... 잘 지내셨어요?”
[네. 잘 지냈습니다. 근데 무슨 일이시죠?]
“어... 원고 작업 1차로 끝났습니다. 이제 지원이가 2차적으로 작업할 거 같아요.”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더 할 말 있으신가요?]
“네? 어... 아니요.”
[알겠습니다. 항상 수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뚝. 그렇게 태성은 전화를 끊었다.
“응..? 뭐지?”
지금 바쁜 일이 있으신 건가?
“하긴 어린애 키우는 게 보통 일은 아닐 테니.”
그래. 작가님은 싱글 대디이시니. 저녁 7시 30분이면 한창 아이와 놀아줄 시간이잖아. 그치?
“그래도... 너무하시네...”
그렇다. 태성이 너무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은우 씨.. 미안합니다.”
유리와 함께 소파에 앉아있는 태성이 자신의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아빠를 보며 유리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아빠 뭐 해? 저거 봐!”
유리는 손가락을 텔레비전의 화면을 가리켰다. 그렇다. 오늘도 소피아 공주였다.
“응. 미안.”
태성은 유리를 번쩍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놨다. 그러자 유리는 몸을 뒤로 눕혀 아빠에게 기댔다.
“아빠 나 안아줘.”
“그래.”
태성은 유리를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그러자 어린 딸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이게 맞는 거야.’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억누를 수가 없다. 하지만 참을 수는 있다. 참는 방법은 간단하다. 거짓말을 하면 되는 거다. 잠시는 힘들겠지만 언젠간 거짓말에 익숙해질 것이다.
그날 밤, 유리는 유독 잠을 자지 못 했다. 자식이 잠들지 못할 때면 가장 힘든 건 부모이다.
“아빠... 나 잠이 안와...”
유치원에 처음 갔다 왔을 때는 피곤하다고 잘 자더니 벌써 적응한 모양이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아빠가 책 한 권 더 읽어줄까?”
이미 태성은 유리에게 동화책 한 권을 읽어주었다. 하지만 유리는 아직 잠에 빠지지 않았다.
“응!”
“그래. 잠시만.”
태성은 유리의 방안에 있는 책장에서 새로운 동화책을 꺼냈다. 피노키오였다. 침대에 누워있는 유리는 눈을 껌뻑껌뻑 거리며 아빠가 다시 침대에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아빠! 빨리!!”
누가 작가 딸 아니랄까봐 유독 동화책을 좋아하는 유리였다. 새로운 동화책이 기대되는지 유리는 매우 들떠 보였다. 잠들어야 할 딸이 오히려 설레어하고 있다. 일찍 재우기는 그른 모양이었다.
“우리 딸 추운데 이불 똑바로 덮어야지.”
태성은 유리가 따듯하게 잘 수 있게 이불을 덮어줬다. 다정한 아빠의 행동이 좋은 건지 아니면 새로운 동화책이 좋은 건지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날 생각이 없었다.
“그럼 시작할게요.”
태성은 피노키오를 펼쳤다. 그런 아빠의 모습을 유리는 빤히 쳐다봤다 곧이어 태성은 동화를 읽기 시작했다. 적당한 연기가 더해지자 이야기는 제법 생동감이 있었다. 피노키오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제페토 할아버지의 보살핌 속에 살던 피노키오는 현실에 유혹되어 거짓말을 일삼았다. 그럴 때면 그의 코는 길어졌다.
“아빠. 거짓말은 나쁜 거야?”
한창 이야기에 빠져있던 유리가 궁금했는지 물었다.
“그럼. 나쁜 거지. 사람을 속이는 일이니깐.”
“나쁜 일이구나. 피노키오 나쁘네. 아빠 근데 왜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는 거야? 남을 속이는 건 나쁜 일이잖아.”
“그게...”
거짓말을 왜 하는 거냐는 어린 딸의 질문에 태성은 어떻게 대답을 해 줘야 할지 몰랐다. 왜냐하면 지금 그도 거짓말을 하고 있었으니. 태성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가끔은 그럴 필요가 있거든.”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나중에 크면 너도 알게 될 거야.”
어찌 보면 치사한 대답이지만 대답하기 곤란한 어린이의 질문에 가장 쉽게 대답하는 말이었다.
“그렇구나. 그래서? 피노키오는 어떻게 되는데?”
“아. 피노키오. 그럼 계속 읽어줄게.”
“응!”
태성은 동화책을 이어갔다. 결국, 모험의 끝에서 피노키오는 반성하게 된다. 결국, 피노키오는 할아버지에게 돌아가지만 두 사람은 위기에 빠지게 된다. 그 위기의 끝에서 피노키오는 제패토를 살리지만 죽게 된다. 그 순간, 요정이 나타나고 그는 피노키오를 진짜 소년으로 만들어준다.
피노키오는 다시 만나 할아버지와 감격의 재회를 할 무렵 태성을 쳐다보던 유리의 두 눈이 감겼다. 드디어 잠에 빠진 거였다. 이런 말이 있다. 아이가 가장 귀엽고 사랑스러울 때는 자고 있을 때라고. 맞는 말이었다.
“휴...”
오늘도 무사히 아이를 재운 태성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곤히 잠든 자신의 딸을 보자 괜히 행복해지는 그였다.
“우리 공주님. 무슨 꿈을 꾸길래 그렇게 웃는 거야?”
.
.
.
다음날이었다. 오늘도 핸드폰 알람 소리에 깬 은우는 피곤한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하.. 더 자고 싶다.”
이 세상에서 평생 적응할 수 없는 게 있다면 아침에 해야 하는 출근일 거라 생각한 그녀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등교했지만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는 건 어려웠다.
“이씨... 이게 다 대학교 때문이야.”
대학생 때 누렸던 자유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는 핑계를 대며 은우는 자신의 베개에 얼굴을 박았다.
“일 분만.. 딱 일 분 만이다.”
그때였다. 은우의 머릿속에 어제 연락이 되지 않던 지원이 떠올랐다.
“지원이는 괜찮으려나..?”
은우는 다시 몸을 일으켜 핸드폰을 집었다. 지원에게 전화를 걸기 위함이었다.
[고객의 전원이 꺼져 있습니다.]
오늘은 통화 연결음마저 들리지 않았다. 그냥 곧바로 얼굴 모르는 언니의 예쁜 목소리가 들렸다.
“뭐지? 너무 아파서 핸드폰 충전도 못한 건가?”
얼마나 아프면 핸드폰도 충전을 못했는지... 하긴, 어제도 아침을 제외하곤 한 번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잠깐 집에 들러야겠다.”
은우는 양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폈다. 이제 정말 침대에서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간단하게 출근 준비를 끝낸 은우는 출판사로 향하기 전에 지원의 집으로 먼저 향했다.
지원의 집 앞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은우의 눈에 들어 온건 오늘 새벽에 배달된 작은 우유였다. 지원은 우유를 매우 좋아한다. 그렇기에 항상 문 앞으로 배달된 우유를 마시고 밖으로 나온다.
“아직 밖에 안 나왔나 보네.”
아무래도 몸이 많이 아픈 듯했다. 은우는 친구를 걱정하며 초인종을 눌렀다.
[띵똥.]
집안에서 울리는 초인종 소리가 문 밖으로까지 들렸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너무 아파서 침대에서 꼼짝 못하는 건가?”
은우는 또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띵똥.]
이번에도 집안에서 울리는 초인종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혹시... 집에 없는 건가?”
오늘따라 유독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집이 비어있는 것처럼 말이다.
[똑똑똑.]
이번에는 손으로 현관문을 뚜들겼다. 이번에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은우는 더욱 다급하게 문을 뚜들겼다.
“지원아! 김지원!!”
애타게 친구의 이름을 불렀지만 역시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설마 얘 너무 아파서 기절한 거 아냐?
“이씨!!”
방법은 하나였다. 은우는 근처 열쇠공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연, 집 주인이 아닌 사람이 열쇠공에게 전화를 걸어 집 주인인 척 문을 열어달라고 하면 범죄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은우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감사합니다!”
3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무려 5만 원이라는 출장비를 내야 했다. 은우는 집주인인 척 태연하게 집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문 앞에 있던 우유를 가지고 말이다. 문 밖으로 열쇠공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은우는 다급하게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지원아!”
하지만 지원은 집안에 없었다. 휠체어도 없는 걸 보니 밖에 나간 듯했다.
“뭐지? 병원에 간 건가?”
은우는 핸드폰을 들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른 아침과 마찬가지로 예쁜 언니의 목소리만 들렸다.
[고객의 전원이 꺼져 있습니다.]
여전히 핸드폰은 꺼져있었다.
“설마..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그래. 아닐 거야. 너무 아파서 어젯밤 전화기도 충전 못했고 또 너무 아파서 아침에 병원에 갔을 거야. 문 앞에 우유가 그대로 있는 건 병원에 빨리 가야 하니깐 신경 못썼겠지.
은우는 자신이 들고 있는 우유를 쳐다봤다. 도대체 이 우유의 주인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지원아... 너 지금 병원에 있는 거 맞지?”
두웅. 그때였다. 코트 주머니 안에 있던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어? 지원이인가?”
은우는 서둘러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방금 온 문자를 확인한 순간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더니 결국 너도 바보였어. 그렇게 쉽게 친구한테 속다니 말이야. 너무 친구를 원망하지는마. 인생이란 게 원래 서로 속고 속이는 거니깐.]
그렇다. 최 이사에게서 온 문자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내가 속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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