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이제 우리는 팥 없는 붕어빵이야.
이제 떠난다고 생각하니 새삼 기분이 묘해져서 레안은 불이 꺼진 집무실에 창틀에 기대 앉아 창문으로 비치는 달을 바라보았다. 어째 이렇게 홀로 달빛과 별빛밖에 없는 곳에 앉아있으려니 더욱 기분이 가라앉는 것이 차분해지면서도 착잡한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결정을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지금은 잠시 그래도 정들었던 이들과의 감정 정리를 하고 싶을 뿐이었다.
아마 그녀가 지금 이 곳을 떠나면 더 이상 그들을 만날 일은 없을 터였다. 그녀가 유리안에게는 방문을 허락한다고 했으나, 그녀는 수면기에 들어설 예정이니 실상 그가 찾아와봤자 그가 레안을 만날 확률은 극히 적었다. 특히나 수면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고 해도 그 수면기가 언제 끝날지도 모를뿐더러 수면기가 끝이 나면 이미 유리안이나 다른 녀석들은 이미 죽고 없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더 이상 그들을 만날 일은 없는 거겠지.
크게 별다를 것도 없는 사실이었고, 시작한 그 때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이었건만 마치 그녀는 자신이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그냥 단순한 시간 낭비라고만 생각했건만. 어차피 시작도 그녀가 원해서가 아니라 유리안이라는 귀찮은 존재에 의해서였고, 그동안 계속 유리안과 약속한 기간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생각만큼 머리가 나쁘거나 멍청한 녀석들이 아니라 같이 지내면서 다소 짜증과 귀찮음을 느끼면서도 잘 지내고 있었지만 단지 그뿐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정말 이게 뭐하는 짓인지.
잠시 그렇게 창틀에 기대 달빛을 감상하던 레안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그러나 침실로 도착하기 전 그녀의 침실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 하륜 덕에 레안의 침실 도착은 잠시 미뤄지게 되었다.
“뭐냐, 넌.”
다친 주제에 요양이나 하고 있을 것이지. 딱히 요양할 만큼의 상처는 아니었지만 그냥 왜인지 지금 저 하륜이라는 녀석을 만나는 것이 괜히 꺼려졌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레안의 말투는 곱지 않았다. 물론 원래도 곱지 않았지만.
“그냥 갑자기 레안님이 생각나서 말입니다.”
“생각나면 생각만 해. 사람 귀찮게 찾아오지 말고.”
몇 번 침실로 데려왔더니 습관이 된건가.
레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떠나실 겁니까?”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몰랐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 묻고야 말았다. 어쩌면 이 임무를 끝내고 황성에 돌아가면 레안이 떠날 지도 모르겠다고. 과연 레안이 떠난다면 하륜 자신은 어떻게 될까. 딱히 그가 레안과 어떤 관계를 맺었다거나, 헤어질 수 없는 깊은 관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는 단장으로서 단원인 하륜에게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하륜 역시 딱히 그녀에게 무언가를 주거나 바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왜 그녀가 떠난다는 사실에 이렇게 가슴이 아파올까.
그녀와 하륜 사이에는 그저 단장과 단원이라는 관계 말고는 없을 터인데. 아무리 하륜이 그녀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는 해도 그것은 레안이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륜 스스로 레안의 말에 위로를 받은 것 뿐이었다.
“더이상 남아있을 이유는 없으니까.”
그런가. 너무도 간단하게 나온 대답에 하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륜에게는 레안을 붙잡을 명분도, 마땅한 이유도, 관계도 없었다.
“다시 볼 수는 있을까요?”
“아마 없을걸?”
레안의 대답에 그로서도 완전히 파악이 되지 않는 절망을 느끼며 하륜은 씁쓸히 뒤돌아섰다. 그리고 레안 역시도 볼 일이 없다는 냉정하게 침실로 들어갔다.
왠일일까.
행사나 크게 사건 터뜨릴 때 말고는 총단장인 레안이 이렇게 황실 기사단 전체를 부르는 경우가 없는데. 이유를 알 수 없는 명령에 집합한 기사들은 일제히 의아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다만 그 이유를 대략적으로 알 것 같은 단장과 부단장들은 설마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레안을 기다렸다. 그때 그들의 눈에 레안이 보였고, 레안은 휘적 휘적 걸어오더니 단상 위에 섰다.
“딱히 별로 긴 것은 아니고, 난 오늘 부로 그만 둔다. 그래서 내 후임을 생각해보았는데, 저 신입, 하륜이 나을 것 같아. 뭐, 그래봤자 임시 총단장으로 더 괜찮은 놈 생기면 그놈 시켜. 어차피 난 이제 끝이니까.”
아무렇지 않은 듯 평화롭게 말하는 것 치고는 듣는 이의 입장에서 경악할 만한 사실에 다들 이해 할 수 없다는 듯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별로 어려운 말을 한 것이 아니건만 쉽게 머릿속으로 접수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레안은 그런 그들의 반응 따윈 관심없다는 듯 할 말만 하고는 가볍게 등을 돌렸고, 그들이 정신을 차려 무언가 질문을 던지려 했을 땐 이미 레안이 사라진 후 였다.
레안이 사라지고, 그들은 급격한 패닉 상태에 빠졌고, 그동안 어떠한 언질도 없이 갑자기 이런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몇몇은 분노를 표출했고, 몇몇은 농담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기사들 사이로 단장들과 부단장들이 일제히 두두두하는 걸음으로 레안의 집무실로 향했다. 다행히도 정말 그 말만 하고 바로 황성을 떠난 것은 아닌지 레안은 집무실에 있었다. 다만 떠나지 않았을 뿐이지 떠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뭐야?”
“말도 안됩니다!!”
허이고?
지가 뭐라고 반대를 하는 것인지 당당히 반대를 선언하는 바론의 모습을 레안이 아니꼬운 듯 바라보았다.
“황제 허가 받았어.”
레안의 심플한 대답에 바론은 순간 욱하며 물러났다. 아니, 황제가 승인했다는데 일개 기사인 그들이 어찌 그녀를 막을 수 있으리요.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럼 나가기 며칠 전부터 나 나간다, 그만둔다. 하고 노래를 부르고 다니리?”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 그 며칠 전에 미리 언제 그만 둔다하고 말은 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다짜고짜 나 오늘 그만둬, 라니.
“그래서 이렇게 멋대로 그만 두겠다고?”
사이로 따지자면 가장 레안과 사이 안 좋은 단장인 라이너 역시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드물게 격한 어조로 말을 했다. 그러나 이미 결정을 끝낸 레안에겐 그러던 말던 상관 없는 내용들이었다.
“레안 님 다시 생각해 보면 안돼요?”
거의 울먹거리다시피 말하는 유란의 모습에 레안이 피식 웃으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레안 님 너무해요!!”
지가 무슨 비련의 주인공이라고. 나오지도 않는 눈물 콕콕 찔러 닦는 류의 모습에 레안은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난... 레안 님.. 가는 거 싫다...”
드물게 길게 말을 꺼낸 이안이 여전히 졸린 눈으로 레안을 바라보았다. 이어서 다른 이들의 초롱초롱한 시선들도 레안을 향했다. 그러나 레안은 그들을 냉정하게 무시했다.
“지..진짜야?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알고 보니 서프라이즈라던가?”한평생 황실 기사단 총단장으로 있으며 질리도록 기사들을 갈구며 괴롭히며 갈굴 것 같았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라니. 레안에 대한 감정을 떠나서 뭔가 상당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뭐랄까. 우습지만 레안은 그냥 황실 기사단 총단장 같았다. 레안이 누구냐고 물으면 황실 기사단 총단장이요, 황실 기사단 총단장이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레안이라고 답할 정도로.
“큭, 제대로 충격이군.”
카엘 역시도 리엔의 생각과 마찬가지였기에 그의 말에 동감하며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미 어제 들었지만, 또 이렇게 다시 확인하게 되니 그건 그것대로 충격인지라 하륜 역시 다소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렇게 당장 오늘 떠날 줄이야.
그래도 다들 총단장인 레안에게 많은 정이 들었는데. 악마같이 웃으며 훈련을 시킬 때는 안 그만두나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건 정말 잠깐(?)으로 그렇다고 정말 그만두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그들이 이렇게 최고의 기사들로, 그리고 기사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 레안 덕분인거나 마찬가지인데.
어찌할 바를 모르는 기사들은 그저 당황스런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레안의 폭탄 선언 후, 단장들과 부단장들의 눈물어린 만류에도 불구하고 레안은 냉정히 황성을 떠났고, 레안이 없는 황실 기사단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원래부터 크게 훈련에 개입하는 사람이 아니라 느긋하게 구경을 하는 레안인지라 그들의 생활 패턴이 급격하게 변한다거나 그러진 않았지만 그동안과 다른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런 허전한 기분이라니.
뭔가 훈련을 해도 훈련을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훈련의 강도가 변한 것도 아닐 텐데 왜이렇게 몸은 늘어지는지.
그리고 그런 기사들과 다르게 확실하게 생활 패턴이 변한 하륜은 졸지에 레안의 집무실을 차지하게 된 후 차마 무엇도 하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었다. 이왕 네가 해라 라고 말했으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알려주던가. 어떠한 인수인계도 없어 덜컥 맡기고 떠나버린 레안 덕에 신입이었다 순식간에 총단장이 된 하륜은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일더미에 어찌 해야 할 바를 몰랐다. 거기다 이곳이 레안의 집무실이었던 것을 아는 하륜은 집무실의 그 무엇도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었다. 분명 그녀의 물건은 모두 가져갔을 거고, 이젠 그의 방이니 마음대로 해도 상관 없을 터인데, 아직도 이곳이 그녀의 방인 것만 같아 그의 자리가 되어버린 책상에도 쉽게 앉지를 못했다. 그래서 하륜은 어이없게도 방문자용 소파에 앉아 그가 처리해야 할 서류들을 처리했다.
“어떤가요?”
신입이었던 하륜의 신분 덕에 상당히 애매한 관계가 되어버린 라힌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집무실에 찾아와 하륜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런 라힌 못지않게, 한때의 상관이었던 라힌을 부하로 두게 된 하륜 역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하긴 그럴테지. 단계적으로 올라간 것도 아니고, 순식간에 점프업했으니 쉽게 적응하는 것이 무리겠지. 어째서 레안이 그를 총단장으로 추대시킨 것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심히 배려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하륜이 마룡의 하트를 가지고 있어, 그녀 다음으로 제일 강하고, 또 그동안 보여준 모습으로 보아 착실하고 머리가 좋은 것 같으니 총단장 직을 물려받는데 무리는 없겠지만 최소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려주고 가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일개 단장인 라힌이 감히 총단장이 무엇을 하는 것이야 하고 알려줄 수도 없고. 아니, 애초에 워낙 보이지 않게 일하는 레안 덕에 단장인 라힌도 정확히 총단장이 무엇을 하는 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물론 아예 예상이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체계적으로 알려주고 갈 것이지.
이미 떠난 사람한테 이렇게 속으로 씨부려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지만 그래도 역시 단순히 인수인계를 안 해주고 떠났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렇게 그들이 말리는데도 기어코 떠난 레안에 대한 괜스런 원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속으로 꿍얼거릴 수 밖에 없었다.
정말 이런 말 하면 과장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레안은 황실 기사단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그게 사실이 아니더라도 실제 대부분의 기사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처음 그들이 황실 기사단에 들어왔을 때부터 있었던 존재이니.
라힌이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며 하륜 옆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이상해.”
생활 패턴이 변하게 된 또다른 인물, 리엔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딱히 류의 괴롭힘을 즐기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러길 바라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멀뚱히 놓여지자니 심히 기분이 이상했다. 거기다 그게 단순한 이유가 아니라 레안이 떠난 것에 대한 류의 심각한 패닉으로 이렇게 되었다는 사실에 매우 신경이 쓰였다. 어차피 리엔이야 그리 레안을 좋아하거나 달가워하지 않았기에 다소 이상하고 섭섭하면서도 크게 감정의 동요는 겪지 않았는데 그건 그 순간의 착각인 듯 그 역시도 다른 기사들의 분위기에 물들어 갔다.
제길.
있을 때도 죽어라 괴롭히더니 나갈 때도 이렇게 괴롭히는 것인지. 괜히 심숭생숭한 기분에 다른 청룡단의 기사들과 섞여 검을 휘둘러도 기분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큭, 어째 표정이 멋있는데?”
미묘하게 일그러진 리엔의 표정을 본 카엘이 크큭 거리며 리엔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카엘의 표정도 그리 정상적이지는 않았다. 아니, 그들뿐 아니라 모두가 그런 표정이었다. 분명 일상인데, 일상이 아닌 것 같은 느낌. 다를 건 없는데, 무언가가 자꾸 신경 쓰여서 좀처럼 집중이 안되는 느낌.
정말 생각한 것 이상으로 레안의 빈자리를 매우 컸다. 단장이나 부단장들조차도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 작가의말
오오, 레안은 갑니다!!
다음편은 레안 없는 기사단 이야기!!!
플러스, 다다음화가 마지막!! 절대 다음화 아니에요, 다다음화에요......라고 저는 주장합니다.
지난 화에 달아주신 코멘트들은 마지막화인 67화에서 후기로 쫘악 답해드리겠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향란지몽 님/ 레드러너 님/ 펜그렘 님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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