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리엔, 그대에게 드리리~
모처럼 평범하게 훈련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검을 휘두르던 리엔은 아까부터 느껴지는 자신을 향한 미묘한 시선에 좀처럼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선 왜 자꾸 자기를 쳐다보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자신보다 높은 직급에 차마 대놓고 따지지 못하고 꾸욱 참고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집중을 할 수가 없어서 짜증 게이지가 잔뜩 차오른 상태였다.
“어? 거기 틀렸다. 각도가 다르잖아. 그렇게 베다간 중간에 걸려서 그대로 마물과 일체화 될 걸?”
자신을 바라보는 류의 시선 때문에 속으로 짜증을 토해다 삐끗했던 리엔은 그것을 그대로 지적하는 류의 말에 인상이 확 구겨졌다.
안그래도 지 시선 때문에 짜증나 죽겠구만 도대체 누구한테 시비인거야?
“그만 좀 보시죠?”
“뭘?”
“저 좀 그만 보시라구요!! 신경쓰인다구요!!!”
“심장이 두근거려? 뇌가 마비된 것 같아?”“느닷없이 무슨 소리인데요?”
“아니면 상관없잖아. 그리고 나 너 본 거 아니야? 네가 있는 공간을 본거지.”생글거리며 대답하는 류의 모습에 리엔은 헛웃음을 지었다.
난폭한 뻔뻔함도 무지 재수 없지만 저런 능글맞은 뻔뻔함은 더더욱 재수가 없었다. 아니, 뭐 생각해보면 비슷할 것 같기도 하지만. 아무튼 저런 뻔뻔함은 무지무지 아주 많이 재수가 없었다. 거기다 상관이라면 때릴 수도 없으니..
뭐라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 같은 생각에 리엔은 그저 한숨을 내쉬곤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큭, 왠지 저 단장님 너한테 관심있는것 같지 않냐?”카엘이 리엔을 툭 치며 웃으며 말하자 왠 어이없냐는 말이라는 표정으로 리엔이 카엘을 바라보았다.
“그 무슨 미친 소리인거야?”안그래도 류의 첫 눈에 반한 상대를 보기라도 하는 듯한 짙은 시선에 가뜩이나 짜증나 죽겠구만.
“널 보는 시선이 유난하길래. 훈련 시작할 때부터 시선이 너에게서 떼지지 않고 있잖냐.”
“웃기는 소리마!!”
“하지만 난 카엘 말에 동의하는데?”
묵묵히 지키고 있던 하륜이 카엘의 말에 동조를 하고 나서자 리엔은 마치 카엘의 말이 사실 인 것처럼 인상이 잔뜩 구겨졌다.
“거봐. 좋겠구만. 이리저리 사람들 관심 잔뜩 받고..크크.”
“닥쳐.”
카엘에게 싸늘하게 일갈한 리엔은 왠지 모를 우울함에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어때? 마음에 들어?”
창을 통해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소파에 늘어지게 앉은 레안이 싱글싱글 웃고 있는 류를 향해 물었다.
“네, 무지요. 완전 제 스타일인데요? 놀리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 솔직히 이안은 너무 재미없다구요.”
하긴, 그녀석이 원체 조용하긴 하지.
류의 말에 공감이 간 레안이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였다.
“그럼 라힌한테 말해둘게. 우선 오늘까지는 백호단에서 마저 훈련 받게 할 거니까 내일 가져가라.”
“네!!”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가진 소년처럼 류는 더없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레안은 고개를 흔들며 그에게 나가라며 손을 휘저었다.
류가 나가고 몇 분후 레안의 호출에 라힌이 노크 소리와 함께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오자 마자 보이는 나른한 듯 소파에 눕다시피 한 레안의 모습에 라힌은 귀엽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레안은 기분이 나쁜지 미묘하게 인상을 찡그렸지만 그조차도 귀찮은지 이내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너도 저기 앉아봐.”
레안의 고개짓을 따라 시선을 향하던 라힌은 레안이 가리키는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어때? 견딜만 해?”
쌩뚱맞은 질문에 순간 무슨 말인가 생각하던 라힌은 이내 레안의 말 뜻을 이해하곤 다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금방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순간의 변화를 눈치 챈 레안이 쯧,하며 혀를 찼다. 그런 레안의 반응에 라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딱히 너 뭐라 그러는 건 아니니까 괜스레 기죽은 척 하지마. 거슬리니까.”
다소 차가운 레안의 말에 라힌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원래 그런 분이었지. 언제나 강하고, 꼿꼿한. 언젠 힘들 땐 기대라더니.
“쓸데없이 너무 강한 척 하는 것도 보기 안 좋아. 기껏 지 생각해서 찾아오라고 했더니 죽어도 오지 않고 말이지.”
라힌은 순간 어깨를 살짝 떨었다.
정말 타이밍 한번 잘 맞추지. 딱 레안님 무심하다고 탓하고 있을 때 그런 말이라니.
“뭐, 그래도 제법 괜찮네. 좀더 오랜 시간 앓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 여전히 극복 중인 것 같으니 힘들때 와, 네 놈 우는 것도 구경할 겸. 너 그녀석 죽고 나서 아직 한번도 안 울었지?”
나른한 모습을 한 게 언제였냐는 듯 또렷한 시선으로 자신을 레안의 시선에 라힌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라힌의 모습에 레안은 답지 않게 온기가 살짝 섞인 미소를 지으며 라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다 이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들어간 레안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멍청한 녀석. 아무튼 그건 됐고. 이번 신입 중 한명 청룡단 넘겨줄 테니까 백호단 훈련에서 그놈 빼. 그 말 하려고 부른거야.”“으음, 그놈이라면 역시 어제부터 류가 졸졸 쫓아다니고 있는 리엔이겠지요?”리엔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던 류의 시선을 기억해내며 라힌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 그러니까 오늘까지만 굴리고 내일부턴 류한테 쥐어줘.”
하여간 저 말버릇은.
사람을 물건 대하듯 말하는 말버릇은 어쩔 수 없는건가.
“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그래. 힘들 때 한번 기대는거 잊지 말고. 그럼 나가봐.”
레안의 말에 모처럼만의 진지한 표정으로 라힌이 레안을 바라보았다.
“뭐?”
얼굴을 향해 꽂히는 라힌의 시선에 레안이 인상을 썼다.
“그냥..이랄까요. 그럼 전 이만 나가볼 게요. 그리고 레안님, 존경합니다.”
말을 마친 라힌은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라힌이 나갈 때 까지 눈을 감고 있던 레안은 문이 닫히는 소리에 눈을 다시 떴다.
“죽어라 멍청한 녀석이.”
말투는 다소 차가웠지만 그 말엔 온기가 느껴졌다.
리엔은 아까부터 느껴지는 미묘한 불안감에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내가 레안님한테 불려가서 좋은 일이 있던 적이 있던가.’
제기랄. 단 한번도 레안한테 불려가서 좋은 일을 겪은 적이 없다는 사실에 리엔은 다시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다른 사람이 봤을 때 황실 기사단인 백호단에 입단한 것이 좋은 일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훈련 받기 전의, 백호단에서 훈련을 받아 보지 않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소리였다. 누구든 백호단에서 훈련을 단 한번이라도 받아 본 사람이었다면 절대 그런 말을 할 수 없으리라.
하아.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는 손에 리엔은 계속 레안의 집무실 앞에서 한숨만을 내쉬었다.
그렇게 몇분을 앞에서 멍하니 있었을까. 여전히 재수없는 레안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거기서 쇼하냐? 아까부터 문 앞에서 무슨 지랄이야.”하여간, 언제 들어도 재수없는 말투야.
리엔은 입을 삐죽이며 힘겹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간 리엔은 순간 흠칫 굳었다. 그저께부터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던 청룡단 단장이라는 사람이 저기 있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야.
“이녀석 누군지는 알지?”
레안의 질문에 리엔이 세상에서 제일 더럽다는 쇠똥구리 씹은 것 마냥 찝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소개는 됐고, 앞으로 너 청룡단으로 소속 옮겼으니까 그리 알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절대 믿기지 않는 다는 듯,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리엔이 큰 소리로 되물었다.
“싫어?”
“솔직히 싫은데요?”
레안의 뚜렷한 살기가 느껴졌지만 죽어도 류 밑에서 훈련받고 싶지 않던 리엔은 엄청난 용기를 발휘하여 자신의 본심을 털어놓았다.
“그래? 그럼 내 밑으로 들어오던가. 물론 나는 라힌이나 바론처럼 어설프지 않으니까 명심해두고.”알아요, 알고 있다구요. 이미 겪어봐서 안다구요.
리엔은 막막한 자신의 현실에 그저 한숨만이 나왔다.
류냐 레안이냐. 뭐 이런 개 엿같은 선택이 어디있는지.
하아, 그래도....레안보다는...... 류가 낫겠지...?
“아니요, 생각해보니까 좋아요.”
생각해보니 좋긴 개뿔.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황실 기사단을 때려치고 나가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해온 것이 아까워서라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 리엔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류는 리엔의 결정에 기쁘다는 듯 활짝 웃으며 리엔을 꼬옥 안았다. 다 큰 성인의 포옹에 리엔은 질색팔색을 하며 발버둥을 쳤지만 역시 괜히 단장이 아닌건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잘 어울리네.’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레안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잘 부탁해, 귀염둥이!”
싫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마주 손을 잡으려던 리엔은 뒤에 이어지는 끔찍한 호칭에 순간 그래도 굳어버렸다.
“응? 왜 너무 좋아? 물론 좋아할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좋아하니까 내가 다 쑥스러운데..”도대체 자신의 모습 어디가 좋아하는 모습인건지 그 놈의 눈을 파내서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는 현실에 리엔은 한숨만 내쉬었다. 그런 리엔의 모습에 또 그게 좋다는 듯 류는 실실 거렸다.
언제나 반응이 없는 이안만 보다가 이렇게 건드릴 때마다 다이렉트로 반응이 오는 리엔을 보니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걸?’
그런 그들의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바론은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앞으로의 리엔의 모습이 상상되었기 때문이었다. 류라면 황실 기사단 내에서 사상 최대의 트러블 메이커로 유명한 사람인데... 괜스리 그를 빡세게 굴린게 미안해지는 바론이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