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뭐든 네들 맘대로냐?
“죽을 것 같아. 정말 죽을 지도 몰라.”
침대에 쓰러지며 말하는 리엔의 얼굴은 잔뜩 질려 있었다.
그 모습에 카엘과 하륜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백호단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야.”
정말 자신도 몰랐다. 설마 자신이 그 고단한 백호단의 훈련을 겪고서, 다시 백호단으로 돌아가고 싶어할 줄은.
하지만 이것은 인간이 버틸 수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단장이란 사람이 자기 놀려먹는 재미로 살고 있는 사람이란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능력이 없어서 반발도 하지 못한 채 당하고 있던 것뿐.
그랬던 것이 점점 더 치밀해지고 있었다.
아마도 레안 때문인 것 같은데. 그녀 본인은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리엔에게 가해지는 압박은 전보다 더해졌다. 레안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자신에게 푸는 것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며칠간은 참 얌전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뿐이었다.
이어 류는 1:1 개인 지도를 명목으로 훈련을 가장하여 자신을 지능적으로 괴롭혔다. 차라리 전이 나았다. 도대체 지금은.... 견딜 수 있을만한 수준이 아니라고!!
“넌 어때?”
백호단이야 뭐 자신도 이전엔 백호단이었으니 딱히 궁금하진 않았지만 현무단의 훈련은 알지 못했기에 새삼 궁금했다.
멀쩡한 하륜의 모습을 보니 가장 훈련이 쉽지 않을까 싶으면서. 만약 그렇다면 다음 승급 심사때는 부디 현무단으로!!
“그냥 뭐 그래.”
대답하는 하륜의 표정은 꽤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왜, 어떻길래?”
리엔의 집요한 행동에 하륜은 씁쓸한 표정으로 그의 현무단 생활을 회상해보았다. 역시 미소는 지어지지 않았다.
물론 리엔처럼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것은 아니었지만 그 못지 않게 힘들었다. 순전히 육체적 고통만으로도 이렇게 힘들어 할 수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심하게 고문을 당하면 정신을 놓게 된다던데. 알 것 같았다. 계속 되는 육체적 고통은 그것만으로도 정신적 고통을 수반했다.
하륜의 좋지 못한 표정에 침대에 누워 쉬던 카엘의 얼굴에 이채가 서렸다. 이내 카엘도 궁금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졸지에 두명의 궁금증어린 집요한 시선을 받게 된 하륜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냥 싸워. 그래, 단지 싸우는 것뿐이지. 그게 누구든, 뭐든.”그 말에 카엘과 리엔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엔 하륜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훈련이라고 해봤자 개인 훈련이라 별거 없어. 다만 오후에 항상 시뮬레이션을 통해 마물들과 실전 훈련을 하고, 제비 뽑기로 추천된 대련 규칙대로 대련을 할 뿐이지. 정확히 말하자면 말만 대련인 실전이지만.”
“에에?”
고작 그것뿐이라는 말에 리엔은 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카엘만은 하륜의 말에 숨겨진 고통을 느끼고는 연민어린 시선을 보냈다.
“가끔은 무기도 없이 검을 든 4명의 기사들과 싸울 때도 있지. 또는 시뮬레이션이 랜덤 작동이라 S급 마물들이 나오는 경우도 있지. 말그대로 모든 상황이 랜덤이야. 그렇게 오후 내내 죽어라 싸우는 거지.”
씁쓸히 내뱉는 하륜의 말에 리엔은 그래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겪지 못한 사람은 모르리라. 하루에 몇 시간씩 내내 싸움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심적·물적 고통을 수반하는지.
특히나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련은 정말 가차없이 휘둘러져 그의 몸을 가격하기에 그 고통은 정말 상상초월이었다. 애초에 마물을 상대로 발전된 육체적 능력이기에, 마물 때리는 강도로 사람을 때리는 것은 정말 뼈가 으스러지는 느낌이었다.
애초에 마물의 구조와 사람의 구조는 다르니까.
오늘은 모처럼만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이 거의 없다고 봐도 될 정도로 맑은 날씨를 가지고 있는 제이로 제국이었기에 사람들은 저마다 오랜만에 보는 비에 아련한 기억을 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과 대조되게 황실 기사단의 기사들은 날씨만큼 울적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저 사람들이 비가 온다는 이유로 훈련을 봐줄 거라는 생각은 안했지만 비오는 날 졸지에 대련을 하게 된 기사들은 괜히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비에 옷이 젖는 것만으로도 찝찝한데 이런 날 뒤엉켜 대련이라니.
“알겠지만 저는 지는 것을 매우 싫어하지요. 그러니 혹시라도 진다면 각오하시는게 좋을 거에요.”
웃으며 말하는 그 모습에 옆이 있던 바론이 소름이 돋는지 팔을 긁었다.
다른 기사들은 모르겠지만 그나마 라힌 곁에 가장 오래 있던 바론이었기에 저 미소가 뜻하는 바를 너무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얼핏 보면 4개의 기사단 단장들 중 가장 성격이 좋아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다 연막이었다. 애초에 황실 기사단에 정상적인 사람이 있다는 것부터가 이상하잖아.
바론은 그저 기사들을 향해 애도를 표할 뿐이었다. 자신이 부단장이라는 사실에 새삼 감사하며.
“오늘 지는 녀석들은 단체 미팅이다~!!!”
미팅은 얼어죽을.
아주 신나 죽는 류의 모습에 리엔이 남몰래 입을 삐죽였다.
지는 사람들은 단체 미팅이라니. 어떻게 사람이 모두 이길 수 있는가? 지는 사람이 있으니 이기는 사람이 있는 것을.
그것도 모른 채 그저 이기라고만 닦달하는 류의 모습에 리엔은 속으로 욕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더 이상 류와의 만남 시간을 늘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리엔은 불끈 주먹을 쥐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기리라.
“이겨.”
단 한마디로 짧게 끝낸 라이너는 그저 지면 죽는다는 의미를 담아 날카로운 시선으로 현무단의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렌은 책을 읽던 시선을 잠시 거두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 질 것 같지 않지만.
다만 하륜이라는 신입 기사의 실력을 다시 또 확인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카렌은 잠깐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 주작단의 능력을 보여주자구~”
황실 기사단 중 가장 실력이 떨어진다는 말을 듣는 주작단이었기에 유란은 모처럼 그 소문을 일단락시킬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며 모처럼 살벌한 시선을 기사들에게 던졌다.
언제나 자유롭던 단장이었기에 그런 모습에 기사들은 불안감을 느꼈다.
하긴, 다른 단장들에 비해 자유로운 것이지 황실 기사단의 단장인 이상 그렇다고 마구 풀어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마디로 개싸움이었다. 단순히 신체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대련은 아무런 무기 없이 신체를 이용해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었기에 검을 휘둘러 싸우는 것보다는 다소 과격했다.
특히나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해야만 하는 검과 달리 비교적 사정거리가 짧은 이 싸움은 그야말로 엎치락뒤치락이었다.
비까지 오니 대련이 끝난 후의 그들의 모습은 쇠똥구리 저리 가라였다.
그러나 미처 씻을 틈도 없이 진 녀석들은 각자 부단장들의 손에 이끌려 개인지도를 받아야 했기에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거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의 결과로 싸움은 더욱 진창이 되었다. 살기 위해 싸우는 그들의 얼굴엔 독기가 잔뜩 서려 있었다.
도대체 자신들을 싸움 붙여서 얻을게 뭐 있다고 이러는 건지.
순 지들 멋대로의 행동에 기사들은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결코 밖으로 새나가지 않았다. 그들의 성격 더러운 단장들이 그러한 그들의 말을 순순히 들어줄 사람이 아니었기에.
잠이 올 듯 나른한 빗소리에 창가에 기대 앉아 창 밖을 바라보던 레안은 훈련장에서 대련을 하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비오는 날 무기도 안 들고 몸싸움이라니, 마치 한 장면의 개싸움을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의 더러운 몰골은 그 의견을 더욱 지지하게 해주었다.
“흐음?”
창 밖을 바라보던 레안은 순간 움찔했다.
훈련장에 있던 하륜과 얼핏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묘하게 감이 좋네.’
묘한 표정을 짓던 레안은 이내 그대로 창에 기대 잠을 청했다.
모처럼 빗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흐물흐물한게 잠이 솔솔 왔다.
대련이 끝난 후 훈련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얼마되지 않았다. 반 이상이 단장들의 손에 이끌려 각 기사단의 훈련장으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훈련장 곳곳에서 들리는 비명소리는 그들의 몸은 떨리게 했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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