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이제부터 시작!
왠일로 바쁜 듯한 모습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레안이 책상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항상 밖으로 나돌아 다니기 바쁜 그녀였기에 집무실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을려니 좀이 쑤셔 죽을 지경이었다. 다른 일이라면 대충 쓸 만하고 만만한 녀석을 불러다가 시키면 될 일이었지만 이번 건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번 건이 기사단의 승급심사와 관련된 내용이었으므로. 물론 다행히도 승급심사는 황실 기사단과 근위 기사단이 따로 분리되어 자신은 황실 기사단의 승급 심사건만 처리하면 되지만, 그래도 귀찮은 건 귀찮은 거였다. 특히나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하는 이런 승급 심사 따위는.
“하아.”
성질이 난 듯 그녀는 머리를 헝클이며 한숨을 토해냈다.
“크, 어느새 승급심사구만.”
지난 시간을 회상하는지 카엘의 표정은 아련했다.
“그렇네. 기사의 인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는데.”
하륜 역시도 과거를 회상하는 지 표정이 아련했다.
“꽤 재밌었지.”
“크크, 현상금 사냥꾼 할 때도 이렇게 빡세진 않았었는데. 그래도 재밌긴 했어.”
남들이 들으면 호랑이가 풀 뜯어 먹는 모습만큼 어이없어 할 말을 하륜과 카엘은 당당히 주고 받았다. 물론 여기서 남들이란 리엔도 포함한 말이었다.
실제로 이 말을 들은 리엔은 둘을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도 류에게 시달린 덕분에 격하게 반대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 표현은 하지 못했지만.
“미치도록 한가한 모양이지?”
사이좋게 대화를 주고 받던 하륜들에게 레안이 아니꼬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 표정은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알아챌 만큼 적나라했다.
“오랜만입니다.”
당황한 카엘과 달리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하륜이 웃으며 인사했다. 그 모습에 레안은 더 기분이 나빠졌는지 아까보다 인상이 더 찡그려졌다.
“진짜, 정말, 완전, 미치도록 한가한가봐?”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잔뜩 묻어있었다.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레안님께서는 어쩐 일로?”“내가 내 공간 다니는데, 니들한테 허락 받아야 되? 내가 무슨 일로 돌아다니든 말든.”
가뜩이나 잔뜩 날이 서있는 레안이었기에 그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다 거슬렸다.
“많이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다소 당황한 카엘을 대신하여 하륜이 대답했다. 그런 그를 레안은 힐끗 쳐다보곤 그들을 지나쳐 걸었다. 맘 같아선 당장이라도 저 거슬리는 세 놈을 단체로 제대로, 아주 제대로 굴리고 싶었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승급 심사가 황실 기사단이랑 근위 기사단이랑 따로 한다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어느 정도의 보고와 협력이 필요하기에 근위 기사단 총단장인 카인을 만나야 했다. 물론 만나봤자 대충 말만 하고서 헤어질 거지만.
레안의 뒤모습을 보면서 하륜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화창한 오전.
모처럼만에 그동안 볼 수 없었던 황실 기사단 전원이 황실 기사단 연무장에 정자세를 하고 줄지어 서있었다. 서있는 그들의 표정엔 묘한 긴장감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유일하게 단 세명, 하륜들만이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들 앞에 공식적인 자리에서 한번도 볼 수 없었던 레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단상에 서있었다.
“아아, 지금부터 승급심사 시작 할 거니까 각 단장이 적어준 순서대로 서서 싸울 준비해. 오전엔 대결 할 거고, 오후엔 본격적인 체력 심사 들어갈 테니까 그리 알아. 아, 그리고 내일 스케줄은 내일 이야기 해줄게. 불만 있거나 불만 있거나 불만 있거나 나랑 싸우고 싶은 사람 손들고 큰 소리로 이야기 해. 자, 셋 주겠다. 하나둘셋. 없지? 그럼 시작해.”역시나 그녀답달까?
엉뚱하고, 간단하고 어이없는 그녀의 말이었지만 그 누구도 불만 서린 표정은 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을 끝으로 각 기사단 별로 정렬했고, 단장들은 단원들에게 대전표를 나눠 주었다.
“우선 처음엔 대진표의 순서대로 1:1 대련을 시작할 예정이에요. 그리고 그 후엔 잠시의 휴식 시간을 거쳐 다른 기사단과 3:1 대련을 하게 될 거고 말이지요. 주작단, 현무단, 백호단, 청룡단의 기사들이 서로 한번씩 돌아가며 3:1 대련을 하게 될 거에요. 그러니까 쉴 수 있을 때 푹 쉬도록 하세요. 경험자의 충고 하나 하자면 아마, 지옥일 거에요.”
생긋 웃으며 말하는 라힌을 바라보며 백호단의 기사들은 전부 악귀,라는 생각을 했다.
“단장님들 및 부단장님들은 따로 승급 심사를 진행하지 않습니까?”
묘한 도전과도 같은 말에 라힌의 시선이 잠깐 질문을 던진 하륜에게로 향했다. 혹시나 시비이면 반죽여놔야지 싶던 라힌은 단지 궁금증만을 담은 하륜의 표정을 보고 살풋이 생각을 접었다.
“단장과 부단장들은 승급심사 끝난 다음날 총단장인 레안님과 따로 승급심사를 하게 될 예정이지요.”
“자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승급심사 날이닷~!! 제군들 알지? 혹시나 경고 받은 놈들은 모두 내 일주일 메이드로 쓸 줄 알아~~ 특히, 우리 자기, 리엔군 알지?”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는 류의 말에 리엔은 순간 몸이 굳었다. 그동안 너무 지독하게 시달린 탓인지 이제 그는 류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만 나와도 몸이 굳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이제 막 신입 기사를 처음 본 청룡단의 기사들은 하나같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이제 겨우 오전의 1:1 대련을 끝냈을 뿐인 하륜들은 일제히 나무 그늘 아래 드러누웠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다른 기사들에 비해 그들은 비교적 나은 편이었다.
“큭, 어떠냐? 청룡단에서의 대련은?”
일전에 백호단에서 1:1 대련을 했던 것을 떠올리며 카엘이 물었다.
“뭐든 다 죽을 것 같아. 어느 거든 결국 다.......젠장이야.”
빠르기와 정확함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청룡단과 절대적인 강함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백호단과 비교하자면.. 글쎄.
결국 어느것이든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속도에 있어서는 하륜들 중에서 가장 실력이 좋았기에 백호단에서보다는 청룡단에서 좀 더 진가를 발휘하고 있었다.
다만 그런 자신의 모습에 마치 포동포동 살이 오른 먹잇감을 보는 것처럼 묘한 눈길을 보내는 류 때문에 기분이 찝찝할 뿐이었다.
“너네는 한번 해봐서 전보단 편했겠네.”
리엔의 표정엔 묘한 부러움이 담겨 있었다.
“크, 그때랑은 비교도 안되. 마치 그때는 우리를 봐준 것처럼 느껴질 정도니..”
새삼 대련이 생각 났는지 카엘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련이 나쁘지는 않았는지 카엘의 얼굴엔 조그만 미소가 실려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한계까지 싸워보는 것 같지 않아?”
하륜이 상쾌한 모습으로 말했다. 그 모습에 카엘은 묘한 미소를 지었고, 리엔은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어이.”
갑작스럽게 들리는 시선에 겨우 앉아 시선을 향하니 레안과 함께 5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제복 상의에 문양 말고도 알파벳이 수놓여져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각 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들인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그나마 셋 중에서 가장 상태가 양호한 하륜이 카엘과 리엔을 대신하여 인사를 했다.
“니들, 처음 볼 테니까 각자 알아서 인사해. 이후로 니들 단장이 될 지도 모르고.”
“현 백호단 소속인 하륜이라고 합니다.”
“현 백호단 소속인 카엘입니다.”
“..........”
자연스럽게 뒤이어 들릴 줄 알았던 리엔의 인사는 일어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림으로써 다소 시간이 걸렸다.
“현 청룡된 소속인 리엔입니다.”
“어머, 다들 미남이네.”
붉은 머리를 한 주작단 단장, 유란이 그들을 향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얼굴에 헤실헤실 미소가 떠나가지 않는게 하륜들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인사부터 하시죠, 단.장.님.”
유란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지 부단장, 제나가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제나의 행동에 유란이 거슬리는 듯 제나를 쫙 째려보았다.
“흥, 난 주작단 단장인 유란이야.”화사하게 웃는 유란을 보며 제나가 같잖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 주작단 부단장인 제나라고 해요.”
“어머, 제나는 무슨. 제론이라는 멀쩡한 이름 두고 왜 제나래?”
“단장님이 뭔가 착각하셨나보네요. 전 제나랍니다.”
“신입이 오해할라. 제론이잖아,너. 남자 주제에 제나는 무슨.”
유란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비꼬듯 말하자 제나는 화가 난 듯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런 그들의 뒤로 설마 남자였던 거냐,의 놀란 표정을 짓는 하륜들이 있었다.
“남자에요?”
그나마 가장 뻔뻔하고, 가장 눈치 없는 리엔은 둘을 향해 정말 진심으로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그로인해 둘의 시선은 리엔으로 향했고, 살기 어린 제나의 시선은 리엔에게로 향했다.
“당연하지. 얘 여장남자야~~ 완전 쪽팔리게.”
“어머, 여잔데도 여자로서의 모습이 전혀 없는 누구보다는 낫다고 보는 데요?”
파지직.
둘 사이엔 강한 전기가 흘렀다.
이대로 두다간 싸움이라도 날 모습에 레안이 그들을 향해 돌맹이를 던졌다. 돌맹이는 정확하게 그들의 머리가 맞았다.
“적당히 해. 초면에 뭐하는 짓이야? 니들은 인사 끝냈으니까 절로 가서 일이나 해.”
귀찮으면서, 또 거슬린다는 표정으로 레안이 구석을 가르쳤고 유란과 제나는 풀 죽은 표정으로 레안이 가르킨 곳으로 향했다.
“현무단 단장. 라이너.”
“현무단 부단장. 카렌입니다.”
“...................”
방금 전의 인사들과 너무 비교되는 간단한 소개에 하륜들은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마침내 주작단과 현무단 단장과 부단장의 인사가 끝났고, 마지막으로 청룡단 부단장인 이안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안은 기나긴 인사에 지쳤는지 서있는 모습으로 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레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얜 청룡단 부단장 이안. 그럼 간다.”
너무도 곤히 자는 모습에 레안이 이안을 대신하여 소개하고는 이안의 뒷통수를 거칠게 내려친 후 그래도 잠에서 깨지 않은 이안을 데리고 사라졌다.
그들의 소개가 끝나고 몇 분 후. 바로 오후 승급 심사가 진행되었다.
승급 심사 1일이 끝나고, 자신들의 숙소로 돌아가는 하륜들과 황실 기사단의 모습은 해발500M의 산에서 굴러 떨어진 것 마냥 옷이 헤져있고, 온통 흙과 피투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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