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당신을 위한 특별한 여행 패키지
“레안님, 진짜 휴가가요?”
그동안 한번도 레안이 휴가를 본 적 없던 류가 어색한 듯 재차 레안에게 물었다. 그에 귀찮은 듯 레안이 그를 띠껍게 바라보았다.
“불만이야?”
“에이, 레안님도~ 당연히 보고 싶을까봐 그러죠.”
어이없다는 레안의 시선이 그를 향했고, 이내 무시하기로 한 듯 시선을 돌려 소파에 앉아있는 단장들과 부단장들을 바라보았다.
“내일부터 나 휴가 갈 동안, 니들은 무인도에 간다. 훈련 필요 없이 거기 가있다가 오면 되는거야.”
자기 혼자만 휴가 가기가 미안한 건지, 아니면 단순한 변덕인지 그녀 나름으로는 꽤 호의를 베풀며 말했다. 물론 그것이 정말 호의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겠지만.
“무인도.. 말인가요? 단지 거기서 생활만 하면 되는 건가요?”
뭔가 수상한 듯 라힌이 말을 늘이며 물었다.
가끔 알 수 없는 행동들을 하기는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로서도 꽤 의아한 마음이 드는 명령이었다.
“뭐, 그뿐이긴 한데. 굳이 조건을 말하자면, 살아서, 무사히 돌아와라. 혹시나 부상자 생기면 죽는다.”
아. 덧붙이는 레안의 말에 그제서야 라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무인도에 보내는 거라면 휴가일지 모르지만 저 말을 한 것은 그 무인도가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말 그대로 무인도로, 인간만 살지 않는 곳일지도.
“얼마나?”
“이틀. 정확히는 1박 2일. 섬은 하나니까, 한 기사단씩 1박 2일로 머물다 오면 되. 바로 무인도로 연결되는 진 설치해놨으니까 그거 사용하면 되고. 아, 그리고 진은 황성에서만 열 수 있고, 거기선 못 여니까 그거 알아두고. 혹시나 나 없다고, 은근슬쩍 미리 빠져나오면. 알아서 해. 진에 기록표 있어서 언제 열었는지 다 체크되니까.”
철저한 레안의 행동에 바론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순서는 청룡, 현무, 주작, 백호단이야. 그럼 나가봐.”
“나도 가야 하나?”
하아?
레안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라이너를 바라보았다.
“넌 현무단이 아니라 뭔데?”
머리가 나쁜 녀석도 아닌 주제에 뻔한 것을 물어보는 라이너의 행동에 레안은 저놈 뭔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알았다.”
쿨하게 대답하며 집무실을 나가는 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저번 키란 왕국 갈 때도 상당히 귀찮았는데. 사랑스런 아내와 1박 2일 동안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라이너의 기분은 침울했다.
“빌어먹을.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헛소리야!! 무인도라니, 아니, 왜 갑자기 무인도인데! 자기는 실컷 놀러가는 주제에!”
진짜 제발 좀 휴가 얻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승급심사에 임했건만 1등 못한 것도 억울한데, 무인도에게 가서 지내라는 말에 리엔은 매우 짜증이 났다. 거기다 이 것을 풀 수 있을 만한 화풀이 상대도 없고. 번번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치여사는 리엔이었기에 그 스트레스는 장난 아니었다. 그뿐이랴. 류와 함께,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곳에서 지내라니.
그나마 황성이면 다른 사람들 시선도 있고, 드물게 레안이 말려주기도 하고, 그도 나름 절제를 하고. 하지만 만약 무인도에서라면.
애초 무인도 자체만 해도 위험한데. 더 위험한 류와 함께라.
정말 갑자기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차라리 레안과 함께 하고픈 맘이었다.
“큭, 왜그러냐. 난 재밌을 것 같은데?”
하륜 역시 카룬과 같은 생각인 듯 카룬의 말에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쳤냐? 그게 재미있게? 그리고 니들이 한번 청룡단 와서 단장 새끼랑 같이 지내봐. 그런 말 나오나!”
하륜과 카엘은 다른건 몰라도 류와 함께 지내야 한다는 사실 만큼은 리엔의 심정이 깊게 이해가 갔다. 솔직히 그들의 상사는 그래도 저렇게 막 사람을 심하게 괴롭히지는 않으니. 아니, 사람을 괴롭히는 맛으로 살아가지는 않으니. 라이너는 애초 무심해서 왠만해선 잘 건드리지 않고, 라힌 역시 크게 기사들에게 관심을 쏟지 않았기에 단장에게 괴롭힘 당하는 리엔의 고통을 알 수는 없었지만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었다.
뭐, 어쩌면 애초에 괴롭힘 당하는 것 자체가 리엔이라 가능한 거 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자자고~ 내일 고생 할 텐데 미리 쉬어둬야지.”
카엘이 즐거운 듯 웃으며 말했고, 그에 리엔이 투덜거리면서 침대에 누웠다.
다음날.
리엔은 잠을 설쳤는지 핼쑥한 모습으로 류와 다른 청룡단 기사들과 함께 무인도로 향했다. 그 모습을 하륜이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들을 배웅하러 온 레안을.
이제 일주일 동안은 못 볼려나. 매일 몸 체크를 위해 레안을 봤던 하륜은 새삼 그녀를 일주일 동안이나 못 본다고 생각하자 괜스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을 느꼈다.
그때 하륜의 시선을 느꼈는지 레안이 하륜을 바라보았고, 둘의 시선이 잠깐 맞닿았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다. 이내 레안이 시선을 돌렸고, 황성을 떠났다.
순식간에 무인도에 도착한 리엔은 확연하게 변한 풍경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 무인도라더니, 이건 무슨 귀신의 섬도 아니고!
분명 녹색의 우거진 숲이나, 파란 하늘을 보면 자연적인 분위기의 소풍 온 기분이 들 수도 있겠지만 미묘하게 깔린 음울한 분위기나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눈을 빛내는 마물을 보자니 절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무슨 오자마자 마물이야! 그것도 무인도에!
애초에 놀러간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지만 쉴 틈도 주지 않고 바로 사건이 생기자 리엔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그래도 피곤한데.
하지만 어쩌랴.
리엔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묵묵히(?) 검을 빼들었다. 그리고 쓸데없이 기세 싸움도 하기 귀찮아 바로 나무들 속에 숨은 마물 하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에 잠시 검을 빼들고 상황을 살펴보던 청룡단 기사들도 얼결에 그를 따라 마물들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마물들과 청룡단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런 기사들의 상황과는 대조되게 류와 이안은 꽤나 느긋했다. 이안이야 늘 그렇듯 이번엔 나무 위에 올라 자고 있었고, 류는 그 옆에서 재밌다는 듯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강한 마물이었다면 이렇게 느긋하게 구경을 하지 않고 도와주었겠지만, 저 마물들은 끽해봐야 B급에서 C급의 족제비일 뿐이었다.
그리고 기본 A급 이상의 실력을 가진 기사들을 손쉽게 마물들을 처리했다. 하지만 다소 많은 양 때문인지 그들의 상태가 완전히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적당히 지쳐 보인달까?
“자, 그럼 신고식도 했고, 잘 곳 찾아보자!”
홀랑 나무 위로 올라가서 구경 한 주제에. 리엔이 삐죽이는 시선이 류를 향했다. 그러나 류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보다 리엔. 이안, 또 자니까 네가 좀 업고와. 알았지?♥”
그럼 그렇지.
이젠 제법 익숙해진 리엔이 그저 아주 살짝 입을 삐죽이며 나무에 올라 이안을 대충 던져 나무에서 내려놓고는 등에 업었다. 얼마나 곱게 자는지, 나무에서 떨어졌음에도 전혀 깨지 않고 잘 자고 있는 이안이었다.
하아.
리엔의 입에선 거친 숨이 나왔다. 안그래도 이 짐 업고 있는 것만 해도 힘든데, 도대체 얼마나 쳐 걷고 있는 건지.
거기다 묘하게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리엔이 인상을 찡그렸다.
“킥, 너 많이 힘들어 보인다?”
나름 청룡단 넘버3인 첸이 싱글거리며 리엔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리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을 못 자 피곤한 상태에서, 마물이랑 싸우고, 이안 업고, 온 종일 걷느라 대답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첸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앞서 걸어갔다.
“어, 찾았다! 동굴! 그럼 제군들! 동굴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으세~”
묘하게 즐거워 보이는 류의 모습을 보며 리엔은 괜스레 불안함을 느꼈다. 특히나 그렇게 오래 걸었음에도 연신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혹시 일부러 계속 못 찾은 척 걸어간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류의 리드와 함께 기사들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고, 막 자리를 잡고 쉬려는 그들의 귀에 미묘한 소음이 들렸다.
하아.
리엔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이면, 호랑이가 있는 동굴인데!
이거 다 짠 거 아니야?
리엔의 불신이 담긴 시선이 류를 향했다.
“아참, 리엔! 리엔은 특별히 이안 잘 달고 싸워! 괜히 구석에 쳐박혀서 자다가 싸움에 휘말려 다치면 어떡해?”
자기가 언제부터 그렇게 친절했다고 이안을 걱정하는 모습에 리엔은 코웃음을 쳤다. 특히나 저건 뭐하자는 수작인지, 귀여워 보일려고 하는 것 같....지 않지만 찡긋하며 베시시 웃는 류의 모습에 리엔은 어이가 없었다. 맛있게 먹은 아침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랄까.
어쨌든 싸움에 용이하게 하기 위해 등에 업고 있던 이안을 어깨에 걸치며 아직 채 피도 마르지 않은 검을 꺼내 들었다.
그보다 왜 자신이 이녀석을 보호해야 되는 거야? 깨워서 같이 싸우면 되는 거잖아!
그러나 이미 싸움이 시작된 후였고, 지금 깨우기엔 그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아까와 달리 꽤 강한 마물이었기에 한 마리 한 마리 처리하기가 힘들었다. 족제비에 비해 시간도 훨씬 많이 걸렸고. 특히나 어깨에 걸친 이안 때문에 몸놀림도 다소 둔해져있고, 이안이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마물의 공격을 피할 때 크게 피해야 하다 보니 공격 한번 하기가 상당히 힘이 들었다.
그래도 다행히 S급 호랑이는 없는지, 아예 상대 못할 정도로 버거운 마물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그러나 신은 절대 리엔의 편이 아닌지, 미처 리엔이 S급 호랑이가 없다 하며 좋아할 때 쯤, 지금까지 상대한 호랑이에 비해 상당히 큰 몸집의 S급 호랑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도대체 어떡하지?
도움을 요청할까 란 생각으로 주변의 동료들을 바라보니 저마다 호랑이들을 상대하느라 바빴다. 그나마 제일 한가할 것 같은 류는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자신이 혼자 싸워야 한다는 생각에-물론 이길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시간 벌기 정도?-괜히 암담해졌다.
몇 번의 공격이 있었을까. 리엔은 급격하게 체력이 달리는 것을 느꼈다.
가까스로 공격을 피하며 숨을 고르던 리엔은 결국 다리가 풀려 자리에 주저 앉았고, 그 틈을 놀려 호랑이가 거대한 몸집을 일으키며 앞발을 들어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휘두르고 있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싶은데, 싹둑하는 소리와 함께 눈 앞에 호랑이의 앞발이 보였다.
뭐지?시선을 돌리니 어느새 일어난 이안이 멍한 표정으로 호랑이를 벤 후 검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렇게 S급 호랑이를 처리한 이후, 전체적으로 상황이 정리되었고, 그제서야 류가 어슬렁거리며 모습을 보였다. 그 뻔뻔한 꼬라지에 리엔이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체력이 없었기에 그냥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 옆을 이안이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그럼 우리 이걸로 저녁을 먹을까?그러고 보니 어느새 저녁이던가.
“어, 저, 마물로요?”
하민이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으로 류에게 되물었다. 그 물음이 그제야 리엔도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 채곤 경악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마물로..
물론 여기서 과연 뭐 먹을게 있을까 싶긴 하지만.
“응! 자자, 그럼 준비하자고~”
류의 말에 몇몇의 기사들이 반박을 하려 했지만 웃음 속에 숨겨진 은근한 살기에 꼬리를 내리며 말없이 적당히 상처를 입고 죽은 호랑이들을 골라 손질을 하기 시작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