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그들의 오붓한 외출.
“다음주에 황실 기사단의 정식 기사단 입단식이 있습니다.”
아아. 그러고 보니. 5월 승급 심사 후에 정식 기사단 입단식이 있었지.
워낙 들쑥날쑥 필요할 때 그냥 신입 기사를 받곤 했기 때문에 정식 기사단 입단식을 치룬 적이 거의 없던 레안은 그제서야 입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뒤이어 신입 기사들의 제복을 미처 맞추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훈련만 하느라 정식 모임 같은 것을 참가할 일이 없었기에 미처 제복을 맞춰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애초에 제복을 입을 일은 일년에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으니까.
새삼 고작해야 입단식을 위해 제복을 맞춰야 한다는 사실에 레안을 귀찮았다. 분명 황실 전용 재단사 불러다가 이것저것 뭐하고 저것하고 귀찮을 텐데.
레안의 성격으로 그녀의 휘하에 있는 기사단들도 레안의 취향과 성격에 맞추게 되었는데 그로인해 보통 승급 심사나 임무를 수행 할 때 입어야 하는 제복을 황제를 만날 때만 입게 되었다. 그러므로 즉, 이런 몇 년에 할까 말까한 입단식 말고는 제복을 입을 일이 없다는 말이었다.
굳이 황실 재단사 불러서 해야 하나.
그냥 대충 수도에 나가서 괜찮은 재단사 붙잡고 해달라고 하면 안되나? 그러면 치수만 재면 끝인데.
쓸데없이 누구 서명 받고, 누구 지시 받고, 일정 밀리고 그런 일 따위 안 생길 텐데.
“아아, 알았어.”
생각에 골똘히 잠기는 레안의 모습에 카인은 뭔가 불안함을 느꼈다. 보통 저러면 무슨 일이 생기던데.
하긴 뭐 상관없을려나.
근위기사단이나 황실기사단이나 둘다 황실 소속의 기사단이라는 것은 같았지만 거의 별개라고 봐도 무방하였기에 황실 기사단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근위기사단에 피해가 올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카인은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물론 자신이 뭐라고 말을 한다해서 들을 사람도 아니고.
그보다.
“저번에 보내주신 현무단 단장말입니다.”
문득 떠오른 듯 카인이 나가다 말고 멈춰서 입을 열었다.
카인의 말에 레안이 뭐,라는 뜻을 담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덕분에 저희 기사 4명이 단장의 손에 부상을 입어 지금 요양 중입니다. 이에 대한 피해 보상은 정식으로 서류로 작성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빌어먹을.
카인의 말을 들은 레안의 표정을 잔뜩 찌푸려졌다.
라힌을 보낼 걸 그랬나.
괜히 라이너를 보내 더 귀찮게 되었다는 생각에 레안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분명 이 일로 저 칼 같은 카인이 잔뜩 조건을 제시할 것이 분명했기에.
하긴 이 일의 원인 라이너니, 모두 라이너에게 넘겨버려야지.
애써 가볍게 생각한 레안은 그것보다 지금 당장 닥친 귀찮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가볍게 노크와 함께 들어간 레안은 어이없는 상황에 인상을 찌푸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도대체 어쩌자고 저 짓거릴 하고 있는 건지.
“유라인.”
묘한 신음소리로 어우러진 공간 속에 레안의 살벌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에 레안이 들어온 지도 모르고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던 이들은 황급히 떨어졌고, 시녀로 보이던 여자는 얼굴을 붉히며 집무실을 나갔다.
“왠일이야?”
자신만 보면 화가 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히스테리를 부리는 그녀였기에 한번도 스스로 자신을 찾아온 적이 없던 레안이 자발적으로 자신을 찾아오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가끔 어떤 요구라던가, 거절을 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적이 몇 번이 있긴 했었지만.
이번엔 마땅히 그럴 만한 일이 없는데?
“앞으로 황실 기사단의 제복은 그냥 따로 맞힐게.”
“흐음?”
유라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행동이 역겨워 레안은 더욱 살벌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황실 재단사 거쳐서 하기 귀찮으니까 그냥 내가 알아서 맞춘다고. 어차피 별로 되지도 않은 인원인데 그것 때문에 불려다니면 그 재단사인지 뭔지도 귀찮을 것 아니야.”
원래 말을 길게 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황제였기에 그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친절히 설명을 덧붙였다.
“거절한다면?”
약점이라도 잡은 듯 유라인이 빙글거리며 웃었다.
그 미소에 레안의 인상은 더없이 구겨졌다.
이래서 오기가 싫었다고.
뭔가를 요구하거나 부탁할 때마다 지가 우위에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꼬라지라니.
“거절해. 그럼 입단식에 그냥 사복 입고 가지.”
이번엔 레안의 말을 들은 유라인의 얼굴이 구겨졌다.
쳇. 좀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건만.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자신이 거절해서 레안의 말대로 황실 기사단의 기사들이 사복을 입고 오면 분명 귀족들이 반발할 것이다. 안그래도 레안의 태도에 불만 많은 늙은이들이니 그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런 꼴을 본다면 트집을 잡아 깍아내리려 할 것이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때가 기회다 하고 레안은 당장 기사단 단장을 때려칠 것이다.
절대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얼마나 힘들게 설득해서 단장직을 맡겨 놓은 것인데.
대륙 전체를 뒤져도 절대 레안만큼 강한 사람을 구할 수 없으리라.
“좋아. 대신 황실 재단사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실력 있는 재단사여야 되. 안그럼 귀찮아질 테니까.”
그 역시도 귀찮은 건 딱 질색이었기에 쓸데없는 귀족들의 분란을 없애고자 레안에게 제안했다. 그 말에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던 레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이번 신입 세명이나 받았다던데. 그것도 네가 먼저 스카웃했다던데. 어떤 애들이야?”
“기다려. 그럼 알게 되.”
이렇고 저렇고 말하기엔 너무도 귀찮았기에 레안은 대충 말을 던지곤 집무실을 나갔다. 성의 없는 레안의 대답에 유라인은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잠겼다.
집무실을 나간 레안은 신입들을 데리고 제복을 맞추러 가기 위해 신입들을 찾으러 나섰다.
레안의 손에 붙들려 온 하륜과 카엘은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모습에 잠시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 큰 성인이 다른 성인에게 업혀서 달리라고 소리치는 장면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보기에 심적 타격이 컸다. 거기다 그 성인을 업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친구고 애들 업듯이 업고서 머리카락이 잡혀 운동장을 마구 달리고 있는 모습은 안쓰러우면서도 충격이 컸다.
충격을 받은 것은 레안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들을 끌고 온 레안의 몸이 굳어져 있었다. 어이없는 상황에 카엘이 애써 웃으며 농담을 던지며 다가갈려는 찰나, 그의 몸 곳곳을 찔러오는 미묘한 살기에 카엘은 순간 멈칫했다.
“아무래도 이거 충격이라기 보다 화난 것 같지?”
“그런 것 같네.”
그 역시도 살기를 느낀 건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류.”
나지막한 목소리가 레안의 입에서 흘러나왔지만 너무도 작았기에 미처 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리엔 놀리느라 신경을 쏟은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 나지막하지만 공간을 울리는 레안의 목소리를 못 들은 것이겠지.
자신이 나타났음에도 여전히 신난 류의 모습에 레안이 그저 살풋이 리엔에게 다가가 류의 머리 끄댕이를 잡고 끌어내렸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류는 당황하며 바닥에 떨어졌고, 갑자기 가벼워짐에 리엔은 갸웃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레안님!!”
엉덩이가 아픈지 엉덩이를 부비며 소리치는 류의 모습에 레안은 빠직 마크가 새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리 자신이 관대하다지만 저 꼴은 도대체. 남들의 시선 따위 상관 안 한다해도 이건 좀 아니다, 정말 아니다.
도대체 뭐하자는 짓인지.
“네가 원래 그런 성격인 것도 알고. 너한테 그녀석 넘겨준 그 순간부터 달달달 괴롭혀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내가 허락한 건 훈련으로서지, 너의 장난을 묵인한 것이 아니야. 거기다 정 놀고 싶으면 다른 사람들이 안 보이는 곳에서 해. 네가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데, 그녀석을 네 하인으로 준 게 아니야. 황실 기사단의 기사로써 청룡단에 배정한 거야.”
오늘 참 말 많이 하는구나.
별 시답잖은 일 가지고 이렇게 말을 많이 해야 한다는 사실이 레안은 무지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어쩌랴. 저 멍청이가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않는 것을.
“쳇. 이 정도는 상관없잖아요.”
“네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는 끼치지 말라는 거야. 내 썩어가는 안구 어쩔거야?”
정말 문제는 그거였던 걸까.
한자한자 내뱉는 그녀의 말에는 또렷이 진심이 담겨 있었다.
자신을 구해주려는 거구나 싶던 리엔은 이내 그럼 그렇지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너, 따라와.”
리엔을 가르킨 레안은 무뚝뚝하게 말했고, 쌩뚱맞은 말에 리엔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레안은 인상을 찌푸리며 류를 발로 차며 리엔에게 다가와 그의 목덜미를 잡고 황성을 나섰다.
황성 앞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레안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간 리엔은 레안이 목적하던 곳에 도착함과 동시에 거칠게 내팽겨졌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다짜고짜 붙잡혀와 던져진 상황에 리엔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러나 레안은 상큼히 그를 무시했다.
“얘들 옷 좀 맞춰. 디자인은 이대로 하고.”
레안이 내민 종이에는 황실 기사단의 제복이 그려져 있었다. 이를 알아본 재단사가 감격어린 표정을 지었다.
“괘..괜찮겠습니까? 제가 만들기엔..그..뭐랄까..조금.. 문제가...”
후대에 두고 두고 길이 남을 사건이지만 자신이 알기론 황실 소속의 기사단 제복은 황실 재단사가 만든다. 그런 것을 만약 자신이 만들다가 무슨 일을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 그였다. 그럴 것이 혹시나 황실 기사단의 제복 디자인이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가 어줍잖은 용병이나 기사들이 황실 기사단의 제복을 입으며 황실 기사단인척 사칭하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황실 기사단은 바로 황실의 왕족과 같았으니까.
동시에 저 어려 보이는 여자를 보니 황실 기사단이 아닌 것도 같고.
재단사의 걱정을 느꼈는지 레안이 품에서 황실 기사단의 단장임을 나타내는 증표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유라인이 작성해준 황실 기사단의 제복을 이번만 특별히 다른 이가 재단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서류를 보여주었다.
떨리는 몸으로 레안이 내민 것을 확인하며 그를 향해 존경의 시선을 던졌다. 물론 얼핏 들리는 얘기로 황실 기사단의 총단장이 어린 애라는 사실을 듣긴 들었지만 설마 진짜로 꼬맹이일 줄은 몰랐기에 레안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경악도 같이 서려 있었다.
“제복은 언제까지..?”
“이번주 안으로.”
“저기.. 그런데.. 그 제가 알기론 황실 기사단의 기사들의 제복 문양엔 마나가 들어가야 한다고...”
어설픈 재단사들이 황실 기사단의 제복을 만들 것을 염려해 제복의 문양엔 황실에서만 쓸 수 있는 마나가 담긴 실을 썼는데, 안타깝게도 그에겐 그 실이 없었다.
비록 이 디자인대로 만든다고 해도 황실 재단사가 만든 제복과는 다른 것이다.
“대충 문양 박아 넣어. 내가 따로 마나 넣으면 되는 거니까.”
굳이 마나가 없는 실이라도 박아 넣고 난 후에 실에 마나를 담으면 되는 것이었기에 레안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하지만 재단사의 표정은 영 미덥지 않았다.
“그러나.. 마나란 것은.. 으레 해당 분야의 장인들만 가질 수 있는 것으로써.. 애초에 마나만을 따로 꺼내 담는 다는 것이..”
그랬다. 마나란 의도치 않게 자연스레 담기는 것으로써 의도적으로 마나만을 빼어 다른 곳에 담는다는 것은 무리였다.
“난 가능해. 그러니까 그냥 만들어.”
레안의 강압적인 말에도 재단사는 불안한 듯 눈을 굴렸지만 레안이 내비치는 살기로 인해 재단사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하륜들의 사이즈를 쟀다.
“먹어.”
제복을 맞추러 가느냐 훈련을 빠진 것만 해도 그들에겐 기쁜 일이었건만 친절히 밥까지 사주는 레안의 행동에 그들은 감격스런 표정을 지었다.
내내 황성에서만 지내느라 바깥 음식을 먹어본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레안이 같이 있는 것을 불편하다 여길 틈도 없이 리엔은 거지마냥 마구 음식들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하륜과 카엘은 다소 어색한 미소를 레안에게 보냈다.
그러나 레안은 신경 쓰지 않는지 묵묵히 식사를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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