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그래도 우리는 뛴다.
“아이고, 죽겠다.”
밤새 술이 마신 탓인지 정신이 깨고 나서도 머리를 찌르르 울리는 통증에 카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은 하륜과 리엔도 마찬가지인지 저마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특히 레안을 욕하며 에이스와 술을 마시다 불시의 습격으로 기절까지 한 리엔은 더 상황이 안 좋아보였다.
그 모습에 하륜은 양심의 찔림을 느끼며 애써 무시했다.
“여어, 다들 왔구만.”
백호단의 최고 연장자라는 카를로스가 그들을 바라보며 큰 손을 휘이 내저었다.
“안녕하십니까.”
술 때문에 머리는 찌르르 울렸지만 그렇다고 선배를 보고 인사를 안 할 수 없다는 생각에 하륜은 재빨리 인사를 했다. 흐트러짐이 없는 그 모습에 옆에서 보던 리엔이 혀를 내둘렀다.
“괜찮아?”하루만에 부쩍 야위어진 에이스가 하륜 패거리들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런 그의 말에 하륜 패거리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괜찮지 않음을 표현했다. (하륜은 씁쓸한 웃음으로, 리엔이 잔뜩 구겨진 표정으로, 카엘은 헛웃음으로)
“쯧, 힘내. 아마 우리 사정 봐주면서 훈련시키실 분들이 아니니 말이야.”
“빌어먹을. 애초에 난 그 꼬맹이 맘에 안 든다고.”
“응? 꼬맹이?”“그래, 그 망할 레....”크게 울려 퍼지는 리엔의 목소리에 카엘이 화들짝 놀라 리엔의 입을 막았다. 이 크기로 레안의 이름을 불렀다간 바로 레안의 귀까지 들어가 무슨 고생을 할 지 모르므로.
하아. 도대체 생각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그렇게 반항하다 온갖 개고생을 다 했으면서도 저렇게 고쳐지질 않는지.
카엘의 한숨에 하륜도 이해한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뒤풀이가 효과가 있었나보네요. 이렇게 다들 사이가 좋아지신걸 보니.”갑작스레 들리는 라힌의 목소리에 근처에 있던 백호단들은 일제히 움찔 거렸다. 특히 레안을 꼬맹이라 불렀던 리엔은 더 격렬하게 움찔거렸다.
“리엔군은 뭔가 잘못한 거라도 있던가요? 유난히 격하게 놀라시네요.”호..혹시 들은건가?
아까까지만 해도 거칠게 없었던 리엔은 라힌의 말에 급격하게 소심해졌다. 비록 자신이 아무리 레안을 꼬맹이라 생각하고 미워한다지만 그것과 별개로 레안과 라힌은 너무도 무서운 존재였으므로.
“그럼 오늘도 열심히 훈련을 해볼까요? 다들 상태가 안 좋아서 무사히 따라올 수 있을지 걱정은 되지만 말이에요.”
잔뜩 쫄은 리엔의 모습을 사뿐히 무시한 채로 라힌이 상큼하게 내뱉었다. 그 모습에 못 들었구나, 하고 안도하던 리엔은 살포시 자신을 노려보는 라힌을 확인하곤 이내 자신의 헛된 착각을 접었다.
그럼 그렇지.
겨우 오전의 훈련이 끝나자 지친 몸을 이끌고 하륜패거리는 근처에 있는 나무 그늘에 앉았다. 그런 그들의 곁으로 뒷풀이 후로 친해진 에이스와 카를로스, 휴가 다가왔다.
“훈련은 할 만해? 꽤 힘들텐데..”
에이스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도 오랜 시간 훈련을 받아서인지 에이스와 그들의 상태는 비교적 편안해보였다.
“그래도 며칠 동안 속성으로 훈련을 받아서 그런지 다행히 오늘은 견딜만 합니다.”
“견딜만하기는!! 물론 전보다는 확실히 강도가 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다고!!”
“큭, 뭘 더 바라냐.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애써 담담한 척 말하는 카엘이었지만 미묘한 씁쓸한 표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흐음? 꽤 고되게 당했나봐?”
카를로스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저 A급 멧돼지와 달리기를 하고, 단장님이 던지는 단검 좀 정신없이 피하고 절벽 기어오른 정도입니다.”
싱긋 웃으며 하륜이 말했다. 그 말에 뭐가 그 정도냐, 하고 리엔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표정을 지었다.
“크, 지독하구만.. 보통 그렇게까지 극악하지 않은데.. 꽤 마음에 들었나본데. 안그러냐?”카를로스가 옆에 있던 휴의 옆구리를 팔로 툭치며 물었다.
“원래 극악했어. 물론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녀석들한테 저 정도로 막 대하진 않았지만.. 그래봤자 악마야. 씨X."
"원래는 안 그렇습니까?“
카엘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우며 물었다.
“그 정도는 아니었어.”
“허!! 애초에 우리를 백호단에 입단시킬 때부터 알아봤어!!! 결국 우리만 죽어라 뺑이 돌렸다는 거잖아?”
리엔이 분한 듯 씩씩 거렸다. 그 모습에 에이스가 평소의 싱글 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리엔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다 애정이 담긴 거야.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 화가 나긴 하지만 레안님은 맘에 드는 녀석들한테 특히 더 강하게 훈련을 시키거든. 그러니까 힘내. 그래도 덕분에 이렇게 훈련에 쉽게 적응했잖아?”
담담한 듯 말하는 에이스의 말에 리엔은 마음에 안 드는 듯 인상을 더욱 찌푸렸지만 그래도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는 하는 듯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 슬슬 가볼까? 쉬는 시간도 끝난 듯 한데 말이야.”카를로스의 말에 일행들은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제법 잘 버티지?”
남몰래 하륜 패거리들을 구경하던 레안이 곁에 있던 바론에게 물었다.
“뭐, 그렇네요. 솔직히 저 같았으면 안 한다고 뛰쳐나갔을 겁니다.”
“그래?”
바론의 투덜거리는 듯한 말에 레안이 하륜 패거리들을 향하던 시선을 바론에게로 돌리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정도에 뛰쳐나갈 거라고 말하는 걸 보니 아직 덜 당했나보네? 감히 내 앞에서 백호단을 나갈 거라는 이야길 하다니 말이야.”흠칫.
“그냥.. 예를 들어 그렇다는 거지, 누가 그런 답니까?”“그래? 진심으로 들렸는데?”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뭐, 그래. 대충 넘어가지.”
겨우 넘어가는 듯한 레안의 말에 바론은 겨우 한숨을 돌렸다.
‘죽는 줄 알았네.’
그때 똑똑 거리는 조그만 노크 소리가 들리며 청룡단 단장인 류가 들어왔다. 갑자기 들리는 노크소리에 뒤를 돌아보던 바론은 류를 확인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저 제국 최고의 트러블 메이커가 돌아오다니..’
“뭐야? 왜 날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려? 내가 싫은거야?”
용케도 바론의 표정을 읽었는지 류가 기분 나쁘다는 듯 입을 삐죽이며 바론을 향해 물었다. 그의 물음에 서둘러 표정을 핀 바론은 뭐라 대답할 지 몰라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성격 상 싫은걸 좋다고 말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네, 싫습니다. 라고 말하기엔 그의 앞으로의 기사 생활을 장담할 수 없으니 그로서는 그냥 우물쭈물 하는 것이 최선의 행동이었다.
“오자마자 애한테 시비 걸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하고, 없으면 조용히 나가.”
“쳇, 레안 님은 맨날 나한테만 뭐라 그래.”“미친 놈. 할 말이나 해.”
“백호단에 신입 셋이나 들어왔다면서요?”
“그런데 뭐?”“한명만 줘요.”
류의 말에 레안이 잠깐 류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류가 살며시 움찔거렸다. 딱히 레안에게 잘못한 것은 없었지만 레안이 저렇게 쳐다볼 때마다 잘못한 것이 있는 거 마냥 괜스레 찝찝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보고.”
“쳇, 고작 한 명 가지고...”“네 놈, 그저 신입이라니까 가져보고 싶은 거잖아? 인원 부족도 아니고 그냥 흥미로 달라는 거에 굳이 줘야 할 필요성은 안 느껴지는데?”레안의 말에 정곡을 찔린 류는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그래서 그냥 입술을 삐죽이며 쳇쳇,거렸다. 그 모습이 거슬려서 레안이 살기가 담긴 눈초리로 째려보자 이내 조용히 고개를 돌려 삐진 흉내를 냈지만.
“생각해보니 한명 괜찮은 녀석 있다. 어때, 그녀석이라도 가질래?”
“누군데요?”
툭하니 내뱉는 레안의 말에 급격하게 화색을 띠며 류가 물었다.
“있어, 꽤나 버릇없으면서도 근성 있는 녀석. 너랑 붙여 놓으면 꽤 재밌을것 같네.”
레안이 하륜 패거리 중 한명을 떠올리면서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바론은 움찔 거리며 레안이 말한 녀석을 향해 동정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레안 님이 상대를 생각하며 저런 표정 지을 땐 꼭 길을 가다 SS급 마물을 만나는 것 만큼 재수없는 일을 겪게 되던데.. 누군지 몰라도 운이 없네.
레안과 류가 미묘한 거래를 하고 있을 때, 하륜 패거리는 오후 훈련에 시달리다 잠깐의 휴식 시간 속에 쓰러지듯 무너져 겨우 숨을 돌리고 있었다.
역시 아무리 며칠 전의 훈련보다 강도가 낮아졌다고 해도 괜히 황실 기사단의 훈련이 아닌지 꽤 강도가 있는 훈련에 하륜 패거리는 잔뜩 지친 몸을 느꼈다. 물론 그래도 확실히 며칠 전 같은 폐인에 가까운 상태는 아니었지만.
“크, 황실 기사단 되니까 어떠냐.”
“글세. 훈련에 찌들어 있는 상태라.. 하지만 꽤 마음에 들어. 이렇게 지쳐보기도 처음이니.”
“확실히 그렇긴 하지. 뭐, 훈련은 꽤 힘들긴 하지만 나쁘진 않아.”
하륜의 담담한 대답에 카엘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런 그들의 대화에 리엔이 불만인 듯 표정을 찡그렸다.
“마음에 들긴 뭐가!! 아주 힘들어 죽을 지경이구만. 그냥 근위 기사단에 들어가면 될 걸. 굳이 황실 기사단을 지원해가지곤..”
“하지만 솔직히 너도 여기가 마음에 들잖아? 네녀석 성격 상 근위 기사단처럼 널널한 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 아니냐?”
카엘의 말에 리엔은 정곡을 돌린 듯 애써 딴청을 하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에 하륜이 피식 거리며 웃었다.
“너네가 백호단 신입 기사야?”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 류가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낯선 타인의 모습에 하륜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게 아주 미미해서 별로 티가 나진 않았지만.
“넌 뭐야?”
훈련 때문에 잔뜩 지쳐있던 상태인지라 뾰족하게 날이 서있던 리엔이 퉁명스레 되물었다. 그런 리엔의 말에 카엘이 앗, 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하지만 그런 카엘의 반응과는 대조되게 리엔의 물음을 받은 류는 굉장히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빛냈다.
“청룡단 단장인 류. 자, 내가 물음에 답했으니까 이제 그 쪽이 대답해야지.”청룡단 단장이라는 류의 말에 리엔은 흠칫 굳었다. 무심코 퉁명스레 대답했지만 설마 자신보다 높은 계급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저 쉬워 보이는 겉모습 때문에 더 그랬던 건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당황하는 리엔의 모습에 하륜이 한숨을 내쉬며 대신 대답했다.
“그렇구나. 레안 님이 꽤 쓸만한 녀석들이라고 하던데..”
“그랬습니까? 다행입니다. 훈련을 잘 따라가지 못해 방해나 되지 않을까 했는데 말입니다.”
하륜이 웃으며 답했다. 그 옆에서 리엔은 쓸만하면 쓸만 한거지, 꽤 쓸만한 녀석은 뭐야. 거기다 쓸만 하다니, 우리가 도구도 아니고. 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류는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재밌는 녀석이라길래 어떤 녀석인가 했는데 이거 완전 내 스타일인데?’
앞으로의 생활에 대한 생각에 황홀한 미소를 짓는 류의 모습을 보며 하륜은 왠지 모를 오한을 느꼈다. 특히 리엔은 갑자기 소름이 돋는 듯 팔을 마구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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