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또다시 시작되는 불길한 징조
아무리 예상했다고는 하나 역시 생각과 현실은 다르다고 막상 훈련을 받으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용의 피를 받아들인 덕분에 이전에 비해 체력이 월등히 좋아졌다고는 하나, 아직 그 피로가 풀리지 않았고 상처가 완전히 나은 것이 아니라 레안의 훈련은 하륜이 견뎌내기엔 다소 힘들었다. 하지만 용케 쓰러질 정도의 강도는 아닌지라 어설프게 엄살을 부리지도 못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합니까?”
하륜이 점점 쳐지려고 하는 팔을 느끼며 레안을 향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흔들리면 두배로 더 얹을 테니까 알아서 해.”
지금도 충분히 무리인 건만 여기서 더 늘린다는 말에 하륜이 찔끔했다. 아무리 그라도 검날 위에 돌을 얹어놓고 돌 떨어지지 않게 균형을 유지하며 몇시간 동안 있는 것은 정말 무리인데. 티가 나지는 않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모습이 슬슬 한계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그 모습을 레안이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고작 그 정도도 감당하지 못해서 어떻게 하려고? 융합 견뎌내길래 정신력 하나는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거 쇼였냐?”
하아. 레안의 말에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하륜이 애써 웃으며 자세를 유지할 뿐이었다. 그러나 결국 하륜의 팔의 떨림이 점점 심해지며 검날 위에 올려져 있던 돌이 툭 떨어졌다.
“병신.”
그것 밖에 안되냐는 듯 바라보면서도 그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지 바로 화낼 줄 알았던 레안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밥이나 먹어. 바로 한 시간 후에 다시 훈련 들어갈 테니까 늦으면 살아있는 지옥이 뭔지 알게 해주지. 아, 이미 겪어서 그 정도는 아무렇지 않을려나?”
비꼬듯 말은 내뱉던 레안은 하륜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휘리릭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륜은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역시 레안의 훈련은 상상이상이었다.
“큭, 괜찮냐?”
고작 몇시간 만에 핼쑥해진 것 같은 하륜의 모습에 카엘이 걱정스레 물었다.
“이 정도야. 처음에 견습기사로 와서 훈련 받았던 것보다는 훨씬 낫지.”
하륜의 말에 새삼 그때를 생각한 카엘은 치를 떨었다. 지금도 그리 좋은 상태의 훈련이라고는 볼 수 없었지만 진짜 그때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해질 정도로 훈련의 강도는 최악이었다. 어쩌면 지금 그들이 신입기사임에도 기존의 다른 기사들에 비해 꿀리지 않고, 잘 적응하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일부러 그런 것일까?
“그래도 어째 힘들어 보인다?”
뭐, 그때보다 낫다고 해도 그것이 훈련이 만만하고 쉽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하륜이 다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류의 괴롭힘을 또 한바탕 받고 온 리엔이 인상을 찌푸리며 하륜과 카엘이 앉아있는 자리로 다가왔다.
“배신자들. 기다리지 않고 먼저 가버리냐?”
또 얼마나 굴림 당한 것인지 온 몸이 흙투성이인 리엔이 삐죽이며 말했다.
“큭, 귀엽기는. 재밌게 놀다 왔냐?”
“넌 이게 노는 거냐!!”
카엘의 말에 욱한 리엔이 소리쳤다. 그러나 카엘이 능글맞게 웃을 뿐이었다.
“넌....참..”
화내봤자 반응도 없는 카엘 덕에 팩하며 하륜 쪽으로 시선을 돌린 리엔은 하륜의 몰골을 보며 동정심이 생겼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하륜도 참 힘들어보였다. 하긴, 그 레안과 함께하는 1:1 훈련이니 얼마나 힘들까. 어렴풋이 짐작 가는 그 고통에 리엔은 말없이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밥은 잘 먹었나?”
어째 걱정해주는 것이라고 보기엔 살짝 불안한 것이 하륜이 다소 망설이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생각하니 그리 잘 먹은 것 같지 않았지만.
“잘 됐네.”
짧게 대꾸한 레안은 어느새 그들 앞에 마련된 높이 50cm, 지름 15cm의 막대기를 바라보며 하륜에게 눈짓 했다. 무슨 말인가 싶어 잠시 갸웃하던 하륜은 설마 저기를 올라가라는 말인가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 올라가냐?”
역시나. 그의 예상이 맞았음에 하륜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다 절대 여기서 끝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거기서 떨어지면 죽는다. 그러니 죽을 각오 하고, 알아서 잘 피해라.”
그럼 그렇지. 불길한 예상은 절대 틀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하륜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서있는 것만으로도 아슬한데, 피하기까지 해야 된다니. 훈련하는 방법만큼은 정말 다이나믹하게도 만들어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검에 감각 둔해지는 독 발랐으니 왠만해선 안 닿는게 좋을 거다. 맞으면 맞을수록 둔해져서 결국엔 그대로 가버릴지 모르니.”
하아. 정말. 무덤한 하륜이라지만 점점 말을 꺼낼수록 더해지는 강도에 새삼 암담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오히려 갓 기사단에 입단했던 그 시절보다도 더 강도 높은 훈련일지도 몰랐다. 괜스레 점심시간에 카엘에게 처음 보다 낫다는 말을 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하아.
그의 입에는 자연스레 거친 숨이 내뱉어졌다.
그나마 땅에서는 운신 가능 지역이라도 자유롭지, 이것은 원 맘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칫했다간 떨어질 확률이 높았고, 그냥 떨어지면 바닥에 착지하는 것 아닌가 싶었던 하륜은 자신이 나무 막대기 위로 올라가자 주변 2m 반경에 닿기만 해도 뚫릴 것 같은 날카로운 송곳이 깔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정말 조금이라도 나태해질 틈은 주지 않는 그녀였다.
“5분 휴식.”
그래도 휴식을 준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되는 것일까? 이 좁은 공간에서 쉬어봤자 얼마나 쉴 수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쉬지 않고 내내 레안이 던지는 그 검더미에 파묻히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애써 자신을 달랬다.
그리고 5분 휴식이 끝나고, 이전보다 더 강력해진 위력의 단검들이 우수수 던져졌다.
“쯧.”
훈련이 끝나고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바닥에 쓰러진 하륜을 바라보며 레안은 혀를 찼다.
“약하기는.”
도대체 이 사람은 자신을 어디까지 과대평가 하는 것일까? 확실히 용의 피를 받은 후 이전보다 신체능력이 월등히 상승한 것을 느끼긴 했지만 레안의 훈련 강도는 그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을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아마 그가 아무리 강해진다 해도 평생 레안의 훈련은 힘들어하며 받을 것 같았다.
“그래도 나름 무리했으니, 이거나 먹고 뜨거운 물에 들어가서 지지든 말든 알아서 해.”
하여간. 저 뚱한 말투는 트레이드마크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 하륜이 피식 웃으며 레안이 던지 피로 회복제를 받아들었다. 그래도 나름 이런 것 까지 챙겨주는 것이 배려있다 싶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미처 표현하기도 전에 레안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빌어먹을.
레안은 유리안을 바라보며 표정을 와락 구겼다. 오랜만에 나름 카인을 봐서 반갑다 싶기도 하고, 많이 나아진 그의 모습에 그나마 다행이다 싶은 생각을 했건만 어째 들고 오는 소식이라고 하나같이 이 꼬라지인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레안의 시선은 이 순간 가장 얄미운 유리안에게로 향했다.
“음, 삐졌어, 레안?”
넌 이게 삐진 걸로 보이냐?
어이없음에 레안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 살벌한 분위기에 카인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그럼 말씀 전해드렸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밀린 일이 많아서 말입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고는 있었지만 유리안은 카인이 이 자리를 피하려 일부러 핑계를 대고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가 있어봤자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유리안은 흔쾌히 그가 방에서 나가는 것을 허락했다.
“빌어먹을. 이놈의 나라는 마만 잔뜩 꼈나.”
정말 어째 일이 줄어들지가 않는 것이 진심으로 짜증이 났다. 물론 이 모든 상황이 마룡이 원인이며, 어차피 마룡이 이미 벌여놓은 일도 있고, 하륜을 위해서라도 마룡을 죽여야 하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귀찮고 짜증이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특히나 그 일의 규모와 범위가 더욱 커져 죽음의 숲 까지도 영향을 미친 것은 아주 심히 짜증이 나는 일이었다. 그것까지는 그녀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꽤 오래전부터 마룡의 영향을 받아온 것인지 죽음의 숲 근처에 있던 마을 한,두개가 몰살되었다고 보고서에 나와 있었다. 어쩌면 워낙 외곽 지역이라 이제야 발견된 것이지 이미 그 예전부터 몰살되어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그보다 내가 보기엔 이거 다 마룡 때문 인 것 같은데, 그 마룡의 하트 가진 신입은 어떻게 됐어?”
감은 빨라가지곤.
레안이 뚱하니 속으로 중얼거렸다.
“처리했어.”
“냉정하네. 그 아직 풋풋한 신입을 죽여 버리다니.”
물론 그녀의 대답이 그런 쪽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말 저렇게 받아들이니 레안의 표정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죽인 게 아니라 해결했다는 말이야. 더 이상 마룡 때문에 그녀석이 영향을 받거나, 폭주할 일은 없을 거야.”
“그게 가능해?”
“어, 가능해.”
대답하기 상당히 귀찮아하는 그녀의 모습에 유리안은 괜히 심술이 솟았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은 이번은 참기로 했다. 괜히 여기서 레안을 놀렸다가 그녀가 폭발하면 유리안이 제일 많이 곤란할 테니까.
“아무튼 보고서를 읽었다 시피 그런 상황이라 황실 기사단의 조속한 조치가 필요해.”
제법 진지한 어조로 유리안이 말했다. 정말 순식간에도 변하는 표정이었다.
“이거 해결하려면 죽음의 숲에 들어가서 원인을 파악하고, 그 원인을 제거해야 된다는 사실은 알고서 그런 말 하는 건가?”
“뭐어.”
싱긋 웃는 그의 표정은 아주 많이, 매우 얄미웠다.
“짜증나는 녀석. 인원은 내가 알아서 꾸리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는 나도 모르니, 알아서 죽치고 기다리던가.”
말을 하고 나오는 레안의 표정은 떨떠름하기 그지없었다.
죽음의 숲이라. 그녀야 죽음의 숲에 들어가는 것이 큰 위험으로 다가오진 않지만 황실 기사단 녀석들은 분명 다를 터였다. 자신의 말을 들으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려나.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짓는 레안이었다.
- 작가의말
그렇죠, 그래도 하륜은 역시나 레안에겐.. 아래...
향란지몽 님/펜그렘 님/ 레드러너 님 댓글 감사합니다.
하륜은 융합을 끝냈지만 아직 완전히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라 강해진 모습을 보려면 좀더 시간이...
레안과 하륜의 개인 교습은 생각만큼 달달하지 않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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