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돌아온 그녀의 사건일지.
“죽을 것 같아.”
자체 치유력이 아주 훌륭하다 해도 마룡에게 당한 상처였기에 다른 때보다 치유 속도는 느렸다. 그래도 마룡의 기운에 묻은 독은 바로 해독이 된 터라 상처만 치유되면 되었기에 그나마 몸을 이끌고 움직일 수 있었다. 물론 워낙 휘황찬란하게 싸운 지라 상처 아물기를 기다리는 것만 해도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아무리 일반 사람들보다 치유 속도가 빠르다 해도.
모처럼 느껴지는 고통에 레안은 인상을 와락 썼다. 평상시에도 자주 인상을 쓰긴 했지만 상처로 인한 찡그림은 전보다 사나워 보였다.
특히나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 쉬고 싶다는 일념아래 삐그덕 거리는 몸을 무작정 이끌고 달려왔기에 몸 상태는 더욱 최악이었다. 지금 이 상태라면 누구 한명 자신의 몸을 건드리거나 말만 걸어도 당장이라도 목을 비틀어버릴 정도였다.
그랬기에 황성에 도착한 레안은 그대로 침실로 향했다. 널찍한 침대를 보니 그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 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레안은 씻는 것도 잊고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다음날 눈을 떠보니 해는 어느새 중천에 떠있었다.
워낙 잠이 많은 그녀였지만 그래도 오전에는 꼬박 일어났었는데 새삼 자신의 몸 상태를 인지하곤 늦게라도나마 몸을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대충 온도 조절제를 통해 물의 온도를 맞춘 레안은 적당히 차가운 물에 들어가 몸의 피로를 풀었다.
확실히 적당히 차가운 물 속에 몸을 담그니 피로가 풀리는 듯 했다. 잠도 솔솔 오는 것이 여간 기분이 좋은 게 아니었다.
“자버렸네.”
물 속이 너무 기분이 좋았던 탓일까.
금새 또 잠이 들어버린 레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다행히도 오래 잔 것은 아닌지 아직 해는 떠있었다.
만약 이대로 저녁이 되었다면 꽤 곤란했을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숙면을 취해 푹 쉰 탓에 기분이 상쾌해진 레안은 기지개를 피며 밖으로 나갔다.
“응?”
분명 평소와 다름 없는 황성이었건만 무언가가 달랐다. 기묘한 이질감에 레안은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누가 사고를 친 것이지.
하지만 우선 황제에게 보고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에 잠시 생각을 접어두고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몇 번의 노크소리와 함께 집무실에 들어간 레안은 유리안의 얼굴에 자리잡은 다크써클에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놀고 먹는 황제였기에 저런 피곤한 모습은 본 적이 없는데.
“왔네.”
답지 않게 말을 축 늘이는 것이 뭔가 일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뭐야?”
괜스레 불안한 마음에 자연스레 레안의 입에서 불퉁한 말이 나갔다.
“장로회에서 연신 불만이 들어오고 있어. 제발 황실 기사단 좀 말려봐. 나도 사고치길 좋아하지만 저건 감당 불가라고.”
정말 말 그대로였다.
유리안 역시 제이로 제국에선 사고뭉치로 통했다. 하지만 류처럼 생각 없이 날뛰지는 않았다. 비록 주변 사람들이 고개를 젓고 한숨을 내뱉을 정도로 장난치길 좋아하긴 하지만 수습은 할 수 있을 정도로 쳤다.
그래서 여지껏 황제의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류는 어떠한가.
평상시 정도만 쳤어도 이러진 않았을 텐데.
가끔 그도 류의 장난에 동참하곤 했었는데 이번 사건의 스케일은 너무도 컸다.
덕분엔 전 장로회의 불만은 물론이요, 황성의 모든 시녀와 하인들의 불만이 황성을 가득 채웠다.
심지어 사직서도 몇십통이나 날라왔을 정도이니.
“뭔 일인데.”
알 수 없던 이질감이 그때문이었던가.
레안이 급격한 기분 저조를 느끼며 되물었다.
이에 유리안이 친절히 그동안 일어났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레안이 없었던 동안 일어난 서바이벌 게임하며, 주방에서 재료 훔쳐와 바꿔오기, 황성 복도 리모델링하기 등 그동안 류의 지휘로 일어난 모든 사건들을 설명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나선 단장들로 인해 더욱 사건이 꼬였으며 지금 황실 기사단들의 상태는 서로 보기만 하면 이를 갈며 검을 휘두르고 있는 상황이라는 설명도 아주 자세히 말해주었다.
설명이 끝나자 레안의 표정은 더없이 싸늘해졌다.
그 모습에 유리안은 움찔하며 황실 기사단들에게 조의를 표했다. 저 표정을 할 때의 레안은 정말 살벌했기에.
황제의 집무실에서 나온 레안은 바로 즉시 황실 기사단들을 소집했다. 레안이 온 줄 몰랐던 기사들은 갑작스런 레안의 부름에 불안함 가득한 표정을 하고서 서둘러 훈련장에 모였다.
“단장이랑 부단장 새끼들 앞으로 나와.”
나름 위계질서를 뚜렷하게 생각하는 그녀였기에 한번도 기사들이 있는 앞에서 단장과 부단장에게 욕을 하진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살벌한 목소리에 단장들은 움찔하며 앞으로 나왔다.
“이 씹새끼!!”
앞으로 나오자마자 레안은 류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린 후 바닥에 내팽겨쳤다. 그리고는 바닥에 쓰러진 그를 마구 짓밟은 후 친절히 그를 일으켜 세웠다.
엉망진창이 된 그는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이안.”
잠시 류에게 꽂혀있던 시선을 돌린 레안은 이안의 이름을 씹어뱉듯 내뱉었다. 이에 드물게 멀쩡한 정신으로 서있던 이안이 움찔하며 앞으로 나섰다.
“나랑 싸울까?”
원래부터 주어와 목적어를 빼놓고 말하는 레안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무슨 의도일까 하는 생각에 이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새끼. 부단장이 왜있어? 단장새끼 사고치면 칠렐레 구경하라고 있는 줄 알아? 어?”
그런 뜻이었구나.
그제서야 레안의 말이 이해 된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타이밍을 잘못 맞춘 이안의 끄덕거림은 레안의 화를 부채질 했고 레안은 그녀의 무릎으로 이안의 안면을 가격했다. 이어 그녀는 이안의 머리카락을 잡고서 그의 배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에 이안이 비틀거리며 주저앉아 레안이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며 일으켜 세웠다.
점점 살벌해지는 분위기에 단장들 포함 기사들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뭐하자는 거야?”
“죄송합니다.”
그나마 가장 사고 덜 치고 얌전한 라힌이 정말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허리 숙여 잘못을 빌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화가 풀리기엔 류가 친 사고가 너무도 컸다.
“니들, 셋이잖아. 부단장까지 합치면 여섯 아니야? 그 여섯으로 저새끼 하나 감당 못해서 일을 이따구로 만들어?”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맞는 말이었다. 1:1이라면 모를까 3:1, 아니 6:1인데도 류를 말리지 못하다니. 오히려 휘말려 더 크게 사건을 만들다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상황이었다.
이에 드물게 라이너도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잘 드러나진 않지만 미미하게 죄송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한 한달 사라졌다 오면 아예 황성 폭발 시키겠다? 아니지, 옆 제국 놀러가서 전쟁이라도 일으키겠다?”
“그...그건 아니에요!!”
단번 아니라고 반박하는 류의 말에 레안의 시선이 싸늘히 류를 향했고, 레안의 발차기가 그의 얼굴에 직격했다.
“오늘 단체 훈련이다. 니들 창고 가서 가장 큰 통나무 여덟 개랑 5L짜리 물통 열여섯 개 가지고 와.”
레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단장과 부단장들은 서둘러 창고로 향했다. 레안에게 맞은 덕분인지 류와 이안의 뒷모습은 많이 어색하고 불편해보였다.
“니들 각 단 별로 두 줄로 서.”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키려는 걸까.
통나무를 들고 오라는 것을 보니 그걸 들라는 거겠지?
그런데 물통은 뭐지?
얼굴에 물음표를 가득 단 채로 기사들은 절도 있는 모습으로 두 줄로 섰다.
몇 분 후 단장들이 통나무와 물통을 가지고 왔다.
“저 줄 선 놈들 앞에 통나무 하나씩 냅두고, 물통에 가득 물 채워와.”
역시나.
기사들의 얼굴에 우울함이 가득했다. 그러나 차마 울상을 지을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표정을 흐뜨릴려고 하면 레안이 빠직 마크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재료는 준비가 다 되었고, 레안이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각 줄 앞에 놓인 통나무를 머리에 이고, 통나무를 왼쪽 어깨로 한번 오른쪽 어깨로 한번씩 움직여. 그리고 단장이랑 부단장은 저 물통 양 손에 들고서 애들이 들고 있는 통나무 위로 올라가. 위에 올라가 있는 자세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거나 물을 흘려서 나무가 젖어 있으면 한시간씩 늘린다. 정확히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해.”헉.
상상을 초월하는 레안의 말에 단장을 포함한 전 황실 기사들은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냥 통나무를 좌로 우로 옮기는 것도 힘든데 거기에 사람이 올라가 있으라고? 거기다 가득 채운 물통을 든?
도대체 얼마나 우릴 개고생 시키겠다는 거야.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미션에 기사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자신들이 위대한 황실 기사단이라 해도 저건 아무리 봐도... 진심, 진짜 무리야.
하지만 그들은 불만을 제기할 수가 없었다.
“아참, 각 기사단끼리 섞어야 하니까, 앞에서 네명씩 왼쪽으로 이동해. 맨 왼쪽 줄은 맨 오른쪽 줄로 옮기고.”
하아. 기사들은 그저 한숨만을 내쉬며 레안의 지시를 따랐다.
- 작가의말
모두들 좋은 연말되세요!!!!
굿굿 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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