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그들 사이엔 무언가가 있다!
정말 말그대로 조금이라도 흐트러졌다하면 바로 단체로 한시간 씩 늘어나는 바람에 그들이 겨우 끝냈을 때는 해가 슬슬 저물고 있을 쯤이었다. 대략 여섯시간 가까이 통나무를 들고 움직인 것이었다.
“하아.”
힘든 것은 기사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는지 통나무 위에서 자세 잡기 훈련을 하던 단장들도 저마다 땀이 맺혀 힘겨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리 훈련 받은 기사들이라 해도 여러 사람이 통나무를 움직이는데 흔들림이 없을 수 없고, 그 곳 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닐 터였다.
“그럼 들어가서 쉬어.”
움직일 여력도 없이 바닥에 주저 앉아 쉬는 기사들을 보며 레안은 손을 훠이 내저었다. 하지만 손까딱 힘도 없는 그들은 쉬라는 말에도 움직이지 못 한 채 쓰러져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쯧쯧 거리던 레안은 갑자기 한 기운을 느끼곤 멈칫했다.
어떻게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짙은 기운. 이것은 마룡 에비루스와 같은 기운이었다. 미세하게 공기의 흐름을 따라 느껴지는 기운의 원인을 찾아 시선을 보내니 그곳엔 하륜이 지친 기색으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동안 드러나지 못하다 이제 드러난걸까. 아니면 그동안 드러나곤 있었는데 이제야 느낀건가. 그러고보니 유리안이 저녀석이 이상하다고 했던가?’
“어이, 너 잠깐 나 좀 따라와.”
레안의 부름에 레안이 가리킨 방향에 있는 기사들은 저마다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확보했다.
도대체 누구를 가리킨 건지..
“거, 현무단 신입, 너.”
레안이 정확히 호칭하자 그제서야 기사들은 자신이 아닌 것을 알고 한숨을 내쉬었고, 하륜이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며칠 동안 자리를 비운 탓인지 다소 휑한 집무실 안에서 레안과 하륜은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다소 심각한 분위기에 하륜은 살짝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너. 이리 와봐.”
레안과 다소 떨어져 앉은 하륜은 자신의 옆 자리를 툭툭 치며 말하는 레안의 행동에 다소 당황하며 다가가 앉았다.
그럴리는 없지만 왜인지 모르게 하륜의 머릿속에선 부하를 덮치는 상사의 모습이 재생되고 있었다.
하륜이 옆에 앉자 레안은 그의 팔을 잡고 눈을 감았다. 잡은 팔을 통해 자신의 기운을 흘러 넣어 내부를 살피던 레안은 그의 심장 부근에서 움찔했다.
‘역시나.’
잡고 있던 팔을 놓은 레안의 표정은 자뭇 진지하다 못해 심각했다. 잔뜩 가라앉은 분위기에 하륜은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던가 하며 고민했다.
“현상금 사냥꾼이었다고?”
“그렇습니다.”
쌩뚱 맞은 질문에 얼떨떨하면서도 하륜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언제부터 했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12살 때 부터이지 않을까 합니다.”
대답하는 그의 얼굴은 기억하기 싫은 기억을 떠올린다는 듯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부모님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6살 때 골목길에 버려진 이후로 그 이전의 기억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기억나지 않는다라.
그때라고 볼 수 있겠네.
“내가 네 출생의 비밀을 아는 것 같다.”
“..네?”
드물게 당황한 표정으로 하륜이 되물었다.
“너 사실은 내 아들이다.”
푸핫.
순간 하륜은 커다란 기침 소리를 내며 사래가 들린 듯 콜록 거렸다. 마치 그 폼은 물이라도 마시고 있었다면 물을 내뿜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조크야.”
겨우 진정된 하륜은 이어진 레안의 말에 다시 또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저런 진지한 표정으로 조크라고 말하니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어색하기도 하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말은 사실이야.”
새삼 그의 심장에서 느껴진 마기를 생각하며 레안이 뚱하니 내뱉었다.
“흐음, 제 출생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재미없어.
그래도 다소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담담한 그의 모습에 레안은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네 심장에 마기가 느껴져. 그렇다는 것은 네가 마룡의 피를 마셨다는 거지. 그런데 단지 피를 마셨다고 보기엔 마기가 너무 진해, 너무 멀쩡하고. 보통 마룡의 피를 마시면 그 즉시 미쳐서 날뛰거든.”
생각도 하지 못한 레안의 말에 하륜이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래서였나 하는 듯한.
“그래서 다시 생각해보니까 마룡 새끼 하나가 하트가 반쪽 밖에 없더라고. 아마 네가 마신 피는 그 마룡의 피고, 그 마룡이 너 미치는거 막을려고 하트를 반쪽 떼어준것 같아.”
“으음? 무슨 의미입니까? 혹시 그 마룡이 제 아버지라는?”
오, 신선하네.
응용력이 좋아.
상상력이 풍부한 하륜의 물음에 레안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드물게 자리잡은 레안의 미소에 하륜은 순간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제나 짜증어린 모습 또는 사람을 괴롭히며 즐거워하는 모습만 보았던 그였기에 순수한 미소는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아니고.”
“그렇다면 어째서 그 마룡이 저에게 피를 먹이고 하트를 준 것입니까? 하트가 아무한테나 떼어줄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만.”
“좀더 지능적이고, 좀더 강하게 미치게 하려고 그러는게 아닐까 싶어. 하트를 너에게 떼준 이상 너와 그는 서로를 공유하고 있고, 특히나 본 주인이 그 마룡인 이상 너는 그에게 속하게 된 거지. 즉, 그는 널 조종할 수 있다는 거야.”
“이유가 뭐랍니까?”
거슬리는 듯 하륜의 말투가 다소 삐딱해졌다. 그 모습이 신선해 레안이 묘한 시선을 던졌다.
“마룡이 직접 나서면 용족이 나서게 되지. 그러나 인간이라면 용족은 나설 수 없어. 인간들 간의 일은 인간이 해결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뭐 효율적인 인간 파괴를 위해서?”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보통의 인간은 마룡의 하트를 감당하지 못해. 그냥 일반 용족의 하트도 감당 못하는데 그게 온갖 탁한 기가 모여있는 마룡의 하트라면 더하지. 그런데 넌 그 마룡의 하트를 받고도 지금까지 멀쩡하게 살아있지. 물론 과거엔 어땠을지 모르겠다만.”
다소 진지해진 레안의 시선이 하륜의 심장을 향했다.
“분명 멀쩡한 과거를 보내진 않았을 거야. 온갖 피로 점철되고, 고약한 과거를 보냈겠지. 마룡의 하트를 받은 이상 제대로 된 감정도 느끼지 못했을 테고.”
마치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는 레안은 심오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표정 속엔 동정이나 연민은 없었다. 그 점이 하륜은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의 쓸데없는 동정과 연민은 역겨우니까.
“뭐 지금도 그닥 멀쩡한 감정과 몸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만 제법 인간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잠시 말을 멈춘 레안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막상 그를 부르긴 했지만 어찌해야 할 지 그녀도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쿨하게 멀쩡할 때 죽이는 것이 편하겠지만 죽이기엔 아까웠다. 감정 없는 인형이라면 모를까 이건 사람이었다. 다소 감정 표현이 서툴고 감정 인식이 둔한.
거기다 그 마룡 녀석 꽤 치명상을 입어서 돌아다니다가 죽어버릴 지도 모르는데.
안그래도 있는 고통 없는 고통 다 겪고서 이제야 행복해질까 하는 녀석인데.
이녀석 죽이면 그 두 녀석도 꽤 빨빨 거릴 것 같고. 물론 그따위 쉽게 제압 가능하고. 여차하면 잘라내면 그만이긴 하지만. 그래도 꽤 마음에 드는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눈을 뜬 레안의 눈에 자신과 10cm 간격 밖에 두지 않고 있는 하륜의 얼굴이 들어왔다.
“뭐냐?”
“아뇨, 예쁘다 싶어서 말입니다.”
피식 웃으며 다소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하는 하륜의 말에 레안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저런 미친.’
“됐고. 너, 살려줄게. 너 미친다고 감당 못할 나도 아니고. 하지만 뭔가 이상한 기미가 보이면 당장 나한테 말해. 그래야 완전히 미치기 전에 죽이지. 완전히 미치고 나면 피해가 커져. 그럼 분명 유리안한테 왕창 깨질거고. 알았어?”
당연히 죽이겠지 싶었다.
골목에서도 악마 취급을 받으며 온갖 살해 위협을 받은 그였기에 당연히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무리 황실 기사단의 기사라고 하지만 이제 겨우 정식 입단식을 한 신입 기사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터질 위험이라면 지금 죽이는게 더 나을 테니까.
“이제 겨우 숨 쉬기 시작한 녀석 죽이고 싶진 않아. 그러니 앞으로 매일 훈련 끝나고 내 집무실로 와. 네 상태 확인해야 하니까. 그래야 조기에 진단해서 처리하지.”
가볍게 말하고 있지만 그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상태를 알았고, 그의 과거를 이해했다.
얼만큼의 연륜이 있어야, 얼만큼의 깊이를 가지고 있어야 저렇게 담담히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그녀는 섣부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다. 딱 적당할 정도의 감정만 보인다.
위로가 필요한 이에게 위로를 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심각하지도 가볍지도 않다. 울라고 재촉하지도, 힘내라고 닦달하지도 않지만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감정을 담고 상대방을 어루만진다. 또한 섣부르게 동정도 연민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인가.
다소 과격하고, 험한 말만 내뱉는 그녀이건만 그래서 기사들은 그녀를 동경하고 존경하는 것인가.
“아, 그리고 황실 기사단에 들어온 이상 다 내 가족이야. 쉽게 내치지는 않아. 솔직히 내치는건 쉽지만 별로 땡기지 않거든.”
툴툴 거리며 내뱉는 레안의 말에 하륜은 그 생애 가장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레안은 삐죽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 나름의 쑥스러움의 표시였다.
- 작가의말
드디어 밝혀지는 하륜의 실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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