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저게 황제라고?
모처럼 황성 안은 오늘 있을 입단식으로 인해 시끌벅적했다. 1년에 한번만 오는 큰 행사인데다가 작년엔 볼 수 없었던 황실 기사단도 이번 입단식에 참여한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황실 기사단이라면 제국 국민 누구나 존경하고 동경하는 기사단이었기에 그런 기사단이 입단식에 참가한다는 소식은 모든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었다. 특히나 황성 안에서 틈틈이 황실 기사단을 볼 수 있던 시녀들도 모처럼 제대로 제복을 입은 황실 기사단 기사들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있었다.
그러나 그런 설렘 속 단 하나 레안만이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몰골을 확인하던 레안은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그놈의 입단식이 뭐라고. 아니, 그놈의 귀족들이 뭐라고.
흰 색 바탕에 금색 문양. 목 끝부터 상의 끝까지 잠겨진 금색 단추. 카라에 달린 총단장을 표시하는 사방신이 그려진 배지. 허리에 달랑 거리는 장검.
이 모든 것이 마치 자신을 조여 오는 것 같았다. 늘 편안한 복장을 위해 간단히 티 하나에 바지만을 설렁설렁 입고 다니던 레안이었기에 온 몸을 칭칭 감는 듯한 제복은 너무도 불편했다.
“꺄아, 레안님 너무 귀여워요!!”
문을 열고 들어온 유란은 레안의 모습에 얼굴을 붉히며 좋아했다.
제복을 입은 레안의 모습은 어려 보이는 외모 탓인지 인형 같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흰 색 제복은 레안의 하얀 피부와 잘 어울리고 있었다.
“준비는 끝났어?”
귀엽다는 말에 욱하는 기분을 느꼈지만 이따 황제를 만나야 할 텐데 쓸데없이 체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레안은 애써 참으며 화제를 돌렸다.
“네~, 저 잘 어울리죠?”
오랜만에 입은 제복에 들뜬 탓인지 유란이 방방 뜨며 물었다.
그 말에 제복을 입은 유란을 바라보았다.
원피스 형식의 몸에 달라붙는 흰 색 치마. 세워진 카라와 목에서부터 치마 끝까지 달려 있는 금색 단추. 왼쪽 어깨 부분엔 주작단 단장을 상징하는 주작이 그려진 배지가 달려 있었다. 확실히 몸매가 좋은 탓인지 치마로 된 제복은 그녀와 잘 어울렸다.
“제나는?”
달갑지 않은 이름에 유란은 인상을 찌푸렸다.
“걔, 치마 입지 말고 바지로 된 제복 입으라고 해. 안 입으면 그냥 알몸으로 내쫓아버려.”
새삼 2년 전 입단식 때 치마를 입겠다며 바락바락 우기다 기어코 입단식 날 치마를 입고와 황제의 폭소를 유발했던 사건을 떠올리며 레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평상시에 여장을 하던 무슨 짓을 하던 상관없었지만 입단식은 달랐다. 거기엔 황제 녀석이 있으니까.
“네~”
드디어 제나를 괴롭힐 구실이 생겼다는 것이 기쁜 것인지 유란은 싱글벙글 웃으며 집무실을 나갔다.
입단식을 하기 전 마지막 점검을 위해 레안은 기사단들을 총 훈련장에 대기시킨 후 단장과 부단장들을 집무실로 불렀다. 애들 점검하는 것도 아니고, 기사들의 복장을 검사해야 하는 자신의 상황에 레안은 괜스레 짜증이 솟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그저 한숨만을 내쉬었다.
“제나, 죽고 싶지?”
분명 치마 입으면 알몸으로 내쫓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어코 바지가 아닌 치마를 입은 모습에 레안은 인상을 구겼다.
“하지만...”
제나가 눈물을 글썽이며 불쌍한 표정으로 레안을 바라보았다.
“벗길까, 아니면 갈아입을래? 둘 다 싫으면 아예 네 아래쪽 잘라줄 수도 있어.”
저기압이었던 탓에 평소보다 살벌하게 나간 말에 제나는 움찔하며 옷을 갈아입으러 나갔다.
그 모습에 유란은 고소하다는 듯 조그맣게 웃었다.
“류. 누가 리폼하래?”
도대체 저건 무슨 컨셉인지 찢어진 바지와 목에 걸린 해골 목걸이하며, 원래의 제복보다 더 치렁거리는 줄의 모습에 레안이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에, 이건 멋이라구요~”
멋, 좋지. 그래. 그전에 화장부터 해줄까?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레안이 살벌한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에 류가 깨갱거리며 옷을 갈아입으러 나갔다.
“라이너, 단추 잠궈.”
“싫어.”
갑갑한게 죽기 보다 싫은 라이너를 깔끔한 레안의 말을 거절했다.
“아예 발가벗고 나가지 그래?”
화난 듯 눈꼬리가 올라간 레안이 그의 옷을 자를 듯한 태세를 했다.
그 모습을 라이너가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절대로 단추를 잠글 생각이 없는 라이너의 모습에 레안은 기어코 폭력을 행사했다. 그래도 입단식이니만큼 얼굴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어차피 제복으로 온 몸이 가려져 있으니 얼굴 아니래도 때릴 곳은 많았으므로.
결국 라이너를 피를 토하며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단추를 잠궜다. 그러나 그 살기등등한 시선이 거슬린 레안은 라이너를 향해 몇 번 더 검집째 검을 휘둘렀다.
“이안. 바지 거꾸로 입었다.”
자고 있는 이안의 머리를 세게 내리친 레안이 이안을 향해 말했고, 이안은 비비적 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몇 분후 옷을 갈아입기 위해 나갔던 이들이 돌아왔고, 레안은 그들을 데리고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는 훈련장으로 향했다.
“오늘 입단식이니까 지루해도 참고, 쓸데없이 떠들지 말고 닥치고 얌전히 있어. 사고치면 죽여버린다. 진.심.으.로.”
원래도 살벌한 레안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사나운 레안의 말에 황실 기사단은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신입들은 입단식 끝나고 남아.”
이어진 레안의 말에 동정 가득한 기사들의 시선이 하륜들을 향했다.
황성의 중앙 홀에는 기사들과 귀족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홀을 가득 채우는 인원에 제법 시끄러울 법도 하건만 홀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홀의 분위기가 너무 엄숙해 차마 입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황실 기사단의 경직된 분위기는 그런 분위기에 열을 가했다.
“이제부터 기사단에 입단한 기사들의 입단식을 거행하노라.”
황제의 말이 끝나자 귀족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고, 기사들은 대열에 맞춰 몸을 움직이며 기사의 맹세를 했다. 차례차례 줄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후 모두 무릎을 꿇자 그들은 일제히 맞춘 듯 일시에 일어섰다. 정제된 그 모습들에 보던 귀족들은 저마다 감탄을 표했다. 행동 하나하나에 담긴 그 아름다움이란.
“이번에 기사의 인을 받고 기사단에 입단한 기사들은 모두 앞으로 나오도록.”
엄숙한 황제의 말에 기사들이 하나둘씩 황제가 서있는 단상 앞으로 나왔다.
황제가 단상 아래로 내려오자 기사들은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황제는 한명씩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그들이 기사가 되었으면 선포했다.
황제의 선언이 끝나고,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황제는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이 황실 소속 기사단임을 증명하는 배지를 그들의 제복에 달아주었다.
배지를 달은 그들은 뒤로 돌아서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허리에 맸던 검을 꺼내 가슴 앞에서 거꾸로 세워, 나머지 한손을 검에 손을 대어 기사의 맹세를 했다.
이어 황제가 축사를 했고, 축제가 시작되었다.
기사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동료들과 술을 마시며 연회를 즐겼다.
다소 시끌벅적했던 입단식이 끝나고 레안은 하륜들을 데리고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까 입단식을 하면서 황제를 눈앞에서 보긴 했지만 이렇게 황제의 사적인 공간에서 황제와 사적인 만남을 가진다는 것이 긴장이 되는지 리엔의 몸은 굳어있었다. 카엘이나 하륜은 그런 리엔에 비하면 별달리 긴장한 기색을 보이진 않았지만 다소 가라앉은 하륜의 표정은 그 또한 황제의 만남에 어느정도 긴장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레안이 속으로 비웃음을 날렸다.
아직 신입이라 그런 걸지로 모르지.
입단식에서의 근엄한 유리안의 모습을 떠오르며 웃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답지 않은 모습이라니.
아무리 그가 황제답지 않은 황제에, 장난이 넘치고 흐르는 이였지만 그도 중요한 행사에서는 평소의 모습을 보일 수 없어서 근엄한 황제의 흉내를 내곤 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평소의 유리안의 모습이 떠올라 레안으로서는 자꾸 차오르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뭐, 본인은 꽤나 즐기고 있는 듯 하기도 하고.
황제의 집무실에 도착한 레안은 대충 문에 노크를 한 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레안의 뒤를 하륜들이 잠시 멈칫 거리며 따라 들어갔다.
헉.
하륜들은 집무실 안에 들어가자 보이는 황제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소파에 누워 서류에 묻힌 채로 잠을 자고 있는 그의 모습은 입단식에서 봤던 황제라 보기엔 심히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레안은 익숙한 듯 혀를 차며 유리안의 머리를 내려쳤다.
감히 황제의 몸에 손을 댄 레안의 행동에 리엔은 뭐, 저런 이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하륜은 눈에 이채를 띄었다.
“아파, 레안.”
눈을 감은 채로 자신의 머리를 내려친 레안의 손을 잡으며 유리안이 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애교를 부리는 듯한 그 모습에 레안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일어나기나 해.”
레안의 말에 유리안이 레안의 손에 자신의 볼을 부비며 일어났다. 유리안의 행동에 레안은 끔찍한 것을 본다는 듯 손을 털어내며 근처에 있던 하륜의 옷에 손을 닦았다.
“앉아.”
유리안은 반쯕 감긴 눈으로 소파를 가르켰다. 그의 말에 하륜 들은 어색하게 소파에 앉았다.
그들이 소파에 앉고 몇분간 그대로 멍하니 있던 유리안은 이내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너네가 이번 황실 기사단 신입이라고?”
유리안의 진득한 시선이 하륜들을 노골적으로 훑었다. 그 적나라한 시선에 하륜 들이 슬며시 기분이 나빠진 것을 느꼈다. 마치 노예시장에서 포주들에게 가격을 매겨지는 노예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적당히 꼴아봐.”
그 시선을 참지 못한 리엔이 욱할려는 찰나, 레안이 유리안의 뒤통수를 때렸다.
“큭, 저기 아무리 그래도 황제 폐하이신데 그렇게 함부로 때리셔도..?”
수심 50m 되는 호수의 살얼음을 걷는 것 같은 레안의 행동에 기어코 카엘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 그 걱정 속에 미묘한 흥미도 담겨 있었다.
카엘의 말에 레안이 유리안을 바라보았다.
“꼽아?”
“난 레안이 진짜 좋더라.”
유리안은 레안을 품에 안고 비비적 거렸다.
그 행동에 레안은 유리안의 머리 끄댕이를 마구 잡아 당겼다.
그러나 거머리 같은 유리안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쟤들이나 이뻐해.”
레안을 품에 안은 유리안은 시선을 들어 레안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재미없어. 너무 조용해.”
자신이 황제라는 자각은 있는 것인지 유리안이 칭얼거리며 말했다.
“보고 싶다며? 데려오라며?”
자신이 똥개 훈련시키는 유리안의 말에 레안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이름이 뭐라고?”
여전히 레안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채 유리안이 웅얼거리며 물었다.
“현무단 소속의 하륜입니다.”
“호오, 현무단이라고?”
그 역시 현무단의 악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 곳에 저런 신입이 들어가다니. 하긴, 애초에 저녀석들이 황실 기사단에 들어간 것 부터가 놀라운 사실이긴 했지만.
“그렇습니다.”
유리안의 이채를 띤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며 하륜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째 마음에 든단 말이야.
아까부터 담담한 저 표정하고 말투하며. 저 셋 중에서 가장 강해보이고. 그리고 거의 사라지긴 했지만 미묘하게 나는 저 혈향하며.
꽤 과거가 있는 녀석인 것 같은데.
“너는?”
아까부터 온갖 기묘한 표정을 보여주는 리엔을 향해 시선을 향하며 물었다.
“청룡단 소속의 리엔이요.”
다소 뚱한 대답에 유리안이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아, 청룡단 단장 애인이라던?”
“악!!!”
마치 끔찍한 소리를 들었다는 것 마냥 리엔이 귀를 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몸까지 부들부들 떠는 그 모습에 유리안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유리안의 시선이 카엘을 향했다.
“큭, 백호단 소속의 카엘입니다.”
얘도 꽤 재밌는 성격인 것 같은데.
아예 담담한 하륜의 모습과는 달리 적당히 놀라는 표정하며, 그 속에 숨겨진 흥미하며.
유리안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레안이 그의 눈을 가렸다.
“야, 이제 니들은 가라. 더 있으면 변태한테 잡아 먹힐 것 같다.”
황제를 변태라고 칭하는 레안의 말에 담담하던 하륜의 시선이 다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정중히 그들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마자 리엔은 다리가 풀린 듯 살짝 비틀거렸다.
“도대체 저게 황제 맞아?”
입단식에서의 황제랑 동일인물 맞냐고?
아직 집무실 근처를 많이 벗어나지 못한 리엔이 조그맣게 투덜거리듯 말했다.
“크큭, 그렇지. 진짜 재밌는데.”
카엘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런 카엘은 바라보며 하륜이 쓰게 웃었다.
아까 자신을 바라보던 유리안의 시선. 분명 무언가를 감지한 것 같은 눈이었다.
이젠 제법 지워졌다고 생각했건만 아직도 남아있는 건가.
마치 자신이 그동안 잊고 있던 과거를 헤집어 놓은 듯한 느낌에 하륜은 좀처럼 찝찝한 마음을 버릴 수가 없었다.
“쟤, 인간 맞아?”
유리안이 하륜을 떠올리며 싱글거리는 표정으로 레안을 바라보았다.
“인간이겠지.”
“그런 것 치고는 꽤 음습해서. 혈향도 진하고.”
“뭐, 누구나 과거는 있잖아.”
대수롭지 않게 유리안의 말을 넘긴 레안은 옷의 단추를 푸르며 집무실을 나갔다.
- 작가의말
주말에 돌아왔습니다.....그러나, 전 아직도 시험이라는 태풍 속에 있다는 사실..
모쪼록 재밌게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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