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지.
오는 길에 마물 나오는 경로를 따라 마물들도 함께 처리하며 황성에 도착한 레안은 황성 안에 들어선 순간 훈련장에 깔린 미묘한 기류를 읽을 수 있었다. 눅진눅진하면서 암울한 기류에 레안은 황실 기사단에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근위 기사단의 몰살에 가까운 부상 건 때보다는 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얕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거의 제국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마물 퇴치를 하는 것은 다소 몸에 무리가 되었기에 한시간 정도는 좀 쉬다 일을 시작하려던 그녀였지만 분위기 상 그럴 수 없음에 다소 굳은 표정으로 집무실로 향했다.
전화기를 통해 그동안의 보고를 위해 단장들을 부른 레안은 그들의 표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은 더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우선 말해봐.”
턱짓으로 라이너를 가리킨 레안이 의자에 몸을 묻으며 물었다. 살짝 눈을 감고 의자에 등을 기대는 것이 피곤한 것인지, 아니면 화가 난 것이지 애매했다.
“현무단 전원이 임무 도중 부상을 입었고, 루이가 죽었다. 루이와 함께 임무를 나갔던 카렌과 하륜은 의식 불명이었다 카렌만 정신을 차렸고, 렌 또한 심하게 부상을 입었지만 회복 중이다.”
“하륜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흐음.
한명 사망과 하륜은 의식 불명이라.
하륜이 의식 불명이라는 것은 그만큼 그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는 뜻이었다. 마룡의 하트를 가진 그가 쉽게 쓰러질 리가 없을테니.
“내가 황실 기사단 총단장이 되었을 때, 말한 것이 있었지. 나는 내 휘하의 부하들이 다치는 것도 죽는 것도 허용치 않는다고. 특히, 임무 중 사망은 절대 허락 못한다고.”
눈을 뜬 레안의 눈에는 뭐라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하륜을 제외한 모든 현무단 녀석들 이틀 후 복귀시키고, 내가 직접 훈련시킨다. 변명은 필요 없어. 딱 이틀 주지. 그 이틀 동안 모두 원상복귀 시켜. 한명이라도 여전히 어설픈 죄책감이니 하는 마음으로 흔들리고 있다면 그 새낀 바로 아웃이야.”
유난히 냉정한 레안의 말이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위로는 보낼 줄 알았는데.
라이너의 흔들리는 시선을 바라보며 라힌이 쓰게 웃었다.
“나머지 임무 보고해.”
딱딱 끊어지는 레안의 말투에서 그녀의 기분이 심히 좋지 않은 것을 느낀 단장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고, 자연스레 집무실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나마 다행인가.
현무단을 제외하고는 큰 피해를 입은 곳은 없었다. 물론 임무가 임무이니 만큼 부상자 하나 없는 깨끗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다들 그리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고, 며칠만 쉬면 바로 복귀 가능한 정도였다.
하아.
라이너 또한 상심이 클 테지. 특히나 카렌은 같이 임무를 수행했으니 동요가 더 크겠지.
레안은 피식 웃었다.
이번이 두 번째 사망 소식이던가.
왜인지는 모르나 첫 번째, 백호단에서의 사망 소식은 이렇게까지 그녀에게 감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꽤 큰 동요를 느꼈고, 그랬기에 현무단에 대한 분노가 더 컸다. 실력이 약했다, 마물이 너무 강했다, 임무가 너무 힘들었다. 모두 변명일 뿐이었다. 그것이 합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실력이 약했다면 그만큼 열심히 훈련을 해서 실력을 키워야 했고, 임무가 힘들었다면 적당한 수준에서의 임무를 맡았어야 했다.
그리고 다른 기사단이 다 멀쩡한데 현무단만 그랬다는 것은 현무단의 임무 배분이 적절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니 결국 원인은 그들에게 있다는 것인가.
복잡한 마음에 레안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고, 그보다 더 중요한 하륜에 대한 일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하륜이 있는 의원실로 향했다.
죽은 듯 누워있는 그 모습을 보며 레안은 본인이 직접 하륜을 들어 자신의 침실로 날랐다.
언제 폭주 할지 모르는 하륜을 환자들이 위치하고 있는 의원실에 둘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또다른 부상자가 발생할 터이니.
좋지 않군.
의식 불명의 하륜의 몸에 자신의 기운을 흘려보내 몸 상태를 살피던 레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큰 부상으로 인해 몸의 기력이 약해지고 균형이 무너진 탓인지 몸속의 마룡의 기운이 날뛰고 있었다. 마룡의 하트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이 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폭주하기 전에 그녀가 황성에 도착한 것이었다. 어쩌면 조금만 늦었다면 그가 이미 폭주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 이 상태로 보아 언제 폭주를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기에 레안이 자신의 기운으로 침실을 둘러싼 결계를 만들었다. 하륜이 폭주할 경우 황성이 날아가게 될 텐데 그렇게 된다면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하기도 힘들뿐더러 손해배상 하기도 귀찮았다.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에 대한 설명도 하기 귀찮았고.
다만 이 놈이 폭주하면 방안을 작살날 것이 분명했기에 그것은 심히 짜증이 났다. 방안 물건 배려하면서 저놈의 폭주를 상대하기에는 흔히 말하는 삽질이 될뿐더러 할 수도 없었다.
그보다 그래도 대충 할 일을 끝내서인지 몰려오는 피로에 우선 몸을 풀기로 했다. 따뜻한 물속에 샤워를 하고 한숨 푹 자면 그나마 나아지겠지.
옆에 저런 위험인물을 두고 잔다는 것이 영 내키지는 않았지만.
아직 이틀이 지나지도 않았건만 다짜고짜 호출을 한 레안의 행동에 라이너와 카렌이 다소 수척한 모습으로 레안의 집무실에 앉아있었다.
“누가 보면 기사가 아니라 노숙자인줄 알겠네.”
그렇게 깔끔을 떨던 라이너와 카렌의 너저분한 모습에 레안이 어이없다는 실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말에 그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어째 예비 신부를 잃었었던 라힌보다 심한 몰골에 레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긴, 황실 기사단 중에서 라힌은 강한 축에 속했으니까. 단순한 실력이 아니라 그 정신력 부분에서. 그랬기에 그런 상처 속에서도 쉽게 극복할 수 있었겠지.
“기사는 기사답게 보내는 거야. 너희들이 진정 그녀석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면 슬픔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을 극복하고 강해지는 것의 너희들의 몫이야. 그것이 같은 기사로서 너희들이 그녀석에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찬사야. 지금 너희의 몰골은 같은 기사로써 쪽팔려 죽을 지경이야. 고작 이거 하나 버티지 못해서 어쩌려고 그러는 거지? 기사는 어쩔 수 없이 주변에 죽음을 가지고 다닐 수 밖에 없어. 그거 모르고서 기사가 되었나?”
레안이 싸늘히 그들을 응시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들은 절대 그녀만큼 강하지 못할 테니까.
“정확히 한시간 주겠어. 딱 그동안만 허락한다. 울어.”
생뚱맞게 울라는 소리에 그들은 멈칫하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가볍게 볼을 타고 내리던 눈물은 이내 폭포수가 되었고, 그들은 히끅거리는 소리와 함께 애처롭게 울었다.
힘들었을 테지.
현무단 녀석들의 짐을 넘겨받으면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을 테지. 그랬기에 저 딱딱한 녀석들이 쉽게 무너지는 것일 터였다. 스스로도 힘든 그것을 다른 이들의 것까지 받아들여야 하니.
하지만 그것이 그들이 가진 직위에 대한 의무였다.
정확히 한시간이 지나고, 그들은 다소 진정이 되었다. 물론 그들 스스로의 자의적인 것이 아닌 레안에 의한 강제적 진정이었다.
“죄송합니다.”
울고 났더니 나갔던 정신이 그래도 되돌아온 것인지 카렌이 씁쓸하게 말했다.
“됐어. 명심해. 너희들이 그녀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야. 그녀석을 위해 강해지는 것. 그녀석이 살아있었다면 지킬 수 있었던 목숨들을 대신해서 지켜주고, 훌륭한 기사가 되는 것. 아프다면 아픈 만큼 휘둘러. 슬프면 슬픈 만큼 휘둘러. 그렇게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고 나면 어느새 강해져있을 테고, 그녀석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을테니까. 그녀석이 목숨 바쳐 알려준 그것을, 지키기 위해선 더 강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마. 그리고 그것을 너희가 직접 현무단 녀석들에게 보여줘. 그들도 깨달을 수 있도록.”
울고 나서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 정신을 차린 탓인지 카렌과 라이너는 레안의 말을 진지한 표정으로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서려있는 슬픔에 레안이 귀찮은 듯 인상을 찌푸리다 그들의 머리를 두어번 톡톡 쳤다. 그녀 나름의 어색한 위로였다.
단순한 터치였지만 그 속에서 명백한 자신들에 대한 걱정과 애정, 그리고 죽은 루이에 대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기에 작긴 하지만 카렌과 라이너는 미소를 지었다.
오랜 시간을 함껜 한 탓일까.
카렌과 라이너는 그 별것 없는 레안의 행동에서 편안을 찾을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의 능력인지도 몰랐다. 겉으로 보기엔 여린 소녀일 뿐인 그녀가 이리도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고,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따뜻함을 줄 수 있는 것.
그래서 그녀가 많은 반발 속에서도 당당히 총단장이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렇게 라이너와 카렌을 달래고, 밀린 업무 보고서를 읽던 레안은 자신의 침실에서 이질적인 기운을 느꼈다. 이것은 분명한 마력이었다. 마룡의 하트에서 나오고 있는.
레안은 서둘러 자신의 침실로 향했고, 결계로 막은 그 방은 마룡의 하트에서 나온 마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나마 하륜이 정신을 차리지 못해 몸은 움직이지 못한 채로 마력만 나오고 있었지만 이미 그 마력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안도감도 잠시, 하륜이 서서히 눈을 뜨는 것이 보였고 눈을 뜬 그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눈을 뜬 하륜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고, 일렁거림을 느낀 그 순간, 하륜의 검은 손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순식간에 그녀의 목을 잡아 뜯을 듯 다가온 그 손에 레안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피했고 하륜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그의 공격을 피하면서 그의 행동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확실히 폭주한 상태는 맞는 듯 그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그동안 느낄 수 없었던 선명한 마력이 연신 그의 몸에서 휘몰아쳤다.
우선은 그를 진정시켜 몸의 마력을 억눌러야겠다는 생각에 그를 살펴보고자 방어만을 했던 레안이 드디어 공격에 나섰다. 폭주한 상태라고 해도 아예 이성 없이 본능만을 따르는 것은 아닌지 제법 공격을 가하는 하륜의 모습은 마력만 아니라면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즉, 그 정도로 공격은 치밀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공격에 당할 정도로 레안은 약하지 않았고, 피할 공간을 막아오며 다가오는 하륜의 공격을 레안은 피식 웃으며 마주 공격해 들어갔다. 그의 마력에 둘러쌓인 검은 손이 레안의 검과 정면으로 대치했고, 마력 탓인지 검날에 직접적으로 신체가 닿았음에도 피 하나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하륜이 폭주했다고는 하나 그녀를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는 않았기에 하륜의 손은 레안의 검에 의해 튕겨졌고, 이내 그의 손을 감싸고 있던 마력이 사라졌다.
- 작가의말
레안이 은근 어려운 캐릭터에요. 나름 이게 잘 모르겠지만 은근 성장물 비스므리한.. 이제와서 밝히지만 인간치곤 상당히 무심한 레안이 감정을 하나씩 깨달아간다 인데.. 그게 잘 드러나고 있는지.. 거참.. 레안 성격 참 까다로워요...으아.
것보다, 드디어 하륜 폭주입니다!!
향란지몽 님/펜그렘 님/ 댓글 감사합니다.
위기의 하륜, 드디어 다음이 하륜의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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