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후회해봤자 늦었지요.
왠일인지 오늘은 훈련장이 아닌 집무실에서 견습 기사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 사이에 껴있는 신입 황실 기사단 기사 세명을 바라보던 레안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라힌을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안그래도 못생긴 얼굴이 핼쑥해져버리는 바람에 더 못생겨졌기 때문이었다.(물론 여기서 못생겼다는 건 레안의 주관적 견해임.)
“뭐냐, 그 몰골은.”
물론 3일의 휴가를 라힌이 즐기며 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처참한 모습에 레안은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무너지지 말라고 경고를 했건만. 뭐, 어쩔 수 없을려나. 다른 녀석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으니. 거기다 아끼는 부하까지. 자신이야 원래부터 죽음 자체에 크게 막 신경을 쓰는 타입이 아닌지라 그래도 비교적 담담할 수 있었지만 아직 죽음이 낯선 저 녀석에게는 꽤나 큰 충격일테니. 하지만 그렇다해도 여긴 황실 기사단이다. 그런 죽음 하나에 상처 받고 무너질 녀석은 필요 없지.. 그래도 저 몰골이면 처음 겪는 일치곤 잘 견디는 것일려나.
“흐음, 그런 표정으로 볼 정도라면 정말 엉망이긴 한 모양이네요. 바론도 절 보곤 화들짝 놀라던데..”“당연하지. 아무튼 이야긴 들었지?”
“이야기라면 견습 기사 세 명이 일주일 만에 백호단 기사가 되었다는 거 말인가요?”
“그래, 근데 뭔가 표정이 띠껍다?”“그럴리가요. 그저 당분간 재밌어지겠구나 싶어서요. 이제 백호단 녀석들 들어온 지 오래됐다고 이젠 아무리 굴려도 덤덤하더라구요.”“그래? 딱 그 정도로 굴려. 그놈들도 꽤 하거든.”던지듯 내뱉는 레안의 말에 라힌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입이라면 그저 갈구기 바쁜 레안이 칭찬을 하다니. 애초부터 쉽게 갈 생각은 없었지만 레안이 직접 부탁할 정도니 특별히 신경을 써줘야겠군.
“흐음. 레안님의 말에 아주 살짝의 연민이 드네요.”“그래. 그리고..... 정 힘들면 나한테 와. 나한테까지 강한 척 할 필요없으니까. 가끔씩은 윗놈도 약한 모습 보이며 기대고 싶어질 때가 있거든. 그리고 가끔씩 그래줘야 그 자리를 버틸 수 있고.”
레안의 말에 라힌은 조그만 미소를 지었다.
역시 무심한 척 하면서도 정이 깊다니까.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겐 기대는건 아직 익숙하지 않으니까.
“괜히 튕길 생각 말고 무너지기 전에 한번 흐트러지는게 좋아. 내 앞에선 넌 윗놈이 아니라 아랫놈이니까.”
“아마 레안님은 기사가 아니라 독심술사로 나가셨어도 성공하셨을거에요. 그럼 이만..”
라힌은 조용히 인사하며 레안의 집무실을 나갔다. 레안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반갑군요. 제군들.”웃으며 인사하는 라힌의 모습에 하륜 패거리는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뭔가 웃고는 있지만 그 웃음 속에서 살기가 느껴진달까.
“자, 오늘은 첫날이니 가볍게 시작을 하도록 할게요. 우선 이것들을 다리와 팔에 차주겠어요?”라힌이 건네준 모래주머니를 아무렇지 않게 받으려고 하던 하륜 패거리는 모래 주머니를 받자마자 느껴지는 무게감에 순간 헛하며 숨을 들이켰다. 못 들 정도는 아니였지만 여타 모래주머니들과 비교해선 현격하게 무거웠다.
이것을 차고 무엇을 하라는 것일까. 그냥 차고 서있는 것도 꽤 힘들것 같은데..
몸을 타고 흐르는 불안감을 느끼며 하륜 패거리는 조심스럽게 라힌의 명을 따랐다. 역시나 꽤 무게감이 있던 모래주머니들은 다리와 팔에 차자마자 몸의 힘을 쭉 빼놓았다.
“다 차셨군요. 그럼 여기 이 통나무를 여러분 셋이서 머리에 이고 훈련장 5바퀴를 뛰시면 됩니다.”
“네에?!!!”
설마설마 했던 불안감이 현실이 되자 몸을 엄습해오는 공포감에 리엔이 소리를 질렀다. 그런 리엔의 반응에 하륜은 더 큰 불안감을 느꼈다. 왜인지 리엔의 행동이 자신들에게 더 큰 시련을 몰고 올 것 같은.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았다.
“흐음, 너무 약한가보군요. 그럼 8바퀴로 늘리도록 하지요. 그리고 제가 뒤에서 같이 뛸건데 저보다 뒤처지면 남은 수의 두 배로 늘릴 테니 그리 아시구요. 자, 그럼 시작할까요?”
터무니없는 명령에 리엔이 다시 욱하며 뭐라 따질려는 찰나, 용케 리엔을 캐치한 카엘이 리엔의 목덜미를 끌고 얌전히 머리에 통나무 귀퉁이로 올려주었다. 그런 카엘을 보며 하륜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아주 훌륭했다는 뜻으로.
“우아, 이게 진짜 사람이 할 짓이야? 어쩜 이렇게 무식하게 굴릴 수 있는거야?”
열심히 통나무를 이고 달린 덕분에 온 몸이 망신창이가 된 리엔이 바닥에 주저 앉으며 투덜거렸다. 그런 리엔의 투정에 모처럼 하륜과 카엘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이번 훈련은 좀 과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자신들이 황실 기사단에 정식으로 입단하였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신입이거늘. 물론 이런 생각이 옳은 것은 아니었지만 참을성 강한 하륜조차도 욕을 내뱉을 만큼 훈련은 힘들었다.
“크, 가볍게가 이 정도인데.. 본격적이 되면 어떻게 될 지 이거 상상도 안되는데?”
“흐음, 그러게. 오늘 같은 강도로 간다고 해도 살짝 무리일 것 같은데..”
“살짝 무리는 무슨!! 이거 필시 그 악명 높은 총 단장이라는 사람이 우릴 괴롭힐려고 일부러 백호단에 입단시켜서 이런 훈련을 시키는게 분명할 거야!!!”
발광하는 리엔의 말에 하륜과 카엘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는 모습의.
리엔의 입장에선 딱히 별뜻을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훈련의 강도가 너무 세다 보니 그런 리엔의 말이 왠지 현실성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뭐 그렇다고 해도 할 말은 없을뿐더러 그렇게 가볍게 기사를 뽑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기에 설마하는 불순한 생각은 접기로 했다.
“그럼 이제 숙소로 갈까? 씻고 침대에 누워 편안히 좀 쉬고 싶어지네. 아마 여기 와서 처음으로 다음날이 두려워질 것 같은 기분이야.”
“그러게나 말이지. 황실 기사단 생활이 쉬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이거 정말 장난이 아니네.”
“어때?”
나무 위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레안이 어느새 자신이 있는 나무 밑으로 온 라힌을 향해 물었다.
“과연 잘 따라올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는 잘 따라온달까요. 앞으론 걱정 없이 마음껏 굴릴 수 있을 것 같네요.”
“특히 저 놈 어때?”
라힌은 레안이 가리키는 녀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흐음, 저 분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시군요.”
괜스레 웃는 라힌의 얼굴엔 묘한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미친.”
“하하. 너무하시네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 분이라면.. 아직 정확한 평가를 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체력이나 근력면에서는 지금껏 보아온 기사단 녀석들보다는 훨씬 나은것 같네요.”
“헤에, 그렇군. 아무튼 실전에서 짐되지 않게 확실하게 관리해. 저놈들만 보내도 S급 마물들 정도는 가볍게 처리할 수 있도록.”
“네, 그러도록 하지요.”흔쾌히 대답하는 라힌에게선 묘한 즐거움이 느껴졌다.
“커헉.”
몸 여기저기서 피를 흘리며 리엔이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이미 첫 훈련 때부터 훈련의 강도가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긴 했지만 나날이 발전해가는 훈련의 강도는 지치다 못해 제대로 앉아있기조차 힘들 지경이 되었다. 거기다 지난 일주일은 마치 워밍업이었어, 라고 말하는 듯이 이번 주부터 가파라진 훈련의 강도에 하륜 패거리를 죽을 지경이었다. 아니, 진짜로 죽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저것에 잘못 맞으면. 아무리 실전 감각을 위한 훈련이라지만 이건 정말... 어떻게 말로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특히나 라힌의 보조를 위해 바론까지 합세하면서부터는 하륜조차 간당간당할 지경이었다.
“뭐야? 그 정도가지고 쓰러져야 되겠어?!!!! 완전 약골이구만!!”
라힌을 도와 전력으로 훈련장 한 구석에 마련된 무기들을 던지던 바론이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버린 리엔을 향해 마구 비웃음을 날렸다. 그런 바론의 말에 리엔은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니가 한번 겪어봐 라며 멱살을 잡아 마구 흔들어주고 싶었지만 바론과 라힌이 던진 무기에 맞아 더 이상 일어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게 어딜 봐서 훈련이라는 건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이건 그냥 본인들의 화풀이일 뿐이었다. 아무리 실전 감각을 키우고, 방어력과 공격력을 키우기 위한 훈련이라지만 이렇게 무식하게 무기들을 던지고는 이것들은 다 알아서 처리하라니! 그것도 절대 피하지 말고 검으로 방어를 하던 공격을 하던 하라고 하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리엔군을 훈련을 계속하는 것이 무리일 듯하니 다음 사람 나오시겠어요?”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라힌의 모습은 말그대로 천사의 탈을 쓴 악마였다.
그렇게 리엔은 바닥에 버려진 채로 다음 사람의 훈련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역시나 다음 사람인 카엘도 리엔처럼 온 몸에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 친구들의 모습에 하륜은 표정이 살짝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훈련이라지만 이렇게 친구들이 자신의 눈 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모습은 보기가 힘들었다.
“이제 마지막이군요.”
라힌 역시도 훈련의 연속에 꽤 힘들었지만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말하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라힌과 바론은 무기를 집어던졌다. 정말 아무렇게나 마구. 하지만 리엔과 카엘에 비해선 좀더 신경을 쓰면서.
그래도 그동안의 훈련이 효과는 있는지 하륜의 몸에는 그전에 비해 상당히 적은 숫자의 상처가 새겨졌다. 그렇다해도 그전에 비해 적은 숫자인거지 일반적으로 보기엔 매우 많다고 볼 수 있는 정도였다. 거기다 리엔이나 카엘에 비하면 정말 양호한 수준이었다. 물론 그들 역시도 처음에 비하면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처음에 워낙 심하게 다쳤던 지라 나아진 지금의 상태도 그리 좋지는 못했다.
그렇게 훈련이 끝나고 겨우 한숨을 돌리며 쉬고 있는 그들에게 레안이 다가왔다. 피투성이가 된 세명의 모습에 다소 놀랄 법도 하건만 레안은 익숙한 듯 그들 셋을 질질 끌고선 의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레안의 모습을 보며 라힌은 조그만 미소를 지었다.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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