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어디 있나, 응답하라 오바.
황성 밖과 황성 안이 별다를 것은 없을 텐데 고작 그 황성을 벗어난 게 뭐라고 유난히 하늘이 맑아보였고, 공기가 깨끗하게 느껴졌다. 특히나 귀찮게 벽으로 옭아매지 않고 있는 것이 황성에 비해 자유롭고 편안한 기분이었다. 하긴 원래부터 벽 없는 자유로운 공간을 좋아했던 그녀였으니.
다만 아주 살짝 아쉬운 것은 지금 이렇게 밖에 나온 것이 휴가라서 쉬러 나온 것이 아니라 귀찮은 일 때문에 일하러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워낙 자신에게 휴가 주길 꺼리는 황제라 저번에 휴가 준 것도 도대체 얼마만인지 다시 또 휴가를 달라고 한다면 필시 온갖 핑계를 들어 거절할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자신이 계약직이라 계약 만기 전에 되도록 많이 부려먹어야 한다지만 진짜 이건 너무한 게 아닌지. 황성에 있는 유리안을 생각하며 레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또 왠지 올해 이렇게 사건이 많은 것은 유리안이 간절히 기도제를 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워낙 종 잡을 수 없는 존재이니.
어찌하였든 비교적 오랜만에 나온 황성 밖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시원했다. 문제라면 비 올 일 거의 없는 제이로 제국이건만 모처럼만에 비가 오려는 듯한 움직임이 아주 살짝, 정말 조금 신경 쓰인 달까? 아무리 그녀가 물을 좋아한다고 해도 비에 젖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는 것은 질색이었으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한 두시간 후에 비가 올 것 같은데, 이 놈의 숲은 도대체 끝이 어딘지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중간쯤에 온 것도 그녀라서 그런 것이지, 다른 이들이었다면 아직도 초입에 머무르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성질 급한 그녀는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고, 특히나 비가 올 거라는 하늘의 소식에 표정은 더욱 좋지 않았다.
하늘에서 내리는 물이나 바닥에 고여 있는 물이나 어차피 똑같은 물인데, 비는 왜 싫어하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어린 시절 좋지 않은 기억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아.’
꽤 열심히 오랫동안 속도를 내서 달렸음에도 좀처럼 숲은 끝이 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중간에 동굴이라도 보이면 좋을련만 어째 동굴도 보이지 않는 것이 뭐 이딴 망할 숲이 있는지 레안은 속으로 화를 삭였다. 그렇게 레안이 숲을 열심히 거닐던 사이, 벌써 한 두시간이 흐른 것인지 맑았던 하늘이 회색으로 어두워지며 비를 한방울씩 흘리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어디 피할 곳이 없을까 두리번거리던 레안은 멀리서 불빛을 발견했고, 불이 타고 있다는 것은 필시 비를 막을 만한 도구가 있다는 사실이므로 황급히 그곳으로 향했다.
확실히 불이 피워지고 있던 곳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동굴과 함께 적당한 수준의 텐트와 램프가 있었다. 아무래도 저 램프를 통해 불을 피우고 있는 것 같은데, 뭐 자기 한사람 정도 추가된다고 해서 크게 피해를 입을 것 같지 않아 레안은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지 못한 이의 등장에 일행들은 경계어린 표정으로 레안을 바라보며 무기를 다잡았다. 그러나 이내 그녀가 어린 소녀라는 것을 깨달은 일행은 무기에 올려놓았던 손을 내려놓으며 다행이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혼자이십니까?”
다른 일행이 있을까 싶어 소녀 뒤를 살피던 일행 하나, 레닌이 레안에게 정중히 물었다.
“혼잔데?”
왜 그가 그 사실을 물어보는지 짐작을 할 수는 있었지만 애초에 그 모든 것은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지 그녀의 잘못이 아니기에 당당히 대답했다.
“허,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서 혼자 오신 겁니까? 거기다 어린 소녀분이 말이지요.”
본인 나름대로는 걱정의 의미로 하는 말이겠지만 실제 나이 불분명, 대륙 최고의 제이로 제국 황실 기사단 총단장인 그녀로서는 어이없는 말이었다.
세상에 그녀가 혼자 다니지 못하면 그 누가 혼자 다닐 수 있을까. 하긴, 애초에 혼자 다니는 것이 무리라는 의미로 그런 것이겠지만.
“상관없는데?”
물론 오면서 몇 마리의 마물을 만나긴 했지만 SS급 백호도 한방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그녀였기에 크게 상관은 없었다. 그리고 슬픈 말이지만 오면서 기운을 흩뿌린 덕택에 일부 마물들은 알아서 피해주기도 했다. 여유만 있다면 한바퀴 천천히 돌면서 친히 만나는 마물 족족 죽여줄 의향은 있지만 지금은 그보다 다른 것이 더 중요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린 계집이 꽤 당돌하네. 보아하니 귀족 가 계집 같은데, 그러다 마물들에게 물려 가면 어떡할려고 그러나?”
호오라?
정중한 남자의 말투와는 달리 다소 질 낮은 여자의 말에 레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도 그리 말을 예쁘게 쓰지는 않지만 남이 그러는 꼴을 보자니, 그리고 그녀는 입이 거친 거지 질이 낮은 것은 아니었다, 기분이 심히 좋지 않았다.
“그래, 그러니까 하루만 좀 같이 지내지? 안타깝게도 비를 피할 수가 없네.”황실 기사단 녀석들이었으면 단박에 말을 그따구로 하냐고 한소리를 했을 그녀였지만 모르는 타인에게, 정확히는 잠깐 얹혀야 할 이에게 그럴 수는 없어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굳이 여기서 트러블 일으켜서 비를 쫄딱 맞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크크크, 우리는 어떻게 믿고? 난 그런 계집이 좋지, 어려서 살이 연한 계집. 이왕이면 피부도 하얗고 부드러우면 좋지. 끝내주게 맛있거든.”
허, 저 놈은 더하네?
이 말까지 참기엔 그녀 성격이 좋지 않아 고민하는데, 다행히도 처음 말을 건 레닌이 그를 말리며 그녀에게 사과했다. 평소라면 사과를 해도 넘어가지 않았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상황이 이러니 넘어가기로 했다.
“그럼 안쪽에서 주무시겠습니까? 자는 동안 이녀석들이 아무 짓도 안하게 보호해드리겠습니다.”
꽤 묘한 분위기의 사내인 것 같아 레안이 아주 잠깐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말 하나 기깔나게 더럽게 하는 이들에 비해 너무 정중하고 분위기가 달라서 어울리지가 않으니까. 분명 그들이 일행으로 어울리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일테니.
과연 이런 상황 속에서 그를 믿는 게 좋을까 고민하던 레안은 이내 편하게 생각하기로 하곤 레닌이 안내해주는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녀가 자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확실히 달갑지 않은 이들의 존재와 원하지 않던 잠자리 때문일까. 유난히 일어나는 것이 힘들었고 잠을 잔 것인지 만 것인지 오히려 자는 동안 피로가 더 쌓인 것 같았다.
대충 자리에서 일어난 몇 번의 스트레칭을 통해 잠을 깨고 몸을 푼 레안은 동굴 밖으로 나왔고, 그곳엔 다른 이들이 뭐라뭐라 주절주절 떠든 것에 비해 입다물고 조용히 있던 한 사내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먼저 가지. 기다렸다 인사하고 가기엔 늦을 것 같으니. 우선 고맙다고 해두지.”
레안의 말에 눈을 감고 있던 사내, 시오린이 눈을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와 시선을 마주친 레안은 무언가 오싹거림을 느꼈다. 생소한 기운. 무엇이지? 그러나 그녀가 그것을 인지하고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내기도 전에 그 기분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녀는 그곳을 떠났다. 하지만 그곳을 떠나면서도 그녀는 괜스레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묘한 분위기의 조합이라. 어째 느낌이 좋지 않은 것이 그들이 평범한 일행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니까.
빌어먹을!
알 듯 하면서도 좀처럼 잡히지 않는 기운에 레안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더 많은 곳을 돌아다녀야 했다. 그리고 범위가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넓은 것이 상당히 수상했다. 물론 이번 사건을 그때와 같은 것이라고 처리하기엔 보이는 모습이 다르긴 했지만 확실히 무언가 달랐다. 일반적인 마물의 상태와 그 숲의 상태라고 보기엔.
근위 기사단의 보고서에는 그저 B급의 마물이 출몰한다는 곳에 A급 및 S급 마물들이 출몰해서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부상을 입었다고 했으나 애초에 그거 자체가 웃긴 것이었다. 그도 그런 생각을 했기에 자신에게 친히 보고서까지 넘겨준 것이겠지만.
기본적으로 마물들은 거주지를 옮기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출몰하는 곳에서만 출몰하고,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그곳에는 다른 마물들이 침범하지 않는다. 그리고 B급 마물과 A급 및 S급 마물들이 출몰하는 지역 자체가 달랐다. 그러니 B급 마물이 출몰하는 곳에 A급 및 S급 마물이 출몰하는 것은 상당히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확실히 보고서에 표시된 지역들에선 미미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기운의 틀어짐이라고 해야 하나?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 뭔가가 이상했다. 원래 B급 마물의 출몰 지역은 그곳에 사는 마물들의 마기나 기운이 묻어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뭔가 다르다. 다른 것이 끼어들어 그 냄새를 흐리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래서 그곳에 B급 마물이 아닌 다른 마물들이, 그것이 A급이든 S급이든 출몰하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과연 그들의 감각에 혼란을 줄 만한 것이 무엇일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룡의 짓이라고 보기엔 아직 증거가 부족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마룡때문이라면 마룡이 흘린 마력이 느껴져야 할 테니까.
그렇게 한참을 이 숲 저 숲을 헤매던 레안은 가까스로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젠장.
이것은 마룡이 맞았다. 비록 흐릿하긴 하지만 분명 마룡의 마력이었다.
이미 한번 본 적도 있고, 실제 싸우기도 했으니 마룡의 마력을 못 알아볼 리는 없었다.
하아. 설마설마 했었는데. 좋지 못한 상황에 레안이 표정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야 했다. 혹시나 해서 하륜에게 어떤 언질도 주지 않았고, 또 마룡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하륜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 혹시나 이런 상황에서 그가 부상이라도 입게 된다면 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뻔했다. 물론 그러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지만 최악의 가능성을 생각해두는 것이 좋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하륜을 임무에 보내지 말고 그냥 방구석에 쳐박아 두는 것이었는데.
하지만 후회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한시라도 빨리 황성에 돌아가 하륜의 상태를 파악하고 그를 진단하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의 몸에서 미묘한 움직임이 보인다면 그에 대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겠지.
어쩌면 이제야 선택을 하게 될지 몰랐다. 이왕이면 최대한 늦추려고 했던 선택을.
과연 그는 어떤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대한 결과는 어떨까.
답지 않게 긴장하는 몸을 느끼며 레안은 서둘러 황성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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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반 현대의 램프와는 그 성질이 다른데, 불을 피우고 그 불이 꺼지지 않게 보호막을 쳐놓은 것을 말한다. 즉 보호막에 보호되어있는 불을 말한다.
- 작가의말
펜그렘 님/ 레드러너 님 댓글 감사합니다.
지난 화는 우울한 하륜 이야기였지만 다시 본편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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