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그녀의 정체는?
4월의 시작과 함께 봄의 기운을 알리는 따사로운 햇살을 바라보며, 16세 정도의 다소 어려보이는 소녀가 녹색의 커다란 나무 아래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소녀는 다소 따분한 표정으로 황성 앞의 넓은 훈련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젊은 신입 기사들이 한껏 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소녀는 한 기사를 빤히 쳐다보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귀찮음을 가득 담은 모습으로 땀에 쩔은 기사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치며 한 기사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소녀가 그 기사에게 도착함과 동시에 소녀의 기척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검을 휘두르던 기사들의 시선이 알 수 없는 괴성으로 인해 일제히 소녀와 한 기사에게로 향했다.
“너 병신이야?”
느닷없이 뒤통수를 맞고 괴성을 지른 한 기사는 소녀의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과연 저런 소녀가 때린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아픈 뒤통수도 문제였지만 소녀의 말이 너무도 어이없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치솟아오르는 분노에 당장이라도 소녀를 엎어놓고 때리고 싶은 충동도 일었지만 소녀의 모습이 바람이 불면 쓰러질듯 너무도 연약해보여 차마 때릴 수는 없었다.
“레이디, 이게 무슨 짓입니까?”
“뭐가?”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던 기사는 자신의 행동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되묻는 소녀의 모습에 잠깐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곤 떨리는 목소리로 소녀에게 다시 말을 꺼냈다.
“훈련 중인 기사는 함부로 건드리시면 안됩니다.”
“난 훈련 중인 기사 안 건드렸는데?”
소녀의 말에 기사의 손은 금방이라도 때릴 듯 주먹이 쥐어졌다. 너무 당당하게 자신의 행동을 부정하는 소녀의 모습에 기사는 순간 자신이 고된 훈련으로 인해 환각을 겪은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뒤통수에서 아직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고통은 단지 환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방금 저의 뒤통수를 때리지 않았습니까?!!!!”
“응, 때렸지.”
격앙된 기사의 모습과는 다르게 대답하는 소녀의 얼굴은 상당히 평온하다 못해 따분해보였다. 그 모습에 더 열이 받은 듯 기사의 꽉 쥐어진 주먹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런 기사의 모습을 보면 비웃음을 짓던 소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넌 훈련 중인 기사가 아니잖아?”
“그게..무슨 소리입니까?”
“말그대로. 너는 훈련이 아니라 삽질하고 있었잖아. 그러니 훈련 중인 기사가 아니지. 삽질 중인 기사지. 아니다, 기사도 아니네. 그냥 삽질 중인 비실한 놈이네.”
소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기사의 얼굴은 아까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심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래도 인내심이 강한 기사였는지 꽉 쥐어진 주먹을 하고도 휘두르지는 않았다.
“레이디가 어.려.서 잘 모르시나 보군요. 제가 하고 있던 것은 훈련이었으며, 기사의 인을 받았으니 기사..가 맞습니다.”
“지랄하고 있네. 그래, 뭐 그렇게 삽질하는 것도 꽤 힘든 일이니 훈련이라고 치자. 그런데 그 실력으로 기사라고? 지나가던 F급 마물도 웃겨서 내장 터져 죽을 소리 하고 있네. 기사는 얼어죽을. 그 기사의 인 가짜 아니야? 아니면 지나가던 F급 마물도 웃겨서 내장 터져 죽게 하는 능력이 뛰어나서 기사가 된 건가?”
소녀의 깊은 모욕감을 주는 말에 아직 어려서 그런다고 애써 자신을 진정시키던 기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검을 빼들고 베어버릴려고 했지만 자신을 지켜보는 다른 기사들의 시선으로 인해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른 기사들이 없었다면 자신은 분명 이 소녀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망설임 없이 죽였으리라. 그 정도로 기사는 심한 모욕감으로 인해 화가 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긴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전혀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다시 입을 열어 기사의 분노 게이지를 상승시키게 했다.
“꼴에 자존심은 있나보지? 내 말에 그렇게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부르르 떨며 화를 참는 것을 보면? 그런데... 난 이해가 안 되네? 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말이야. 하긴, 뭐. 실력도 없는 놈들이 지 잘났다고, 남들이 뭐라고 한 소리하면 눈 돌아가 달려든다지?”
뚜득.
겨우겨우 이어지던 이성의 끈이 끊어지며 기사는 이성을 잃고 소녀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 모습에 지켜보던 기사들은 당황하며 말리려 했지만 소녀의 말이 심하긴 했다는 생각에 잠시 움찔했다. 그리고 그 망설임으로 인해 기사의 검은 이미 소녀에게 닿았고, 기사들은 아연해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어린 소녀의 죽음을 눈에 담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몇 초간 눈을 감았던 기사들은 눈을 뜨자 보이는 상황에 당황했다. 분명 기사의 검에 베어 피를 흘리며 쓰러진 소녀의 모습을 상상했건만 눈에 보이는 상황은 전혀 달랐다. 쓰러진 것은 소녀가 아니라 기사였다. 피를 흘리고 있는 것도. 무슨 상황인가 싶어 당황하는 사이, 소녀는 복날 개 패듯 기사를 밟았다. 그리곤 정신을 차리며 소녀를 말리려 소녀에게 다가오는 기사들을 향해 무언의 시선을 던지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렇게 소녀가 떠난 자리에는 피투성이로 신음을 흘리고 있는 기사와 멍 때린 표정의 기사들이 덩그러니 버려져 있었다.
소녀가 떠나고 몇 분후 운동장에 온 근위 기사단 총 단장인 카인은 기사들의 이상한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은 분명 검을 1000번 휘두르기 전까지 절대 쉬지 말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하나같이 검을 휘두르지 않고 멍하니 있는 모습에 차분한 그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다들 뭐하고 계신겁니까?”
미미한 화를 담은 카인의 목소리에 기사들은 다들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다들 당황하며 어쩔줄 몰라했다. 다소 엄격한 그의 성격 탓에 조금이라도 훈련을 게을리하거나 따르지 않으면 바로 몇배로 힘든 훈련을 받게 되는데, 하필이면 그 소녀로 인해 훈련을 멈추고 멍 때리고 있을 때 나타나다니. 애써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가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의 표정엔 절망감과 두려움이 잔뜩 서려있었다. 그런 그들을 카인은 무심하게 바라보며 1000번에서 2000번으로 늘리려는 순간, 그의 눈에 한 기사가 보였다. 온 몸에 피를 묻힌 채 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어있는 기사의 모습에 무심하던 카인의 얼굴에 선명한 표정이 생겼다.
“혹시 여기 쓰러져 있는 이분, 16세 정도로 보이는 청발에 청안을 가진 소녀와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응? 카인의 입에서 나올 살벌할 말을 기다리며 겁에 질려있던 기사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카인의 말에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서 대답하라는 듯 살벌하게 자신들을 조여오는 카인의 기에 한 기사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그게.. 단...장님이 말씀하신 그 소녀..와 그 기사가 말..싸움을 조금... 했습니다.”
과연 그것을 단지 말싸움을 조금 한 것이라고 말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는 기사의 말에 카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렇게 된 것이었군. 암담한 사실에 카인의 표정은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 안그래도 감정없는 인간이라며 신입 기사들의 두려움을 한 몸에 받던 그였기에 그런 그의 어두운 표정은 기사들에게 진한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제가 미처 중요한 사실 하나를 말씀드리지 않았나 봅니다. 제가 여기서 지켜야 할 사항 몇가지를 말씀드렸는데 그 중 반드시, 꼭 지켜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16세 정도의 청발에 청안을 한 소녀는 절대 건드리지 말 것, 절대 복종할 것,입니다. 이것만큼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꼭 지켜야합니다. 물론 다른 사항들도 반드시 지켜야하지만 말입니다. 다른 사항을 어기면 그냥 벌점 좀 받고, 훈련 좀 받고 끝나게 되겠지만, 이것을 어기면....... 그냥 지옥 구경 가는 구나,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운이 좋으면 기사의 인이 새겨진 이마에 낙인을 찍어 박탈하는 것이 아닌 그대로 이마의 가죽을 벗겨 기사의 인을 지운 후, 인적 드문 숲속에 얼굴만 내놓고 묻히게 될 것입니다. 다행히도 살인을 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 죽게 냅두진 않겠지만 죽기 직전의 요단강을 구경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까 말했듯 운이 좋을 경우에 해당하는 사항으로 운이 나쁘면 어떻게 될지는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운이 나쁜 기사의 후일담을 하나 이야기 하자면 다행히도 그분은 기사의 인을 박탈당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기사의 인을 포기하고 제이로 제국을 떠났습니다. 그 이후로 파란색만 보면 두려움에 떨며 정신을 놓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며 오줌을 싼다고 합니다. 그러니 절대 그 소녀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분은 황제조차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시는 분이시며, 대륙에서 최강이라 불릴 정도로 강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훈련하고 있는데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놀려도 절대 화내선 안되며, 느닷없이 알몸으로 훈련을 받으라고 해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기사 생활 편안히 하고 싶다면 말입니다.”
카인의 살벌한 말에 기사들 사이에 싸늘한 정적이 감돌며, 도대체 그 소녀가 누구인가 하는 의문에 휩싸였다. 하지만 다들 분위기가 너무 싸늘하여 차마 물어보진 못하고 있었는데 한 기사가 용기 있게 손을 들어 소녀의 정체를 물었다. 그리고 이어진 카인의 말에 기사들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싸늘한 분위기와 함께 돌이 되어 굳어 버렸다.
“그분은 황실 기사단의 총 단장이신 레이시안 님입니다.”
돌이 되어 굳어버린 기사들이 좀처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멍하니 있다 카인의 검을1000번에서 2000번 휘두르는 것으로 늘린다는 살벌한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검을 휘두르고 있을 무렵, 그 모든 사건과 충격의 원인인 레이시안은 느긋한 모습으로 자신의 집무실에서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며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 중 세명의 기사를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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