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오늘도 시작이구나.
파란 하늘 아래 비춰지는 햇살을 맞으며 리엔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사가 되었다고 좋아한지 아직 반년도 되지 않았건만. 기사단 생활은 하루하루 자신을 좀 먹어갔다.
그래서 지금은 초심을 잃은 지 오래, 지금의 상태로는 기사 따위 떄려치고 싶어...
그런 그를 바라보는 하륜과 카엘도 그리 표정이 좋지는 못했다. 물론 황실 기사단인 백호단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이미 그것을 목표로 한 바 어느 정도 힘들거라는 것은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힘들거라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자신들이 이토록 힘겨워할 정도로 힘들 수련이 있을 거라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백호단에 들어온지 한달도 지나지 않았건만. 이미 셋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설사 자존심이 허락했다고 해도 과연 저 악마라고 불리는 단장이 자신들을 곱게 보내줄지..
백호단에 들어와서 느는 건 그저 단장인 라힌과 부단장인 바론에 대한 공포심뿐이었다. (여기서 하륜은 살짝 제외하도록 하자)
“그럼 제군들, 오늘은 가볍게 산행을 해보도록 할까요?”
정말 가볍게? 정말 가벼울까?
라힌의 산뜻한 미소와 대조되게 그를 바라보는 세명의 표정은 그저 우울 모드였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라힌도 안쓰러운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상큼한 미소일지도 모르지만.
“역시 그동안 훈련은 다소 힘들었던 모양이네요.”
“..........”
그게 다소냐, 라는 표정으로 리엔이 아주 살포시 그를 노려봐주었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제가 아닌 다른 분이 제군들을 맡아주시기로 했지요.”
싱긋 웃는 라힌의 뒤로 상큼한(?) 모습의 레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걱.
발랄한 라힌의 모습과는 반대로 레안의 등장을 확인한 하륜 패거리들의 표정은 더없이 싸늘해졌다.
“그럼 시작해볼까?”
역시. 그러면 그렇지. 뭐가 평범한 산행이고, 뭐가 우리를 위한 배려냐!!
뒤에서 빠르게 자신들을 쫓아오는 A급 마물 멧돼지를 보며 리엔은 속으로 레안을 향한 분통을 터뜨렸다.
실전과 같은 훈련을 통해 실력을 향상시키겠다더니 이건 실전과 같은 훈련이 아니라 그냥 실전이었다. 세상에, 빠르기로는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다는 마물 맷돼지를 풀어놓고 맷돼지에게 잡히지 않고 무사히 코스를 돌라니. 그것도 일반 길도 아닌 길따위 존재하지도 않는 산에서!!!
그리고 C급의 맷돼지도 겨우겨우 따돌릴 수 있을까 말까인데 A급 이라니!!
이건 진정 자신들을 죽이려고 마음 먹은 것임이 틀림없었다.
“너 느려.”
갑작스레 옆에서 들려오는 레안의 목소리에 놀라는 것도 잠시, 리엔은 엄청난 고통과 함께 맷돼지가 있는 곳으로 내던져졌다.
“이게 무슨 짓이야!!!!!!”
바로 지척에서 느껴지는 맷돼지의 거친 숨소리를 느끼며 리엔은 악독하기 그지없는 레안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죽기 싫으면 그럴 시간에 뛰는게 어때? 뭐 훈련 중에 기사 한명 죽는것 쯤이야 나에겐 별 일은 아니지만 네 목숨 날라가면 너에겐 큰 일일텐데 괜찮겠어, 꼬맹이?”
“으윽.”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자신의 옷깃을 물은 맷돼지의 손길에 리엔은 후다닥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레안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보다 앞.
리엔보다 살짝 앞선 카엘과 하륜 또한 지친 기색으로 쉴 틈 없이 달리고 있었다. 조금만 뒤쳐졌다 싶으면 레안이 나타나 뒤로 던져버리는 탓에 잠시의 휴식도 없이, 정말 처음의 전력질주 그대로의 속도를 유지하며.
하아하아.
드디어 한계에 도달했는지 카엘의 몸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들려오는 심상치 않은 숨소리에 한계라는 것을 느꼈지만 막상 저렇게까지 흔들리는 모습을 보니 동료로서 하륜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맘같아선 카엘을 기다려주며 그의 기운을 붇돋아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자신의 상황도 여의치 않았다. 세명 중에서 그가 가장 양호한 상태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말 그대로 세명 중에서 양호한 것이지, 그다지 좋은 상태라고는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카엘이 조금이라도 늦춰지자 어떻게 귀신 같이 알아채곤 멀리 던져버리는 레안을 보아라. 아무리 소중한 동료라지만 멈출수가 있겠는가? 아니, 멈칫 거릴 틈도 없다.
그렇게 동료의 정마저 끊어버릴 정도로 이를 악물고 달리던 하륜의 눈 앞에 드디어 도착점이 보였다.
이제 저기만 가면..........
후우.
도착점에 도착함과 동시에 하륜을 정신을 잃었다. 그러면서 아주 살짝 카엘의 비명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일어났네?”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는 하륜의 눈에 자신과 같이 달렸건만 처음의 모습과 변함이 없는 레안이 보였다.
‘역시 총 단장은 총 단장이라는건가.’
“일어났음 쟤들 좀 깨워. 오늘 안으로 계획한 훈련 끝내려면 서둘러야 하니까.”“또 훈련...입니까?”
그게 끝이 아니었던건가.
아직도 남아있는 훈련의 존재에 변화가 드물던 하륜의 표정이 잔뜩 깨어졌다.
“싫으면 하지마. 다만 훈련 못 끝낸 녀석은 이 산 벗어날 생각 안 하는게 좋을거야. 뭐, 내가 보내준다고 해도 과연 자력으로 이 산을 나갈 수 있을까 싶긴 하다만은.”
“안 싫습니다.”
남몰래 한숨을 내쉬던 하륜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옆에 쓰러져 있는 카엘과 리엔을 다소 과격하게 깨우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자신들의 휴식을 방해하지 말라는 듯, 그들의 거센 반항이 있었지만 고된 훈련 탓에 날카로워진 하륜은 과감하게 그들의 몸을 밟음으로써 무마시켰다.
“싫어요, 싫어, 절대 싫어!!!!!”낭떠러지 끝에서 리엔은 당돌하게 레안에게 거절의 의사를 전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하륜과 카엘의 표정은 복잡미묘했다. 응원하면서도, 또 안쓰러운.
도대체 어쩌자고 저 사람에게 대들 생각을 하는건지. 물론 저게 성공해서 훈련이 취소되거나 약화된다면 SS급 마물을 만나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는데 그가 혼자 객사해 죽는 그런 축복과도 같겠지만.
“그래? 싫어? 싫단 말이지?”
“네, 싫어요!!!”
불길한 느낌에 잠시 멈칫하던 리엔은 끝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나도 딱히 니 의사를 물어본 건 아니야. 상관 없고. 그러니까 안녕. 잘 살아나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리엔은 낭떠러지 밑으로 사라졌다. 커다란 비명소리와 함께.
“잘 봤지? 저렇게 떨어지고나서 알아서 이 곳으로 무사히 돌아오면 되는 거야. 쉽지?”
전혀요.
하륜과 카엘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그럼 자, 그럼 시작해볼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이 그대로 하륜과 카엘은 리엔이 그랬듯이 낭떠러지 밑으로 내던져졌다. 물론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으면 안되니 다소의 장치를 해둔 채로.
“이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야.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잔인할 수가 있어?”
망신창이가 된 리엔은 힘들게 절벽을 타고 오르며 중얼거렸다.
“그냥 좀 닥치고, 끝내자. 힘들다.”
답하는 카엘의 음성에 피곤한 기색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넌 안 힘드냐?”
아까부터 말 없이 묵묵히 몸을 놀리는 하륜을 보며 카엘이 물었다.
“네가.. 보기엔... 멀쩡해 보이나?”
띄엄띄엄 들리는 그의 목소리엔 명백한 피곤과 분노가 담겨있었다.
그래, 오늘의 훈련은 인내심 강하고 여유롭던 하륜마저도 분노케 할 만큼 빡셌다.
“크아, 정말 죽겠다.”
“나도...”
답지 않은 하륜의 약한 소리였다.
그리고 몇시간 뒤, 그들은 겨우 레안이 있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훈련을 받은 걸까. 분명 자신들이 이곳에 막 도착했을 때만 해도 해가 쨍쨍했건만 어느새 밤이구나. 달 참 예쁘구나.
“한명 정도는 떨어져서 뼈가 달랑거리는 목각 인형이 될 줄 알았는데 용케 다들 멀쩡하네?”이게 어디가 멀쩡하냔 말이냣!!
리엔의 눈에 이는 불꽃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아슬했지만 고된 훈련으로 지친 리엔은 눈 깜빡일 힘도 없었다. 다행히도.
“그럼 이제 돌아가볼까?”
설마 다시 걸어서 그곳으로 가야하는 건가?
망신창이가 된 자신들의 몸을 바라보며 카엘과 하륜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독하구만.
유난히 오늘따라 밤하늘의 달이 쓸쓸해보였다.
“오늘은 특별히 내가 집으로 데려다주도록 하지.”
오오.
사라진 그들의 눈에 다시금 살짝 생기가 돌았다.
그리고 그들은 레안에게 짐짝처럼 매달려 자신들의 숙소로 향했다. 차라리 걸어가는게 나을 뻔 했다는 생각을 하며. 그만큼 레안의 호의는 과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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