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가끔 싸우는 것도 좋지.
비가 올려나?
은은히 느껴지는 물의 냄새에 레안이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얼마 만에 내리는 비인지.
원래부터 비가 많이 내리는 나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올해엔 유난히 비가 적게 내렸기에 오랜만에 비를 볼 생각에 레안은 들떴다.
물론 워낙 긍정적인 표정 변화는 미미해서 잘 드러나진 않았지만 드물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나름대로 기쁨의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리엔이 씩씩 거리며 당당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뭐냐?”
자신의 오붓한 티타임을 방해 받아 잔뜩 기분이 나빠진 레안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이에 리엔이 분기탱천한 모습으로 거칠게 입을 열었다.
“저 청룡단에서 나가겠어요!!”
호기 있는 모습으로 내뱉는 리엔의 말에 레안의 표정이 더욱 살벌해졌다.
“그래서?”
“나가겠다구요!”
“그래서?”
“아우 씨, 말 몰라요? 나가겠다구요, 나가겠다구요!!!”
대놓고 무시하는 리엔의 말에 레안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흉흉한 모습으로 리엔에게 다가가며 살기를 흩뿌렸다. 그제서야 움찔하며 레안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한 리엔이었지만 원래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다던가? 그는 당당히 고개를 쳐들고 레안을 마주 바라보았고, 그는 결국 줄에 온 몸이 칭칭 감겨 또다시 거꾸로 매달려야 했다.
“정확히, 다시 말해.”
도대체 이 상태로 어떻게 말하라는 것인지 욱하는 마음이 생겼지만 이 이상 또 뭐라 그랬다간 그때는 줄 끊긴 번지점프를 시킬 것 같은 느낌에 리엔이 대충 마음을 수습하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완전히 그 감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 말하는 리엔의 표정은 뚱해있었다.
“전 기사를 하려고 기사단에 들어왔어요. 그런데 맨날 하는 거라곤 청소에 빨래에, 거기다 맨날 지 심심하면 갖고 노는 단장에!!! 며칠 전에는 자기 다리 아프다고 하루 종일 업고 다니게 하지 않나, 맨날 심심하다면서 자기랑 술래잡기 하자고 하지 않나, 거기다 삼일 전은 어떻구요!! 다짜고짜 부르더니 호흡을 기르자면서 연못 속에 절 쳐박아 놓아서 익사할 뻔한 것은 물론 감기까지 걸렸다구요. 독하디 독한 독감에 걸려서 겔겔 거리고 있는데, 와서 하는 말이 이냉치냉이라면서 감기는 감기로 낫게 하는 것이다 하면서 다시 또 절 연못 속에 던져 넣었다구요!! 더 이상 이런 취급 받으면서 못 살겠어요!”
하긴.
운동회 때 졌다고 구멍 난 통에 물 가득 담게 할 때부터 참 독특하구나 싶긴 했다만은 저건 또 신선한 생각이라는 생각에 레안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하지만 또 잘 생각해보면 당하는 입장에서는 꽤 고역이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자신이 뭘 어쩌랴.
이미 승급 심사 기간은 지났기에 이제와서 임의적으로 단을 이동시킬 수는 없었다. 물론 그녀가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냐며 뭐라 그러면 할 말은 없겠지만 솔직히 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닌 귀찮고 않고의 문제였다. 어찌하였든 그녀도 나름 황제 밑에 있는 수하나 마찬가지였기에 정해진 규칙에 어긋난 일을 하려면 황제에게 이에 대한 사유서와 함께 보고서를 올려야 했는데 그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다. 특히나 황제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싫은 그녀였다. 그랬기에 레안은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뿐이었다.
어떠한 대꾸도 없이 다시 자신의 일로 돌아간 레안의 모습에 열심히 열변을 토하던 리엔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그렇게 간절한 모습으로 무슨 말을 했으면 대꾸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아니, 대꾸보다는 어떠한 대책을 제시해줘야 되는 거 아닌가?
이렇게 깔끔히 무시를 당하려니 기분이 상한 리엔이 욱한 마음에 야, 야 거리며 레안을 불렀다. 그러나 그럼에도 대답이 없자 리엔이 야, 꼬맹이 하며 소리를 질렀고. 레안은 슬쩍 일어나 리엔을 쳐다보고는 그를 창밖에 거꾸로 매달아버렸다. 졸지에 아슬아슬한 게임을 하게 된 리엔은 마구 소리를 지르며 반항했지만 레안은 그를 상큼히 무시하며 밖으로 나갔다.
오랜만에 주작단의 훈련장에 놀러온 레안은 자신의 눈에 비치는 상황에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 도대체 이 건 뭐하자는 것일까?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망신창이가 되어있는 유란과 제나를 바라보며 레안은 고민에 잠겼다. 그리고 그 사이 유란과 제나는 상대방을 향하여 검을 휘둘렀다. 단순한 투기가 아닌 살기를 비치며 싸우는 그 모습에, 거기다 그 싸움의 여파인지 구석에 구겨져 콜록 거리는 기사단원을 보며 레안은 그들을 말리기로 결정했다. 원래부터 단장이나 부단장의 대련의 경우는 항상 총 단장인 그녀의 승인을 받고 정해진 곳에서 이루어져야 했기에 말리는 것은 당여한 것이기도 했지만.
순식간에 그녀에 의해 제압되어 바닥에 내팽겨친 유란과 제나는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은 듯 씩씩 거리며 서로를 노려보았고, 이에 무시당했다고 여겨진 레안은 다시 그녀들을 향해 검집째로 그녀(?)들을 때림으로써 잠시 소강되었다.
도대체 왜 싸운 것인지 물어보려던 레안은 옆 훈련장에서 들려오는 기막힌 소리에 그 생각을 잠시 접고 그녀들을 데리고 옆 훈련장으로 향했다.
하아?
오늘이 무슨 날인가?
라이너와 카렌이 서로 싸우고 있는 모습에 레안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원래부터 사이가 안 좋아 싸울 듯 말듯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지만 전에 싸웠다 된통 혼난 적이 있었기에 그동안 싸우지는 않고 있었는데 이렇게 거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자니 어떻게 밟아야 잘 밟았다 하는 소문이 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이 놈들의 후폭풍은 얼마나 큰지 훈련장 반이 날아갈 듯한 분위기였고, 그들 나름대로 막으려고 한 것인지 피를 흘리며 구석에 짱 박혀진 기사 몇몇이 보였다.
하아.
말려야 겠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쉰 레안은 그대로 그들 사이로 달려나가 그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고, 그들 역시도 바닥에 던져졌다. 그럼에도 식지 않는 살기에 레안은 아주 사뿐히 그들을 구타했다. 이어 또다시 연달아 들리는 소리에 레안은 청룡단으로 향했고, 자신의 집무실로 향하는 레안의 손에는 총 6명의 사람이 매달려 있었다.
서로의 싸움, 그리고 레안에게 맞은 탓에 온 몸에 영광스런 상처를 매단 6명은 서로 사이좋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레안에게 맞았음에도 서로에 대한 앙금은 사라지지 않았는지 그들 사이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레안이 없으면 금방이라도 다시 싸울 듯한 분위기에 레안의 기분은 급격히 가라앉아 있었다.
“말해. 너부터.”
가장 먼저 지목 당한 유란이 움찔거리며 옆에 있던 제나를 노려보았다. 모든게 너때문이야 하는 의미를 담은. 그 시선에 제나가 반발하듯 몸을 움직였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감히 레안의 저 살기어린 모습 앞에서 당당히 싸울 만큼 간이 크지 못했다. 아니, 간보다도 실력의 문제랄까?
“그냥, 저게 먼저 시비 걸잖아요.”
머뭇거리면서도 또렷이 말한 유란의 시선은 올곳이 제나를 향해 있었다.
이에 불만이라는 듯 제나가 노려보듯 마주 응시했다.
“할 말 있으면 해.”
겨우 자신에게 돌아온 발언권이 제나가 유란을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단장님이 늦게 오셔서 다음부터 일찍 오라고 한마디 하니까 괜히 욱하시더니 저보고 여장남자니 뭐라 하셔서 저도 그냥 대답을 해드린 것 뿐이었어요. 그런데 괜히 자기 혼자 찔려서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셨다구요.”
“어머, 그게 그냥 대답이었어? 그 띠꺼웠던 표정은 그냥 장식이었어? 아주 말투에 가시가 철철 넘치더만. 아주 잡아먹을 모습이더만?”
“설마요, 아마 단장님이 짓고 있던 그 표정보단 덜하면 덜했지, 결코 더하진 않았을 걸요?”
“호오, 그래? 네가 아주 맞고 싶어 환장했구나?”
“어머, 무식하시기는. 정말 여자 맞으세요? 남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어 보이시는데..”
“뭐?”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유란이 벌떡 일어섰고 이에 질세라 제나 역시 일어서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대로 줄에 동동 묶여 구석에 버려졌다.
겨우 둘을 진정시킨 레안이 여전히 아니꼬운 시선으로 라이너를 응시했다.
“일을 시킨 것 뿐이야.”
“정확히 말씀 하십시오. 라이너님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게 시키셨고, 그것을 제가 거절했습니다. 그에 화를 내시더니 강압적으로 협박을 하시기에 제 일이 아닌 것을 제가 할 이유가 없다고 말씀드렸고 검을 드셨습니다.”
라이너의 살벌한 시선이 카렌을 향했고, 또 싸움이 일어나려는 분위기에 레안이 그들 사이에 자신의 기운을 흘려 넣어 시야를 막았다.
“넌?”
“이안만 보면 답답해서 못 살겠어요, 뭐 좀 시키려고 하면 자고 있고, 자고 있는 것 깨워서 시키면 다시 자고!!”
“그래서?”
“어제 임무를 보냈는데, 세상에. 그녀석이 자느라 까먹은 바람에 내가 가야 했다구요!! 쳇, 내가 얼마나 바쁜 몸인데!! 게다가 나대신 애들 훈련 좀 시켰더니 귀찮다고 그냥 검 휘두르고, 훈련장만 돌라고 시켰다구요!! 그게 무슨 훈련이야!”
“어제의 임무라면 내가 너 시킨 걸로 알고 있는데? 내가 분명 이안 부려먹지 말고 네가 가라고 했던 것 같은데?”
레안의 말에 류가 찔렸는지 잠깐 시선을 회피했다. 하지만 뻔뻔한 류가 절대 그 정도로 무너질 리는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도움이 안 된다구요!! 장난 좀 칠려고, 내가 나무 위에서 양동이 좀 들고 있다가 사람이 오면 부어버리라니까 그대로 자버리고. 거기다 이안이 간지럼 타고 있는 거 알아서 자고 있을 때 몰래 간지럼 태우니까 반응도 없고.!!”
어이없는 이유에 레안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저 말을 들어오면 못해먹겠다는 류가 아니라 이안이 해야 될 것 같은데?
하아, 도대체 뭐하자는 건지.
“어찌됐든 서로 불만이라는 거지?”
레안의 질문에 각자 다른 모습으로 찌그러진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자고 있던 이안마저도.
“그럼 방법은 하나 뿐이네.”
말을 마친 레안은 아주 섬뜩하고도 무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겨우 이안에 의해 집무실로 올라온 리엔조차 움찔하며 놀랄 정도로.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했다.
“역할 바꾸기 놀이를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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