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기축통화 2
남태평양의 드넓은 바다 위에 1천만 명에 육박하는 난민들을 태운 선박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목표지역은 전 세계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한 대한신국이었다.
허나 대한신국 정부는 더 이상 난민을 수용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한국 해경은 그들에게, 호주와 뉴질랜드에 난민신청을 하라는 해상 방송을 하루종일 전달했다.
그 무렵, 호주와 뉴질랜드의 수상이 대한신국 세종시에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세종시 수상 관저.
정찬수는 면전에 나타난 호주의 아난데일 수상과 뉴질랜드의 팔레트 수상 등과 심도 깊은 논의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대한신국은 이미 997만명에 달하는 난민들을 수용한 상태에요. 더 이상 난민들을 수용할 여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호주와 뉴질랜드 정부가 나머지 난민들을 수용하십시오."
호주의 아난데일 수상이 곧바로 난색을 표명했다.
"호주 인구는 3500만 명에 불과해요. 그런 상황에서 수백만 명에 달하는 난민을 수용할 경우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될 겁니다. 그리고 난민들을 수용할 자금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뉴질랜드의 팔레트 수상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우리 뉴질랜드는 인구가 700만 명 수준입니다. 그런 처지에 최소 수백만 명으로 예상되는 난민을 수용하는 건 말이 안됩니다."
아난데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더구나 지금 현재 남태평양에 몰려든 난민들은 태반이 일본인 난민입니다. 대한신국과 나름 인연이 깊은 국가의 난민이죠."
찬수가 양팔을 맹렬히 저으며 대꾸했다.
"그건 얼토당토 않은 말씀입니다. 우리 대한신국과 일본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점을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팔레트 수상이 곧바로 반박했다.
"역사적으로 일본과 한국은 같은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아는데, 내 말이 틀렸습니까?"
찬수가 고개를 완강히 저었다.
"아무튼 우리 대한신국과 일본은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양국이 알아서 난민을 수용하십시오."
그리 말하며 그들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노골적인 축객령이었다.
그런 탓인지 아난데일과 팔레트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 뒤, 인사도 생략한 채 장내에서 재빨리 사라졌다.
*
찬수와 함께 수직 이착륙 전용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기를 얼마 후, 남태평양에 정박 중인 수만여 척의 대형 선박이 창밖에 드러났다.
내 옆에 동승한 찬수에게 물었다.
"난민들의 출신 국가를 말씀해 보세요."
그가 즉답했다.
"900만 명 정도는 일본 난민이고, 서유럽과 미국 쪽 난민도 10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수용한 난민들의 대다수도 일본 난민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런 이유로 호주와 뉴질랜드 정부에 일본 난민들을 수용하라고 공식적으로 전달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일본 난민을 수용할 생각이 없었다.
"일단 미국과 서유럽 쪽 난민들을 수용할 준비를 하세요. 그리고 일본 난민들이 승선한 선박은 군함을 이용해서 호주와 뉴질랜드 쪽으로 인도하십시오."
"말씀대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그날 밤.
신국은행의 김영찬 행장을 대동한 채.
청와대 인근의 비밀 시설로 들어섰다.
지하 100미터 부근까지 내려가자 드넓은 핵벙커가 시야에 들어왔다.
핵벙커의 정중앙에는 500평 넓이의 초대형 금고가 자리하고 있었다.
내 뒤를 따르는 영찬에게 물었다.
"금고의 재질이 뭐죠?"
"2,000℃의 온도에서도 강도와 내구성을 유지하는 초합금으로 주조됐습니다."
"금고의 두께는 얼마죠?"
"3미터 안팎입니다."
"핵무기에 직격 당해도, 금고 안의 내용물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 수준인가요?"
"이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수준입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금고의 제어판에 두 눈의 홍채와 열손가락의 지문을 가져갔다.
홍채와 지문의 스캔 절차가 끝나자 육중한 금고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금고 안으로 들어서자 1킬로 사이즈의 골드바가 산더미처럼 쌓인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6조 달러(9,800조)에 상당하는 골드바였다.
영롱한 빛깔을 과시하는 골드바를 잠시 동안 감상한 후, 금고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지상으로 올라온 뒤.
비밀 시설을 지키는 무장 군인들의 면면을 유심히 살폈다.
군인들의 숫자는 5,000명 가량이었고, 300대의 전차까지 주변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 즈음, 나를 발견한 군인들이 일제히 오체투지의 예를 표했다.
"교황 성하를 뵈옵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장내에 천둥처럼 울려퍼졌다.
믿음직한 태도였다.
잠시 후, 그들에게 일어서라고 명한 뒤.
장내를 유유히 벗어났다.
*
오전 무렵.
미남 배우 송승한과 비슷한 얼굴로 역용한 뒤.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청와대를 나섰다.
상암동 인근의 난지천 공원으로 공간이동을 한 후, 스카이 엔터 사옥으로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겼다.
상암동 사옥 주변에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케이팝 팬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스카이 엔터에 소속된 케이팝 스타들을 지근거리에서 영접하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빌딩 출입구를 드나드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자신들이 애정하는 케이팝 스타를 목놓아 갈구하는 모양새였다.
그런 탓일까.
케이팝 팬들은 빌딩 입구로 들어서는 나에게도 과도한 관심을 드러냈다.
외부인은 출입이 일체 금지된 스카이 엔터 사옥에 아무렇지 않게 들어선 까닭이다.
그들의 뜨거운 시선을 뒤로한 채.
상암동 사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 모습을 발견한 보안 요원들과 임직원들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들에게 묵례를 취하며 탑층과 직통으로 연결된 엘리베이터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탑층에 들어서자 여비서가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그녀에게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달달한 커피 한잔 부탁해요. 그리고 오경수 홍보 팀장을 호출해 주세요."
"예. 회장님."
잠시 후.
달달한 커피를 음미할 찰나.
노크소리와 오경수의 목소리가 장내에 동시다발적으로 울려퍼졌다.
똑똑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며 경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면전에 공손한 자세로 서 있는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K 컨텐츠를 전문적으로 송출하는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하죠?"
경수는 K 콘텐츠의 전 세계적인 송출 시스템 구축 프로젝트를 입안한 장본인이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유튜브처럼 스트리머들의 개인 방송을 허용할 생각이신가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스트리머를 육성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오직 K 컨텐츠를 송출하는 전세계적인 시스템 구축에만 관심이 있는 거죠."
"그럼 서버 구축 비용이 유튜브에 비해서 많이 절감될 것 같네요."
"예상 비용이 얼마나 필요하죠?"
그가 신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북미와 유럽, 중남미, 동남아에 서버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구축하고, 수만 명에 달하는 현지 직원들을 고용해야 합니다."
"그같은 점을 감안할 경우, 초기 투자비용으로 최소 40조 이상의 자금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역시 중요한 건 돈 문제였다.
"그리고 유튜브에 K 컨테츠를 올리는 행위를 원천적으로 차단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추진하는 K 컨텐츠 전용 송출 시스템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겠군요."
"그렇습니다. 회장님."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화답했다.
"오 팀장이 제안한 사업에 관해서 긍정적으로 고려해 볼테니까 서버 시스템 구축 전문가들을 만나서 정확한 자문을 구하세요."
그가 감동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자신의 사업 아이템을 전폭적으로 수용해준 나에게 진정으로 감복한 모양새였다.
그날 밤.
콘서트를 끝마친 지연을 대동하고, 스카이 호텔 펜트하우스로 향했다.
우리는 펜트하우스 안에 들어서자마자 감미로운 프렌치 키스를 즐겼고.
그러기를 얼마 뒤.
침실에서 오붓한 시간을 만끽했다.
*
오후 무렵.
청와대 영빈관에 들어서자 G20 국가의 정상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오체투지의 예를 표했다.
그들은 나를 살아있는 생신(生神)으로 우러러 보았다.
내 초월적인 능력이 널리 퍼진 덕분이었다.
나를 향해 오체투지의 예를 취하고 있는 G20 국가의 정상들에게 묵직한 중저음의 바리톤을 내뱉었다.
"모두 일어나세요. 이제 본격적인 회의를 진행합시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들이 원탁의 테이블에 차례로 착석했다.
나는 상석에 좌정한 채.
일행의 좌장격인 프랑스의 미세랑 대통령에게 모두발언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런 탓일까.
미세랑이 나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인 후, 곧바로 모두발언을 내뱉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유일무이한 절대 초강대국으로 등극한 대한신국의 원화를 국제기축통화로 인정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원화를 기축통화로 선정하는 걸, 찬성하는 분들은 오른손을 거수해 주십시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미국과 중국을 제외한 18개국의 정상들이 일제히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압도적인 찬성 속에 원화의 기축통화 안건이 G20 정상회담에서 통과되는 순간이었다.
미세랑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다음 안건을 표결에 부쳤다.
"보호무역주의를 철폐하고 무조건적인 무역 자유화 정책에 찬성하시는 분들은 오른손을 거수해 주십시오."
이번에도 미국과 중국을 제외한 18개국의 정상들이 오른손을 번쩍 쳐들었다.
완전한 자유무역주의가 G20 정상회담에서 통과됐다.
내가 원하는 그림이었다.
미세랑의 발언이 끝나자, 내 옆에 앉아있던 정찬수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G20 국가는 무조건적인 무관세 자유화 정책을 실시해야 합니다."
"만약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를 부과하는 정책을 실시할 경우, 대한신국과 G20 국가는 해당국가를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무역 금수조치와 경제제재를 단행할 것입니다."
그러자 미국의 럼스팰트 대통령과 중국의 왕창방 국가주석이 불만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그들은 감히 자신들의 불만사항을 입밖에 내뱉을 수 없는 처지였다.
내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
브레턴우즈 체제(2차 대전 후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지정한 회의)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더불어 원화를 기축통화로 사용하는 서울 체제(원화를 기축통화로 지정한 회의)가 본격적인 막을 올리게 되었다.
그런 탓일까.
내 입가에 절로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날 밤.
청와대 관저의 서재에서 스타 방송에서 송출하는 K팝 음방 프로에 이목을 집중할 찰나.
문밖에서 이명수 경제부총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교황님."
"들어오세요."
이명수는 오체투지의 예를 취한 뒤.
내 눈앞에 공손히 시립했다.
그에게 물었다.
"서유럽에 제공할 원유의 공급 가격을 정하셨나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즉답했다.
"국제 시세의 70퍼센트 수준인, 1배럴에 12만원으로 원유를 공급하기로 서유럽 각국과 합의를 봤습니다."
"천연가스의 공급가격도 확정하셨나요?"
"그건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명수가 신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러시아는 유럽 전지역에 천연가스를 운송하는 파이프라인을 건설할 상태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천연가스까지 공급하면 러시아가 극렬하게 반발할 겁니다."
대한신국과 러시아는 불가근불가원의 관계였고.
한마디로 가깝지도 않고,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사이였다.
"러시아를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서유럽에 천연가스를 공급할 필요성은 없어 보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일단 서유럽에 원유만 공급하는 것으로 정책을 수립하세요."
"예. 교황님. 그런데 한가지 제안 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하실 말씀이 뭐죠?"
"국내에 공급하는 휘발유와 경유 등의 가격을 인상했으면 합니다."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부족한 세수를 확충하려는 계획인가요?"
"네. 최대 5억 명으로 추산되는 신규 일자리를 확보하려면 관련 예산 확보가 시급하거든요."
"법인세를 2배 이상 인상하면 되는 일 아닌가요?"
"법인세를 2배 가까이 인상한다고 해서, 부족한 세수가 충족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흐으음..."
내 입에서 절로 옅은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기를 잠시 뒤.
그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국내에 공급하는 휘발유와 경유 가격을 말씀해 보세요."
명수가 기다렸다는 듯 즉답했다.
"휘발유는 1리터에 200원에 공급하고 있고, 경유는 1리터에 150원 내외로 공급하는 중입니다."
"실제 주유소를 통해서 시중에 판매되는 가격은 얼마죠?"
"휘발유의 경우 1리터에 250원 정도고, 경유는 리터당 200원 수준입니다."
대한신국은 전 세계에서 기름값이 가장 저렴한 국가였다.
하지만 나는 기름값을 인상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서민과 중산층의 삶에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휘발유와 경유 가격을 인상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대기업에서 부족한 세수를 확충할 방안을 마련하세요."
"그리고 앞으로 절대 서민과 중산층의 삶에 부담이 되는 세수확대 정책에 대해서 나에게 건의하지 마십시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제야 명수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겁먹은 얼굴로 내 앞에 오체투지했다.
"송구합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실수를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발밑에 납작 엎드린 명수를 내려다보며 나직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알았으니까 이만 나가보세요."
그가 죽다 살아난 얼굴로 내 눈 앞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명수도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작자 같았다.
그러했으니 서민들의 삶과 직결된 휘발유와 경유 가격의 인상을.
아무렇지 않게, 내 앞에서 지껄인 것이리라.
- 작가의말
선작 추천 부탁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