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킬재벌 개망나니 4
이 회장이 현오동 토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직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성진자동차와 성진철강의 로비를 네녀석이 책임져준다면, 이곳에 대단지 아파트를 원가로 건설하는 방안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마."
고개를 완강히 저으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먼저 이곳에 2천세대 규모의 주상복합아파트를 원가에 건설하겠다는 계약서를 작성해 주세요. 그 전에는 워렌스 후보를 절대 만나지 않을 거니까."
"끄으응...!"
그의 입에서 앓는 듯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어차피 그는 내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이 게임에서 나는 절대갑이었고.
이 회장은 보잘 것 없는 을의 입장에 불과했다.
성진자동차는 성진그룹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유력시되는 민주당의 워렌스 후보가 200%에 달하는 징벌적인 반덤핑 부과 정책을 대선공약으로 들고 나왔다.
미국의 대선후보들은 자신들의 공약을 생명처럼 여겼다.
한국처럼 대통령 후보들의 거짓된 공약이 존재하지 않았다.
책임정치의 구현을 몸소 실천하는 모양새였다.
내 도움이 없으면 성진자동차와 성진그룹으로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질 운명이었다.
나는 이번 기회를 제대로 활용할 속셈이었다.
이 회장에게 될수록 많은 걸 얻어낼 찬스였다.
얼굴 가득 냉랭한 표정을 드러내며 그에게 내 명함을 건넸다.
"내일 오후 3시까지 성진건설 사장을 명함에 적혀있는 사무실로 보내주세요. 만약 제 시간에 성진건설 사장이 나타나지 않으면 아버지가 내 제안을 거부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런 탓일까.
이 회장이 나를 향해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정말 부자지간에 이러기냐? 네 놈은 육친의 정이 눈곱만큼도 없는 게냐?"
그의 아쉬운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나직한 어조로 대꾸했다.
"나는 30대의 재미 교포로 위장할 거니까, 성진건설 사장에게 내 정체에 대해서 절대 언급을 하지 마세요."
그말을 끝으로 장내를 유유히 벗어났다.
다음날 아침.
레지던스 호텔의 지하 피트니스룸에서 1시간 30분 동안 근력운동을 즐긴 후, 내 방으로 올라갔다.
마트에서 구입한 싸구려 기성복으로 갈아입자마자 노트북과 위장 마스크가 들어있는 백팩을 어깨에 맨 채. 2층 식당가로 내려갔다.
한식당에서 얼큰한 돼지김치찌개로 아침을 해결한 뒤, 편안한 발걸음으로 호텔을 나섰다.
성진자동차에서 출시한 중형 세단에 몸을 싣고 인근에 위치한 강천개발 사무실로 향했다.
빌딩 지하 주차장에 세단을 주차한 뒤, 15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사무실에서 커피를 음미하며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 회장은 내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분명 성진건설 사장을 나에게 보낼 것이 틀림없었다.
속으로 그같은 확신을 하며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그 뒤, 웹서핑을 즐기며 시간을 때우는데 전심전력했다.
그날, 오후 3시 무렵.
얼굴에 30대 동양인의 위장 마스크를 뒤집어썼다.
성진건설 대표에게 내 정체를 드러내기 싫었다.
나는 30대의 재미교포로 위장한 채, 부동산 개발사업을 진두지휘할 계획이었다.
그편이 나에게 여러모로 유리하다고 판단한 탓이다.
벽면에 내걸린 거울에 시선을 모을 찰나.
문밖에서 노크소리와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퍼졌다.
똑똑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세요."
직후 문이 열리며 양복 차림의 아저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나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명함 한장을 건넷다.
명함으로 시선을 모으자 '성진건설 이창용 대표이사'라는 글귀가 보였다.
예상대로 이 회장은 나에게 굴복했다.
그와 악수를 교환한 뒤, 유창한 영어를 내뱉었다.
허나 아저씨는 영어에 젬병인 탓인지, 내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결국 그에게 한국어를 내뱉었다.
"소파가 없으니까 테이블에 앉으시죠."
그리 말하며 사무실 한복판에 놓여있는 간이 테이블을 손짓했다.
잠시 후.
그에게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고층 주상복합아파트의 평당 건축비용이 얼마나 하죠?"
그가 기다렸다는 듯 즉답했다.
"주상복합아파트는 기둥과 보로 구성된 철골 라멘구조 방식으로 건설됩니다. 그런 이유로 방음과 층간소음이 적습니다."
"일반적인 아파트보다 평당 건축비용이 높다는 말인가요?"
이창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맞습니다. 층간소음에 취약한 벽식 구조의 아파트보다 최소 80% 이상 평당 건축비용이 높습니다."
그리 말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기를 잠시 뒤,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평당 건축비용이 주상복합아파트보다 현저히 낮은 일반 벽식 구조의 아파트를 건설하는 게, 더 현명한 판단 같습니다."
그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일반 아파트는 주택법의 적용을 받는 탓에, 고층 아파트로 건설하는 게 쉽지 않잖아요?"
이창용이 눈을 빛내며 열변을 토했다.
"대신 평당 건축비용이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관리비도 주복(주상복합아파트)보다 많이 낮은 편이죠."
"실수요자 입장에서 주복보다 장점이 많은 거죠. 분양도 당연히 주복보다 훨씬 잘 될 겁니다."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일반 아파트로 건설하면 층수를 어디까지 높일 수 있죠?"
"3종 주거 지역이니까, 최대 40층까지 올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단 말이죠?"
"네. 도련님."
이창용에게 내 요구를 밝혔다.
"30평대 기준으로 2천 세대를 건설할 예정이니까 평당 건축비용을 원가로 말해보세요."
그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원가를 공개하는 건, 회사 기밀인 관계로..."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슬쩍 봤다.
"이미 회장님의 허락을 받은 사안이니까 솔직히 말해보세요. 일반 아파트 기준으로 평단 건축비용의 원가를 말씀해 보십시오."
그제야 이창용이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조심스럽게 답변했다.
"대외적으로는 평당 460만원 내외라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202만원이 평당 건축비용입니다."
예상대로 실제 평당가격은 200만원 내외였다.
속으로 재빨리 계산을 해봤다.
2천세대 곱하기 30평은 6만평 안팎이었고.
6만평 곱하기 202만원은 1,210억이었다.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30평 기준으로 2천세대 규모의 아파트 건설원가가 1,210억 정도인가요?"
이창용이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계산을 하기 시작했고.
잠시 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대략 그 정도 금액이 나오는 것 같네요."
"좋습니다. 그럼 현오동에 있는 땅에 2천세대 규모의 일반 아파트를 건설해 주세요. 물론 원가로 건설해 주셔야 합니다."
이창용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이미 댁의 회장님과 얘기가 다 된 거에요. 그러니 묻지도 따지지도 마시고, 아파트 건설 계약을 최단 시일 안에 체결하시죠."
허나 이창용은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런 탓인지 조심스런 태도로 입을 열었다.
"이 사안은 회장님의 명확한 지시가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저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좋습니다. 그럼 회장님의 허락이 떨어지는 즉시, 나에게 연락을 주세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
늦은 밤.
힙한 옷차림으로 호텔방을 나설 찰나.
김도형 비서실장이 내 앞에 나타났다.
"잠시 할 말이 있는데, 시간이 되시나요?"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바쁘거든요. 그러니 나중에 봅시다."
그리 말하며 엘리베이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김도형이 내 뒤를 바짝 쫒으며 다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회장님의 전언이 있습니다."
"그게 뭐죠?"
그리 되물으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김 실장 역시 나를 뒤따라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지하 3층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주차장 구석에 주차된 세단 운전석에 앉자마자 조수석을 열어주었다.
"타세요. 가면서 대화를 나누시죠."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우리를 태운 세단이 강변북로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기를 잠시 후.
김 실장이 본론을 내뱉었다.
"미국에서 워렌스 후보를 만나서 성진자동차와 성진철강의 로비를 해주십시오."
"아버지의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김 실장은 그리 대꾸하며 미국행 퍼스트 클래스 왕복 항공권을 나에게 내밀었다.
"미국에서 워렌스 후보를 만나서 회장님의 뜻을 전달해 주십시오."
"아버지가 원하는 게 뭐죠?"
그가 즉답했다.
"회장님은 워렌스 후보와 단독 면담을 원하고 계십니다."
"좋습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단독 면담을 추진해 볼게요. 대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라고 전해주세요."
"예. 도련님."
김 실장을 지하철 역사 근처에 내려준 뒤, 홍대로 차를 몰았다.
홍대 클럽에서 EDM(일렉트로닉 댄스 뮤직)을 즐기며 섹시한 그녀들과 흥겨운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
국적기의 퍼스트 클래스 좌석에 앉자, 여승무원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기내식이 준비됐는데 내올까요? 그리고 보르도 특급와인이 새로 들어왔는데 맛을 보실래요?"
"갖고오세요. 맛을 한번 봅시다."
"예. 고객님."
10분 정도가 지나자 캐비어를 필두로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한우 등심 스테이크, 보르도 와인이 나왔다.
나는 기내식으로 나온 고급 요리를 안주삼아 포도주를 물처럼 들이켰다.
그런 탓일까.
금세 보르도 와인을 4병이나 비워버렸다.
허나, 나는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알콜을 마시는 족족 실시간으로 공기중으로 기화되는 탓이다.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풍성한 기내식과 값비싼 포도주를 마음껏 즐겼다.
퍼스트 클래스의 품격 높은 서비스를 온몸으로 만끽한 셈이었다.
17시간의 비행 끝에 필라델피아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워렌스 대선후보는 필라델피아 다운타운에 위치한 컨벤션센터에서 대선 유세를 가질 예정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체류하며 워렌스 후보를 기다릴 계획이었다.
공항을 나선 뒤, 노란 택시에 몸을 실었고.
그 후, 다운타운에 위치한 5성급 호텔의 스위트룸에 여장을 풀었다.
이 회장이 잡아준 호텔이라 그런지 나름 고급스러웠다.
넓직한 거실과 개인 서재가 딸린 방이었다.
일박 요금이 한화로 500만원이 넘는 방이었다.
그런 탓일까.
룸서비스도 나름 먹을만했다.
룸서비스를 즐긴 뒤, 디저트로 나온 아이스크림과 커피로 입가심을 할 찰나.
문밖에서 영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도 되겠나?"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며, 레스터 국장이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나 역시 웃는 낯으로 그와 악수를 교환하며 거실 소파로 자리를 이동했다.
영감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버지를 개인적으로 알고 계셨나요?"
그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진자동차에 내 자리를 만들어달라고 아버지에게 요구하신 건가요?"
영감님이 되물었다.
"성진자동차에서 일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나보군?"
"네. 별로 마음에 안들어요. 저는 나름대로 개인적인 사업을 하고 싶거든요."
"개인적인 사업이라...?"
그에게 솔직하게 대꾸했다.
"한국에서 부동산 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어요. 남는 게 시간이고 돈 벌 곳이 천지에 널렸는데, 아드레노의 비트코인 지갑에만 목을 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요."
뜻밖에도 영감님은 내 입장을 이해해주었다.
조금 놀랐다.
"자네가 원한다면 말리지는 않겠네. 내 입장에서도 자네가 그럴 듯한 사회적인 지위를 갖추는 게 좋거든."
"그 말씀은 아드레노의 비트코인 지갑을 더 이상 찾지 않아도 된다는 뜻인가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자네 부친에게 로비 자금 명목으로 이미 거액을 받았네. 아드레노가 탈취한 공작금에 버금가는 액수지."
내 입가에 절로 씁쓸한 고소가 떠올랐다.
"당분간 자네는 한국에서 입지를 구축하는데 주력하게. 그게 자네의 임무일세."
내 입장에서는 불감청 고소원이었다.
"고맙습니다. 국장님."
"나에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네. 모두 이 회장 덕분이니까."
그리 말하며 메모지 한장을 나에게 건넸다.
"내일 밤 10시에 필라델피아 시티 센터 호텔 펜트하우스를 방문하게."
"워렌스와 면담 약속을 잡은 건가요?"
그가 고개를 묵묵히 끄덕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후, 작별 인사도 없이 호텔방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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