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네버다이 2
오후 4시 무렵.
메리디언 힐 파크의 분수대로 접근하자, 미리와서 대기 중이던 영감님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는 해맑은 얼굴로 벤치에 자리한 채.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웃는 얼굴이었다.
세상을 참 편하게 사는 노인네였다.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나에게 할 말이 뭐죠?"
그가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민주당의 워렌스 대선후보가 자네를 만나보고 싶어하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죠?"
허나 영감님은 내 마음은 안중에도 두지 않은 채 자기 멋대로 헛소리를 내뱉었다.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하더군. 내일 저녁 7시까지 다운타운의 필그램 레스토랑으로 나오게. 워렌스는 대선에서 승리할 확률이 99.99%일세."
그에게 냉랭한 어조로 대꾸했다.
"영감님의 일처리가 너무 실망스러운데요. CIA 부국장이란 양반이 블랙요원의 정체를 이런식으로 노출해도 되는 겁니까?"
노인네에게 불만가득한 언사를 내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은 영감님의 잘못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내 적나라한 언사에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차기 미국 대통령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일세. 자네 입장에서도 좋으면 좋았지, 손해볼 일은 없을 걸세."
"미국 대통령이 유력한 인사라 해도, 저는 블랙요원입니다. 정체를 드러내면 안된다구요!"
격한 언사를 내뱉자, 영감이 꿀먹은 벙어리로 전락한 채 내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했다.
그런 탓일까.
갑자기 그가 불쌍하게 생각됐다.
영감은 일흔이 다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결국 못 이기는 척 그의 요청을 수락하기로 마음먹었다.
"원하시는 대로 워렌스를 한번 만나볼게요. 하지만 한번만 더 나를 귀찮게 하는 일이 발생하면, CIA고 나발이고 무조건 때려칠 거니까 알아서 잘 하세요. 아시겠습니까?"
노인네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칠십을 바라보는 연배라 그런지 일처리에 미흡한 구석이 많았다.
두뇌가 노화되서 그런 것 같았다.
일의 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했다.
*
오전 10시 무렵.
재무부 빌딩에 선글라스를 착용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검정색 정장 차림이었고, 근육질의 체격을 자랑했다.
또한 총기까지 허리춤에 휴대하고 있었고, 눈빛마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범상치 않은 생김새였다.
남자는 샌드럼 금융조사국장의 사무실로 직진했다.
비서와 수하 직원들은 그의 앞을 막아세울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남자의 살기등등한 면모에 기가 질린 모양새였다.
남자는 자신이 CIA 요원이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샌드럼을 겁박했다.
"CIA의 비밀 작전 계좌를 조사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지금 당장 조사를 중단하고, 요원에게 발부한 소환장을 취소하십시오."
그리 말하며 CIA의 공문서를 책상 위에 내던졌다.
샌드럼은 CIA의 공문서를 자세히 살폈다.
공문서의 최종 승인자는 레스터 부국장이었고, 그는 계좌 조사 자체를 중지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다.
잠시 뒤.
남자가 강렬한 눈빛을 내비치며 입을 열었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시카고 계좌는 오래전부터 우리 CIA가 비밀 작전에 이용한 계좌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우리 일에 끼어들지 마십시오."
"흐음..."
샌드럼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남자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만약 계좌 조사를 중단하지 않고 일을 키울 경우. 귀하를 국가안보를 위협한 혐의로 체포할 겁니다. 그러니 잘 판단하십시오."
남자가 살기넘치는 눈빛을 노골적으로 내비쳤다.
샌드럼이 낭패감에 휩싸인 얼굴로 물었다.
"그 말씀이 정말입니까?"
남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장내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사무실에 홀로 남은 샌드럼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CIA는 무서운 조직이었다.
그들의 눈밖에 나서 좋을 일이 없었다.
심할 경우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하는 탓이다.
CIA는 자신들을 방해하는 조직 혹은 개인을 무자비하게 처단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정부 관계자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CIA는 자신들에 맞서는 적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샌드럼은 그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 몇년 전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재무부 동료가 떠오른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 역시 샌드럼과 마찬가지로 CIA와 관련된 계좌를 조사하다, 석연치 않은 이유로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결과 일가족 전원이 목숨을 잃었다.
빗길 교통사고를 가장한 끔찍한 암살사건이었다.
샌드럼의 등줄기에 오싹한 한기가 돋아났다.
그런 탓일까.
그는 CIA가 요구하는 대로 비밀 요원에게 발부한 소환장을 취소하기로 결심했다.
더불어 계좌조사 명령도 직권으로 해제하기로 결론내렸다.
*
저녁 무렵.
월마트에서 구입한 싸구려 양복 정장을 걸치고 아파트를 나섰다.
다운타운에 위치한 필그램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주변을 장악한 무장 경호원들이 보였다.
워렌스 대선후보를 경호하는 사람들 같았다.
예상대로 그들은 내 몸을 철저하게 수색했다.
잠시 뒤.
워렌스의 수행비서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내 위아래를 유심히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파리에서 캐롤라인을..."
그가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고.
"제가 맞습니다."
짤막하게 대꾸하자, 비서가 나를 레스토랑 실내로 안내했다.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창가 테이블에 앉아서 나 홀로 포도주를 즐기는 중년의 백인 남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가 워렌스였다.
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워렌스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나를 보자 감사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딸아이의 생명을 구해주신 은인을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별말씀을. 당연히 제가 해야 하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겸양지덕을 발휘한 탓일까.
워렌스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직접 내 의자를 뒤로 빼주었다.
극진한 환대였다.
그는 차기 미국 대통령이 될 사람이었다.
그런 존재가 나를 제대로 대우하고 있었다.
확실히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러했으니 미국 대통령이 유력한 것이리라.
속으로 그같은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을 찰나.
장내에 갑자기 꼴도 보기 싫은 그년이 '짠'하고 나타났다.
워렌스가 애지중지하는 캐롤라인이었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전생의 웬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동시에 소화 역시 제대로 되지 않았다.
나에게 처절한 아픔을 안긴 그녀를 면전에서 목도한 탓일까.
프라임 등급의 소고기 안심으로 만든 스테이크와 값비싼 와인이 목에 걸려서 당최 넘어가지를 않았다.
허나 그녀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종일관 나에게 대화를 시도하려고 지랄발광 난리부르스를 추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전생이나 지금이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외모를 타고났다.
남자들을 홀리는 마성의 매력녀였다.
허나, 나는 그녀의 되바라진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천박한 본성을.
결국 나는 급한 볼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며.
자리에 앉은지 30분 만에 레스토랑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녀의 매혹적인 영상을 마음 속에서 떨쳐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허나 그럴수록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심중에 짙게 드리워졌다.
전생이나 현생이나 그녀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모양이었다.
머리 속으로는 그녀를 욕하고 증오한 반면, 마음 속으로 그년을 여전히 뜨겁게 갈구한 탓이다.
나는 파리의 몽마르뜨 언덕에서 싸구려 그림을 팔며 힘겨운 생계를 연명했다.
그 당시 내 유일한 기쁨은 현생에 캐롤라인으로 환생한 그녀였다.
그녀는 내 삶의 전부였고.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허나 그녀는 지긋지긋한 가난과 주변의 멸시를 견디지 못하고.
돈이 억수로 많은 60대 노인의 후처로 들어갔다.
사랑보다 돈을 선택한 것이다.
나에겐 그같은 현실이 처절한 아픔으로 다가왔고.
그 당시 기억이 아직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은 상흔으로 남아있었다.
돌아버릴 노릇이었다.
*
오전 9시경.
에그 샌드위치로 배를 채우고, 학교로 등교했다.
본관 건물에 있는 경영학 강의실에 들어서자, 이미 입추의 여지없는 만석이었다.
남아 있는 자리는 맨 앞 자리밖에 없었다.
경영학 교수님은 30대 중반의 여성이었다.
미모 역시 발군이었다.
흔히 말하는 팔등신 글래머였다.
그런 탓인지 그녀의 강의는 남학생들에게 엄청난 인기였다.
나 역시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맨 앞자리가 싫었지만 교수님의 강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결국 맨 앞에 착석한 채, 교수님의 강의를 기다렸다.
잠시 뒤.
하체의 굴곡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타이트한 스키니진과 흰색 블라우스.
핑크 컬러의 앙증맞은 가죽 자켓을 걸친 교수님이 강의실에 나타났다.
순간 강의실을 장악한 남학생들의 입에서 노골적인 찬사가 쏟아졌다.
허나 그녀는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곧바로 강의를 시작했다.
교수님이 화이트 보드에 '조세회피처의 법인설립'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허나 내 시선은 그녀의 아찔한 뒷태에 절로 모아졌다.
흐드러진 골반과 탱탱한 애플힙, 일자로 쭉빠진 탄력적인 각선미에 홀린듯 빠져든 탓이다.
그녀가 화이트 보드를 뒤로한 채,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 후, 맨 앞자리에 앉은 나를 손짓하며 입을 열었다.
"학생의 이름이 뭐죠?"
"이강천입니다."
"중국 출신인가요?"
"아닙니다. 한국 출신입니다."
그녀가 두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본격적인 질문을 던졌다.
"기업과 개인이 조세회피처에 법인을 설립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그녀에게 즉답했다.
"법인세 면제와 블랙머니(비자금)를 조성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가 고혹적인 눈웃음을 내비치며 입을 열었다.
"강천의 말대로 기업과 개인이 조세회피처에 법인을 설립하는 이유는 법인세의 면제와 블랙머니를 조성하는 게 주된 이유에요."
그러자 다른 남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던졌다.
"교수님은 결혼을 하셨나요?"
순간 장내의 시선이 그녀의 입에 모아졌다.
우리 모두 관심 있어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녀는 밀당의 고수였다.
"내 사생활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마세요. 언급하기 싫으니까."
그리 대꾸한 뒤, 강의에 다시 집중했다.
"정부 입장에서 조세회피처의 법인은 블랙머니와 세금탈루의 온상이에요. 하지만 그들은 조세회피처에 법적인 제재를 가할 수 없어요. 강천은 그 이유를 아시나요?"
그녀의 질문이 또 다시 나에게 쏟아졌다.
설마... 나를 좋아하는 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는 섹시한 눈웃음을 나를 향해 노골적으로 내비치고 있었다.
그런 탓인지, 내 마음이 절로 뜨거워졌다.
'강의가 끝난 뒤에 데이트를 신청해볼까'
속으로 그같은 생각을 할 찰나.
그녀의 재촉하는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졌다.
"내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나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그녀의 하늘같은 질문에 답변할 신성한 의무가 있었다.
중저음의 묵직한 바리톤을 그녀를 향해 내뱉었다.
"조세회피처의 법인은 자본주의의 영리목적에 부합합니다."
내 답변은 계속 이어졌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표방한 각국 정부는 조세회피처의 법인에 대해서, 법적으로 제재를 가할 법률적인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교수님이 매혹적인 눈웃음을 내비치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가 뭐죠?"
그녀에게 기다렸다는 듯 즉답했다.
"조세회피제도를 떠받치는 국가가, 바로 전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이기 때문입니다."
- 작가의말
선작 추천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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