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블랙요원 5
헬리콥터는 워싱턴이 있는 북동쪽이 아니라, 서쪽 방면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헬기 조종사에게 행선지에 관해서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허나 그건 쓸데없는 짓이었다.
조종사는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CIA 요원이었다.
그는 입에 자물쇠를 채운 남자였다.
내가 묻는다고 순순히 대답해줄 위인이 아니었다.
3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
고층 빌딩이 즐비하게 늘어선 다운타운의 전경이 시야에 포착됐다.
그러기를 얼마 뒤, 헬기는 다운타운에 위치한 고층 빌딩 옥상에 착륙했다.
헬기에서 내려서자, 익숙한 백인 남자가 나를 맞이했다.
게리 스톤 수석작전요원이었다.
이 작자가 나를 갖고 노는 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넌지시 물었다.
"저보다 일찍 도착하셨네요. 개인 전용기를 타고 오신 건가요?"
그에게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린 탓일까.
스톤 아저씨가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귀관은 훈련에 집중하도록."
쓴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제임스라는 암호명을 사용하고 있으니까, 저를 제임스라는 암호명으로 불러주십시오."
스톤 아저씨가 완강한 어조로 대꾸했다.
"귀관의 암호명 따위는 알고 싶지 않다."
재수없는 인간이었다.
나름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사근사근하게 대했건만.
이 작자는 나를 별 볼 일 없는 동양인으로 취급하는 것 같았다.
말하는 태도와 눈빛이 전형적인 동양인 포비아였다.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대놓고 물었다.
"요원님은 내가 아시안이라서 싫어하는 건가요?"
스톤의 입에서 솔직한 언사가 흘러나왔다.
"내가 너같은 아시안을 혐오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가 잠시 말을 끊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를 멸시하는 눈빛이었다.
이자는 동양인 포비아가 틀림없었다.
눈빛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보잘 것 없는 두눈을 정면으로 직시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 눈빛에 기가 질렸음인지, 스톤이 내 시선을 회피하며 입을 열었다.
"본 교관은 직무 능력 평가를 인종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 말이 정말입니까?"
"하늘에 대고 맹세할 수 있을 정도다."
"좋아요. 이번 한번만 믿어 드리죠. 하지만 한번만 더 동양인을 혐오하는 말투와 눈빛을 내 앞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면, 요원님이고 나발이고 내 손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셔야 할 겁니다."
그가 흠칫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고.
금세 그의 얼굴 전체에 진한 두려움이 번져갔다.
스톤은 내 압도적인 격투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탓일까.
금세 핼쑥해진 얼굴로 내 시선을 회피하며 옥상 출입구 쪽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나 역시 그를 뒤따라 출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빌딩은 전체가 CIA 비밀 시설이었다.
옥상부터 시작해서 모든 층에 무장 요원들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외부 출입자를 철저하게 차단하는 모양새였다.
빌딩은 대략 40층 높이였고, 나는 최상층인 40층에 방을 배정받았다.
방 크기는 10평 내외였고.
화장실과 욕실, 침대, 책상이 있었다.
당연히 내 개인 물품은 압수당한지 오래였다.
스마트폰이라도 있었다면, 인터넷 서핑을 즐기며 시간을 때울 수 있었겠지만.
이런 통제된 환경에서 폰질을 한다는 건,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이곳은 CIA의 비밀시설이었다.
수도승처럼 고고한 자태를 유지하며 시간을 보내야 하는 장소였다.
속으로 그같은 생각을 할 찰나.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CIA 부국장인 레스터 영감님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친근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서, 불시에 찾아왔으니 나를 원망하지 말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말이 이어졌다.
"복싱이나 격투기 선수로 활약해도 큰 돈을 벌 수 있을텐데...? 굳이 CIA 요원이 되려고 하는 이유가 뭐지?"
그에게 되물었다.
"CIA 요원이 되라고 집요하게 권유한 건 영감님 아닌가요?"
"그건 자네의 엄청난 격투 실력을 미처 몰라봐서 그랬던 거고. 지금은 조금 상황이 다르다네."
영감님에게 다시 되물었다.
"복싱이나 격투기 선수로 활동하면서 얼마든지 큰 돈을 벌 수 있음에도, 고단한 CIA 요원이 되기 위해서 훈련을 받는 게 이해가 안된다는 말씀인가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탐색하는 눈빛을 내비쳤다.
영감님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내가 그의 입장이라도, 그런 의문을 제기했을 것이다.
결국 영감님에게 나름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의 격투 능력은 신이 부여해준 힘이죠. 그런 능력을 이용해서 스포츠로 돈을 버는 건, 스포츠맨십에 위배되는 거라고 저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어요."
영감님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이 여전히 납득이 안되는 모양이었다.
그런 탓일까.
갑자기 왈칵 짜증이 치솟았다.
이런 구질구질한 말을 늘어놓는 내 자신에게 화가 났기 때문이다.
"아무튼 저는 스포츠로 돈을 벌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세상 사람들에게 나를 드러내기가 싫다고요! 이제 됐습니까?"
성난 얼굴로 목소리를 높이자, 영감님이 찔끔한 표정을 지으며 내 시선을 회피했다.
"그렇게 내가 못 미더우면 CIA 요원이고 나발이고 지금 당장 때려치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탓일까.
영감님이 언제 그랬냐는 듯,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미안하네. 주변에서 하도 자네를 의심하는 말들이 많은 관계로..."
그가 내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나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의심한다기 보다는 자네의 출중한 능력을 부담스러워하는 자들이..."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게리 스톤 수석작전요원이 나를 의심하는 겁니까?"
영감님이 겁먹은 얼굴로 양팔을 맹렬히 저었다.
허나 그의 태도로 보아, 내 예상이 맞는 모양이었다.
동양인을 차별하는 게리 스톤이 나에 대한 험담을, 영감님에게 늘어놓은 게 틀림없었다.
"기분이 더럽군요. 저 나름대로 CIA를 위해서 봉사하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사람을 의심하다니...!"
그러자 영감님이 다급한 얼굴로 읍소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내가 책임지고 약속하겠네. 믿어주게. 제발!"
영감님의 애처로운 표정을 묵묵히 내려다보며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기를 잠시 뒤.
이번 한번만 그의 사과를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앞으로 절대 내 앞에서, 화를 돋구는 개소리를 하지 마십시오. 아시겠습니까?"
"당연히 그럴 생각이네. 그럼 이제 내 사과를 받아주는 건가?"
"그래야죠. 나이지긋한 영감님이 이렇게 사정하는데..."
그리 대꾸하며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침대에 앉으며 앞에 서 있는 영감님에게 물었다.
"나에게 약속한 기본 연봉 100만 달러(13억)는 언제 지급되는 거죠?"
그가 즉답했다.
"모든 훈련 과정이 종료되는 즉시 지급될 걸세."
"좋아요. 약속은 반드시 지키세요."
"그점은 걱정하지 말게. 그럼 나중에 보자고."
영감님은 그말을 끝으로 내 방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
동양인 포비아인 스톤 아저씨가 내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부터 귀관의 새로운 트레이닝이 시작될 예정이다."
그에게 따져 물었다.
"레스터 영감님에게 내 험담을 하신 겁니까?"
그러자 스톤 아저씨 역시 잔뜩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맹렬히 저었다.
"그건 오해일세. 나는 절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네."
나는 그의 얼굴과 눈빛을 유심히 살폈다.
그 결과 스톤 아저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불안한 눈빛과 쉴 새 없이 굴러다니는 한쌍의 동공이 그 증거였다.
"내가 밉다고, 부국장한테 내 험담을 하는 건 선을 넘은 것 아닙니까?"
그말과 동시에 스톤 아저씨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는 지상 1미터 높이에서 몸이 데롱데롱 매달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런 탓일까.
공포에 휩싸인 얼굴로 온몸을 발버둥쳤다.
그때, 장내에 총기로 무장한 요원들이 나타났다.
결국 나는 스톤 아저씨의 멱살을 풀며 그를 지상으로 내려주었다.
죽다 살아난 그에게 나직한 어조로 경고했다.
"차후에도 내 험담을 하고 다니시면 요원님은 내 손에 정말 맞아 죽을 겁니다. 명심하세요."
스톤의 얼굴에 분노와 두려움이 차례로 교차했다.
그러기를 잠시 뒤.
온다간다 말도 없이 장내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날 저녁.
새로운 교관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은색의 철제 박스를 손에 들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수석작전요원님은 어디에 가셨죠?"
교관이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분은 랭글리로 복귀하셨습니다."
나를 상대하는 게 두려운 나머지 본부로 귀환한 모양이었다.
"오늘부터 제임스의 훈련을 제가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심드렁한 얼굴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 훈련은 마인드 컨트롤 능력이 필요합니다."
"마인드 컨트롤을 훈련하는 건가요?"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교관은 말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나처럼 성질급한 사람을 열받게 하는 말투였다.
"말을 빙빙 돌리지 말고, 확실히 말하세요. 열받으니까."
그제야 교관이 내 말을 알아 들었는지,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고문을 견디는 능력을 테스트할 계획입니다. 물론 무식하게 손톱 발톱을 펜치로 뽑는다거나..."
그가 말끝을 흐리며 나를 슬쩍 쳐다봤다.
직후 다시 입을 열었다.
"전기고문, 성기 고문 등의 테스트는 미 시행할 예정이니 너무 겁먹지 마십시오."
그에게 물었다.
"내가 통과해야 하는 고문 테스트가 정확히 뭐죠?"
그가 즉답했다.
"각국 정보기관에서 자주 사용하는 자백유도제에 저항하는 능력을 중점적으로 테스트할 예정입니다."
교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제임스는 자백유도제를 투여받은 상태에서, 우리 CIA가 미리 알려준 가짜 정보를 3시간 동안 앵무새처럼 읇조리면 테스트를 통과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은색의 철제 박스를 간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교관은 은색 박스에서 커다란 주사기를 꺼낸 뒤, 자백유도제 캡슐에 주사기 바늘을 꽂았다.
미안하지만 나는 주사기가 통하지 않는 몸이었다.
하루 24시간, 전신 대주천이 자동적으로 운행된 탓이다.
전신 대주천이 자동적으로 운행되는 덕분에, 내 몸에는 주사기 바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전신 대주천을 중단할 수 없었다.
수호신이 부여해준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교관에게 말했다.
"주사기 대신, 캡슐에 들어있는 자백유도제를 통째로 섭취할게요. 그편이 나을 것 같네요."
교관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정맥에 주입해야 효과가 즉시 나타납니다."
"박스 안에 있는 캡슐이 몇명분이죠?"
"20명 분량입니다."
"그럼 박스 안에 있는 캡슐을 모두 섭취할게요. 그럼 효과가 대단하겠죠?"
교관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많이 흡입하시면 심장마비로 사망할 겁니다.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죽거나 말거나, 내 책임이니까 교관님은 신경쓰지 마세요."
그리 대꾸하며 은색 박스 안에 들어있는 수십개의 캡슐을 입안으로 재빨리 털어넣었다.
20명 분의 자백유도제를 섭취하자, 교관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살펴봤다.
내가 죽을꺼라고 지레짐작하는 눈치였다.
허나, 내 정신은 말짱했다.
전신 대주천의 순기능이었다.
자백유도제는 이미 공기 중으로 기화된지 오래였다.
그런 사실을 알리 없는 교관은 시종일관 불안한 얼굴로 나를 지켜봤다.
30분이 금세 지나갔고, 내가 여전히 정상적으로 호흡하자.
그제야 교관은 자백유도제가 나에게 아무 위협이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괴물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교관이 건네준 메모지에 적혀있는 내용을 순식간에 암기한 뒤.
3시간 동안 메모지 속에 들어있는 내용을 무한반복했다.
각국의 정보기관이 애용하는 자백유도제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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