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환생 5
라면으로 아침을 해결한 뒤, 집앞에 위치한 국면은행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국면은행에는 내 전용계좌가 있었다.
국면은행에서 대웅증권의 주식계좌를 개설하자마자 원룸으로 원대복귀했다.
노트북에 대웅증권의 주식 트레이딩 프로그램을 설치한 후, 아이디와 비번을 입력했다.
나는 그날, 트레이딩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삼승전자의 주식 100억 어치를 매입했다.
10년동안 장기투자하기 위함이었다.
한달 후.
나는 요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서울 시내 공사장에서 열심히 노가다를 뛰고 있었다.
이 회장에게 받은 100억을 삼승전자의 주식을 매입하는데 전액 투자한 탓이다.
하루 일당 15만원 정도를 받고, 거의 날마다 노가다를 뛴 덕분에 나름 먹고 살만했다.
무쇠처럼 튼튼한 육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
서울 시내를 장중하게 내달리는 마이바흐 리무진 안에서 김도형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막내 도련님이 요즘 공사장에서 일을 하며 돈을 모으는 것 같습니다."
"내가 준 돈은 어디에 써먹은 거지?"
"코인이나 미국 주식에 투자한 것 아닐까요?"
이 회장이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여튼 그놈은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니까. 100억이나 되는 거액을 겁대가리 없이 함부로 전액 투자하다니...! 그래놓고는 돈 달라고 하기가 뭐하니까 공사장에서 노가다를 뛴다고?"
그는 강천의 행동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도 막내 도련님은 근성이 있습니다. 아직 어린 나이에도 공사장에서 일하면서 돈을 모으는 게, 그 증거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막내 도련님을 미국 대학에 유학을 보내시죠. 그게 싫으시면 회사에 취직을 시키거나."
"나더러 그놈을 끝까지 책임지란 말인가?"
"누가 뭐래도 막내 도련님은 회장님의 핏줄입니다."
김도형 실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막내 도련님을 이 상태로 방치한다면 회장님의 평판에도 악영향을 끼칠 겁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저만 그런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김도형은 차마 '자기 자식도 모른척하는 인정머리 없는 작자'라고 대놓고 말할 수가 없었다.
어찌됐든 이명석 회장은 성진그룹의 절대자였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라도 잘못했다간, 김도형은 그날부로 실업자 신세로 전락할 운명이었다.
"흐으음..."
이 회장의 입에서 깊숙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 역시 김도형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허나 본능적으로 강천에게 정이 안갔다.
그래서 남남처럼 살고 싶었다.
허나 그는 성진그룹의 회장이었다.
만약 자기 핏줄인 강천이 밑바닥 인생을 전전한다면.
정재계와 관계의 인사들이 자신을 비웃을 것이 자명한 현실이었다.
아무리 못나고 정이 안가는 자식이라도, 남들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하는 일 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결국 이 회장이 못 이기는 척 김도형에게 슬며시 물었다.
"강천이를 유학보내는 게 최선일까?"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럴 듯한 대학 졸업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예. 회장님."
이 회장 역시 학창 시절에 공부를 못했다.
그런 탓에 미국의 명문대학으로 평가받는 조지타운 대학에 기부금을 내고 입학한 케이스였다.
"조지타운 대학교에 자리가 있는지 알아봐."
김도형이 반색하는 얼굴로 물었다.
"결심하신 겁니까?"
이 회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두눈을 지그시 감았다.
*
나는 노가다를 뛰며 착실히 돈을 모으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육체를 타고난 덕분이었다.
내가 야구나 축구, 복싱같은 편한 돈벌이를 뒤로한 채.
노가다에 전념하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수호신의 금제 덕분이었다.
수호신은 내가 돈을 벌기 위해 대중들에게 힘을 드러낼 경우.
나에게 부여한 5갑자 공력을 모두 회수하겠다고 공언한 상태였다.
수호신의 신적인 능력을 잘 아는 나로서는, 그의 말을 허투루 생각할 수 없었고.
결국 그런 이유로, 내 입장에서 가장 편한 방법인 노가다를 하면서 돈을 모으고 있었다.
저녁 무렵.
원룸 주인의 계좌로 원룸 월세 120만원을 계좌이체했다.
그런 탓일까.
원룸 월세가 너무 비싸게 생각되었다.
독립된 거실과 주방이 있는 구조라고 해도, 월세가 너무 비쌌다.
그리고 보증금도 천만원 수준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룸에서 계속 사는 건 돈낭비 같았다.
결국 익숙한 그곳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작심했다.
일주일 후.
원룸에서 방을 빼자마저, 직전생에서 20년 이상 살았던 고시원방으로 직진했다.
보증금 걱정없이 저렴한 가격으로 내 한몸 의탁이 가능한 장소였다.
나는 한달 월세 40만원의 조건으로 3평 남짓한 고시원을 얻었다.
당연히 화장실과 욕실은 공용이었다.
워낙 익숙한 곳이라 적응하는데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이른 아침.
고시원의 장점은 주방이었다.
대다수의 고시원은 쌀밥과 김치를 무료로 제공한다.
나는 고시원 주방에서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먹으며.
잘 익은 김치를 원없이 맛봤다.
언제 먹어도 꿀맛이었다.
한남동에서 먹은 산해진미보다 고시원 주방에서 속편하게 먹는 밥이 더 맛있었다.
아침을 든든히 챙겨먹은 후.
청바지와 점퍼 차림으로 고시원을 나섰다.
나는 요즘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성실히 일하는 걸 마음에 들어한 현장 소장님이, 나를 직접 채용한 것이다.
그분 덕분에 나는 인력사무소에 수수료를 낼 필요가 없었다.
고마운 분이었다.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성실하게 근무한 뒤, 고시원으로 향할 무렵.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김도형 아저씨의 전화였다.
-도련님에게 할 말이 있는데, 지금 어디에 계시죠?
"무슨 일로 그러시죠?"
-그건 만나서 말씀드리죠.
"쌍문동으로 오세요. 요즘 그곳에서 생활하는 중이니까."
-그럼 1시간 후에 쌍문역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만나시죠.
"시간 맞춰서 갈게요."
1시간 뒤.
쌍문역 인근의 스타벅스로 들어가자, 창가 테이블에 앉아있던 실장 아저씨가 반가운 얼굴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테이블 위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놓여있었다.
내 몫으로 챙겨놓은 커피 같았다.
커피를 음미하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워싱턴에 조지타운 대학이 있어요. 미국에서도 명문으로 통하는 대학이죠. 미국에서 내로라하는 정치인과 경제인을 다수 배출한 대학입니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고.
"도련님이 결심만 하시면 제가 책임지고 조지타운 대학에 입학시켜 드리겠습니다. 생각이 있으신가요?"
그에게 물었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죠?"
아저씨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회장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 도련님도 회장님의 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정말 아버지가 원하는 일인가요?"
"네. 사실입니다."
"이상하네요. 아버지와 저는 인연을 완전히 끊었는데."
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법적으로 도련님과 회장님은 죽을때까지 부자지간의 연을 끊을 수 없죠. 법이 그렇거든요."
허나 나는 대학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그저 내가 원하는 대로 노가다를 하면서 편하게 살고 싶었다.
"저는 지금 삶이 마음에 들어요. 공사장에서 일하면서 돈을 버는 게 좋거든요."
당연히 그는 내 말을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인가요?"
"당연하죠. 내가 뭐하러 아저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
나는 21세기 초인으로 환골탈태한지 오래였다.
그런 탓으로 공사장에서 일하는 게 전혀 힘들지 않았다.
일이 너무 편했기 때문이다.
'누워서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였다.
도리어 편의점이나 피시방에서 일하는 게 고역이었다.
하루종일 한자리에 앉아서 일하는 자체가.
좀이 쑤셔서 미칠 노릇이었다.
그런 탓으로 노가다를 하는 게, 내 입장에서는 제일 쉽고 편한 일이었다.
"회장님에게 반항하는 심리로 힘든 노가다를 해봤자, 도련님에게 좋을 일이 없습니다."
"실장님은 내가 아버지에게 시위하는 차원에서 노가다를 하는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가 내 두눈을 직시하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긴, 내가 그의 입장이라도 그리 생각할 게 뻔했다.
"아무튼 저는 대학교에 들어갈 생각이 없으니까, 이만 돌아가세요."
그말을 끝으로 스타벅스를 재빨리 빠져나왔다.
아저씨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
김도형은 한남동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강천에 대해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희안한 친구야. 재벌 회장을 아버지로 뒀으면서도, 왜 저렇게 고집을 피우는 걸까?'
그는 노가다를 고집하는 강천을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말을 하는 걸 들어보면, 속이 꽉 찬 놈인데... 이태천과 이수천은 인간말종 쓰레긴데, 강천이란 놈은 확실히 뭔가 달라.'
도형은 강천이 예사롭지 않게 생각됐다.
특히 타인의 폐부를 꿰뚫어보는 듯한 강렬한 눈빛이 너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자살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 예전과 확실히 달라졌어. 죽음에서 기사회생한 탓일까?'
허나 그는 강천이 성진그룹의 후계구도에 이렇다할 변수가 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고 확신했다.
'이미 큰아들인 태천이 자식이 그룹의 지주회사인 조강제지의 지분을 30% 이상 접수했어. 강천이란 놈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후계 구도는 이미 확정된 상태라고.'
도형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할 찰나.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차 안에서 울려퍼졌다.
"한남동에 도착했습니다. 실장님."
"벌써 도착했나?"
"예. 실장님."
도형은 고개를 끄덕인 뒤.
차에서 천천히 내려섰다.
그 후, 본관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
고시원으로 발걸음을 향할 무렵.
근처를 지나치는 30대 여성을 우연히 마주쳤다.
그녀는 매혹적인 얼굴과 늘씬한 몸매를 과시하고 있었고.
그녀의 곁에는 어여쁜 소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모녀 사이로 보였다.
나는 그녀를 목격한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심경이었다.
그녀는 나를 몰라봤지만, 나는 한 눈에 그녀가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녀는 내가 조선시대에 환생했을 당시.
내가 모시던 양반댁 과부였다.
나는 그 당시에 양반댁 머슴으로 일하며, 그녀를 남몰래 흠모했다.
아름다운 외모와 고운 성품을 간직한 탓이다.
허나 그녀는 수절 과부였다.
게다가 조정에서 열녀문이 내려올 정도로 정조를 지키면서, 저승으로 떠나간 남편을 기리는데 최선을 다했다.
허나 우리는 눈빛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며, 서로간의 정을 키워갔다.
그러던 어느날, 대감마님 부부가 가문의 종실 제사로 집을 비우는 일이 발생했다.
우리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서로 마음에 품은 뜨거운 정념을 해소할 기회는 그날 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하며, 그녀의 방에 들어섰다.
그녀 역시 나를 거부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애틋한 사이가 되었고.
그날 이후, 틈만 나면 격렬한 사랑을 나눴다.
허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어느날 부터인가, 그녀와 나에 대한 소문이.
종놈 종년들 사이에서 파다하게 나돌았다.
그 소문은 대감마님 부부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결국 나는 멍석말이를 당한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그녀는 자결을 통해서, 가문의 명예에 누를 끼친 죄를 사죄했다.
빌어먹은 노릇이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한 사이였다.
허나 조선시대는 신분의 벽이 하늘보다 높았다.
양반댁 수절과부와 종놈은 결코 맺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지금 생각해도 열불이 터질 노릇이었다.
그녀는 여리여리한 원피스 차림이었다.
그런 탓인지 아름다운 뒷태가 내 눈을 아리게 파고들었다.
바로 그때, 그녀의 앞에 30대 남자가 나타났고.
그녀는 특유의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의 품에 안겨들었다.
열이 받는 순간이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금생에도 마찬가지로 그녀는 내가 다가가지 못하는 저 먼 곳에 존재했다.
그녀는 30대 중반의 유부녀였다.
안봐도 비디오다.
나는 그녀가 남편의 품에 안긴 채.
저 멀리 사라질때까지 못 박힌 듯 그자리에 서 있었다.
수백년 전에 경험한 가슴먹먹한 그 감정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미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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