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주인공이 힘을 절대 안숨김 5
차를 몰고 한남동으로 향했다.
이 회장의 한남동집에 도착하자, 노집사가 언제나처럼 나를 맞이했고.
그의 안내를 받으며 본관 건물의 2층 서재로 올라갔다.
서재 안으로 들어서자, 책상에 앉아있는 이 회장이 보였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주시한 채, 나직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너에게 성진자동차의 주식을 증여하면, 집안에 분란이 발생할게다. 그리고 증여세 문제도 있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성진자동차와 성진철강의 반덤핑 관세 문제를 해결해준 너에게 솔직히 고마운 심경이구나."
처음으로 나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이 회장이었다.
나는 조금 놀랐다.
이 사람이 갑자기 제대로 된 아버지 노릇을 하려는 건가?
속으로 그같은 생각을 할 찰나.
그가 메모지 한장을 내 손에 건넸다.
메모지에는 싱가포르에 소재한 영국계 은행의 계좌번호와 비밀번호가 적혀있었다.
"이게 뭐죠?"
그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비밀계좌다."
"비밀계좌라고요?"
이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좌에 돈이 얼마나 들어있죠?"
"미화로 2천만 달러."
미화 2천만 달러는 한화로 270억을 상회하는 금액이었다.
"이 정도면 만족하느냐?"
당연히 만족했다.
"충분한 것 같네요. 고마워요. 아버지."
이 회장이 심유한 눈빛을 내비치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번에 말했다시피 성진자동차의 미래전략실에 다음주 월요일부터 정식으로 출근을 하거라."
그리 말하며 사원증을 나에게 내밀었다.
내 시선이 사원증으로 향했다.
[성진자동차 미래전략실 이강천 팀장.]
"팀장이면 직급이 정확히 어느 정도죠?"
"부장급이라고 생각하거라."
"연봉과 판공비는 얼마죠?"
"얼마를 원하느냐?"
그에게 솔직한 태도로 내 요구를 밝혔다.
"연봉과 판공비를 모두 억대로 책정해 주세요. 그리고 내가 아버지의 셋째 아들이라는 사실도 확실히 고지해 주세요."
이 회장은 내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마. 그럼 다음주부터 출근을 하겠느냐?"
"아버지가 그토록 원하시니, 효도를 하는 차원에서 회사에 출근해 드릴게요. 그럼 이만."
그말을 끝으로 서재를 재빨리 빠져나왔다.
호텔방에 들어선 후, 노트북을 이용해 싱가포르행 왕복 항공권을 예매했다.
싱가포르에 소재한 영국계 은행의 비밀 계좌에서 돈을 인출할 생각이었다.
다음날 오후.
싱가포르의 창이 국제공항을 나서자마자 시내에 위치한 영국계 은행으로 직행했다.
은행 창구로 다가선 뒤, 직원에게 내 요구를 밝혔다.
"계좌에 예치된 돈을 타은행에 이체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계좌의 잔고증명서를 갖고 오셨나요?"
"잔고증명서는 없지만, 계좌번호와 비번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 대꾸하며 계좌 번호와 비번이 적혀있는 메모지를 그에게 내밀었다.
은행원이 친절한 태도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고객님."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은행원이 안쪽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은행원이 잔고증명서를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잔고증명서에는 예상대로 2,000만 달러가 예치된 상태였다.
그에게 다시 메모지를 건네며 내 요구를 밝혔다.
"메모지에 있는 은행의 계좌로 돈을 이체해 주세요."
"얼마나 이체해 드릴까요?"
"2천만 달러 전액을 이체해 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계좌 이체 작업을 끝마치자마자 다시 창이 국제공항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싱가포르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한국에서 할 일이 태산이었다.
그날 밤.
호텔방의 거실에 놓여진 책상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에 있는 노트북을 켠 뒤.
대웅증권의 주식트레이딩 프로그램을 실행했고.
그러기를 얼마 후, 270억 어치의 삼승전자 주식을 추가로 매수했다.
그 덕분일까.
내가 보유한 삼승전자의 총 주식은 현 시가로 500억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불어났다.
1주당 평균 매입가는 4만 2천원 정도였다.
삼승전자의 주식은 여전히 횡보합을 거듭하고 있었다.
허나 금년 연말을 기점으로 삼승전자의 주식은 하늘 높을줄 모르고 치솟을 운명이었다.
중국은 12월 말에 대만을 침공할 예정이었다.
그 덕분에 삼승전자의 최대 라이벌인 대만의 TMC는 하루아침에 패망한다.
내가 경험한 미래가 그랬다.
캔맥주로 목을 축이며 벽면을 장식한 대화면 TV에 이목을 집중했다.
때마침 TV에서는 긴급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MK건설이 부실시공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MK 건설이 수원에 건설한 대단지 아파트 사전점검에서 다수의 철근누락 사실이 발견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감독 관청인 경기도와 수원시는 MK 건설의 부실시공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건축사용승인을 전면적으로 불허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중략...
속이 뜨끔해지는 부실시공 뉴스였다.
그런 탓일까.
나는 삼익건설의 부실시공에 절로 신경이 쓰였고.
결국 그같은 불행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차원에서, 성진건설의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마음을 정하자마자 김도형 아저씨에게 한통의 전화를 걸었다.
성진건설의 전문가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할 생각이었다.
*
오후 무렵.
서울 모처에서 성진건설의 김종혁 감사실장을 만났다.
그는 건설 업체의 각종 부조리에 관해서 해박한 식견을 가진 인물이었고.
당연히 김도형 아저씨가 소개해준 사람이었다.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아파트 부실 시공을 방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김종혁이 공손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건설 현장에서 발생하는 각종 부조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감리업체를 선정하는 게 급선무죠."
"감리업체가 제 역할을 해주면, 철근누락과 부실한 콘크리트 타설같은 부조리를 얼마든지 막을 수 있는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도련님."
그에게 나직한 어조로 내 의중을 밝혔다.
"쓸만한 감리업체를 소개받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종혁의 얼굴에 진한 호기심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에서 탐탁지않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부동산 개발사업을 추진하시는 건가요?"
그는 쓸데없이 호기심이 많았다.
내가 원치않는 관심이었다.
그에게 냉랭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런건 아실 필요가 없고요. 그리고 오늘 저와 나눈 대화는 가급적 다른 사람들에게 언급을 삼가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제야 종혁이 자신의 실태를 눈치챘는지, 송구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됐어요. 아무튼 감리업체나 소개해 주세요. 믿을 만한 업체로."
"알겠습니다. 도련님."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이틀 안에 연락을 주세요."
"예. 도련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준비해온 갈색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갈색 봉투 안에는 5만원권 현찰로 1천만원이 들어있었다.
"일종의 소개비에요. 용돈으로 쓰세요. 그럼 이만."
그말을 끝으로 장내를 유유히 빠져나왔다.
강천개발의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김영선에게 지시를 내렸다.
"현오동 부지에 들어설 대단지 아파트의 홍보용 팜플렛이 필요하니까 업체와 상의해서 작업을 진행하세요."
그녀가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예. 사장님."
"법인카드를 줄테니까 그 돈으로 계약금과 잔금을 치루세요."
강천개발의 법인카드를 영선에게 건넨 뒤, 넌지시 물었다.
"탕비실에 커피와 간식이 있나요?"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즉답했다.
"커피 믹스는 조금 있는데, 간식 같은 건 전혀 없어요. 그리고 복사용지도 부족하고, 프린트 할때 사용하는 컬러 잉크도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녀에게 나름 통큰 언사를 내뱉었다.
"영선 씨가 좋아하는 빵이나 과자, 아이스크림, 커피로 탕비실을 가득 채워 놓으세요. 회사 비품도 마찬가지로 알아서 구입하세요."
그러자 영선이 반색하는 얼굴로 화답했다.
"고마워요. 사장님."
"이 정도는 복리후생 차원으로 당연히 해드려야죠. 그리고 점심 식사도 법카로 결제하세요."
그녀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물었다.
"정말 그래도 될까요?"
"방금전에도 말했다시피 복리후생 차원이니까 부담갖지 말고, 법카로 점심식사를 결제하십시오. 1만 5천원 이내로."
영선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해 조신하게 허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이 정도는 해드려야죠. 우수 사원인데. 하하하...!"
내 입에서 절로 유쾌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
강천개발 사무실 인근의 카페에서 한일건축의 유태동 전무를 만났다.
한일건축은 나름 공신력 있는 감리회사로 평가받는 업체였다.
성진건설의 김종혁 감사실장이 연결해준 회사라 그런지, 유태동은 나를 깍듯하게 대했다.
내가 성진그룹 이명석 회장의 3남이라는 사실을 김종혁에게 전해들은 눈치였다.
우리는 악수를 교환한 뒤, 창가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뒤.
"성진그룹의 귀하신 분을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과분한 말이네요. 저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그리 대꾸하며 현오동 부지에 들어설 대단지 아파트의 홍보 팜플렛을 유태동에게 내밀었다.
내가 건넨 팜플렛을 유심히 살핀 태동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건설업체를 선정하셨나요?"
"네. 1군 건설업체인 삼익건설과 공사계약을 체결한 상태죠. 그래서 한일건축에 감리를 의뢰하고 싶어서 만나자고 한 거에요."
그가 반색하는 얼굴로 확인하듯 되물었다.
"정말 저희 회사에 감리를 맡기실 생각인가요?"
"성진건설의 김종혁 전무가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감리업체라고 하더라고요."
"그리 생각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도련님."
도련님이라는 단어가 솔직히 많이 거슬렸다.
그런 탓으로 그에게 단호한 어조로 내 요구를 전했다.
"앞으로는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마시고, 사장님이라고 호칭해 주세요. 그게 편하니까."
그가 공손한 태도로 즉답했다.
"도련님이 원하시는 대로 앞으로 사장님이란 호칭을 사용하겠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태동에게 넌지시 물었다.
"2천 세대 규모의 아파트 공사에요. 총 공사비용은 1,300억이죠. 이 정도 규모의 아파트를 감리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을 알고 싶어요."
그가 신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감리비용은 평균적으로 총 공사비용의 2.5퍼센트 수준입니다. 저희 회사 역시 그 정도로 수준으로 감리계약을 체결하고 있죠."
"총 공사비의 2.5퍼센트를 예상하면 되는 건가요?"
"맞습니다. 사장님."
1,300억의 2.5퍼센트는 대략 32억 5천만원 안팎이었다.
나름 적정한 수준의 감리비용 같았다.
"내일 오후에 정식으로 감리계약을 체결하시죠."
그가 감격한 얼굴로 나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별말씀을. 그럼 내일 오후 2시에 강천개발 사무실로 계약을 하러 오십시오."
그말을 끝으로 카페를 유유히 벗어났다.
*
평일 오후.
얼굴에 위장 마스크를 쓴 채.
한강 공원의 한적한 벤치로 다가가자 박창중이 나를 향해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벤치에 착석한 뒤.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있는 창중에게 묵직한 중저음을 내뱉었다.
"허리를 펴세요. 남들이 이상하게 보잖아요."
그제야 창중이 조심스럽게 허리를 폈다.
면전에 공손히 시립한 그에게 말했다.
"한일건축과 공사 감리계약을 체결했어요."
그가 양귀를 쫑긋 세우며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요즘에 철근 누락과 콘크리트 타설을 부실하게 하는 공사현장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돈 몇푼 아끼겠다고 부실공사를 남발하는 거죠."
창중이 뜨끔한 얼굴로 내 시선을 회피했다.
"그리고 공사가 시작되자마자 본격적인 분양을 할 계획이니까, 내일 당장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모델 하우스를 건설하세요."
"모델 하우스를 건설하려면 최소 20억이 넘는 돈이 필요한데..."
그가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모델 하우스 건설 자금은 제가 부담할게요. 그러니 아무 걱정 하지 마시고, 모델 하우스를 건설하세요."
창중이 반색하는 얼굴로 화답했다.
"최단 시일 안에 모델 하우스 건설을 완성하겠습니다. 회장님."
"그럼 나중에 봅시다."
"예. 살펴가십시오. 회장님."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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