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네버다이 1
뉴욕 센트럴파크의 산책로에 이명석 회장이 나타났다.
그는 수행원 없이 나 홀로 공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명석은 공원의 한적한 벤치에 자리한 채.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러기를 얼마 뒤, 장내에 이즈마엘 교수가 홀연히 등장했다.
그는 명석이 앉아 있는 벤치로 다가갔다.
이즈마엘은 벤치에 앉으며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공사가 다망하신 분이, 미국에는 무슨 일로 온 건가?"
"자네 때문에 내 속이 복잡하네."
"그게 무슨 뜻이지?"
"몰라서 묻는 건가?"
이즈마엘이 양어깨를 으쓱이며 짐짓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기를 잠시 뒤, 넌지시 되물었다.
"강천 문제로 나를 보자고 한 건가?"
명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아들놈이 요즘 CIA에서 무슨 일을 하는 건가?"
"잘 알면서 뭘 묻나?"
"설마...? 내 아들을 현장요원으로 활용할 생각인가?"
이즈마엘이 완강한 어조를 내뱉었다.
"자네는 분명 나에게 아들놈을 CIA에 연결해 달라고 요구했네. 나는 자네가 원하는 대로 강천을 CIA 조직에 연결해줬을 뿐이네. 그런데 이제 와서 나를 원망하는 건가?"
"끄으응..."
이 회장의 입에서 앓는 듯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말문이 막혔다.
이즈마엘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기를 얼마 후.
이 회장이 격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는 아들놈이 CIA의 자발적인 협력자 정도로 활동하기를 원했네. 비지니스를 하면서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그런 관계를 원했다고. 이 정도로 깊숙이 개입하는 건 절대 원하지 않았네!"
이즈마엘이 고개를 완강히 저었다.
"그건 회사(CIA)에서 결정할 일이지, 자네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닐세."
"흐으음..."
명석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자네 집안은 대대로 CIA에 협력한 가문이지. 자네의 선친인 이학수 회장은 중정(KCIA)을 퇴직한 후, CIA의 자발적인 협력자로 활동하면서 회사를 키웠네."
이즈마엘의 말대로 성진그룹의 창업자인 이학수 회장은 1960년대 중정 요원으로 활동하면서 CIA 요원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는 중정을 퇴직한 뒤, 건설회사를 설립했고.
베트남에서 큰돈을 벌었다.
이학수가 베트남에서 거액을 벌어들일 수 있었던 배후에는 CIA 조직이 있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베트남에서 거액의 공사를 잇따라 수주했고.
그걸 발판으로 이학수는 오늘날의 성진그룹을 일구어냈다.
그 대가로 한국과 중국, 북한 고위 인사들의 정보를 주기적으로 CIA에 전달했다.
비지니스를 한다는 명목으로 중국과 북한, 한국 고위층을 자주 접한 탓이다.
이학수의 뒤를 이어서 성진그룹의 총수가 된 명석 역시 CIA의 자발적인 협력자로 활동하면서, 그들에게 주기적으로 정보를 전달했다.
그 대가로 비지니스 측면에서 CIA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자동차와 철강 품목을 대상으로하는 미국 상무부의 징벌적인 반덤핑 관세의 철퇴에서, 성진자동차와 성진철강이 무사할 수 있었던 주된 배경이었다.
명석이 고심이 역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들놈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자네도 전혀 모르는 건가?"
이즈마엘이 냉정한 태도로 대꾸했다.
"회사의 일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고 하지말게. 자네에게 좋을 일이 없으니까."
그말을 끝으로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
미국 재무부.
샌드럼 금융조사국장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재무부 산하의 금융조사국은 북미 지역의 금융계좌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특히 10만 달러(1억 3천만원) 이상의 입출금을 실시간으로 추적하는 한편, 블랙머니의 유무를 확인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샌드럼은 뱅크 오브 아메리카 은행의 시카고 지점에 개설된 계좌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느날 갑자기 300만 달러(39억)가 해외 여러군데의 계좌에서 동시에 입금된 탓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계좌의 주인은 돈이 입금되자마자 300만 달러 전액을 현금으로 인출했고.
기다렸다는 듯 계좌를 해지했다.
누가 봐도 수상한 금융거래였다.
빼도 박도 못하는 일이었다.
자금의 출처부터 의심스러웠다.
그가 사무실 책상에서 뱅크 오브 아메리카 은행의 계좌 정보 서류에 시선을 모을 찰나.
부하 직원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계좌에 돈을 입금한 해외 계좌를 역추적한 결과, 지금 현재 존재하지 않는 계좌로 드러났습니다."
샌드럼은 부하 직원이 올린 추가 보고서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면전에 서 있는 수하 직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계좌의 소유주에게 소환장을 발부하게."
"그게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자세히 말해봐."
"계좌의 소유주가 전직 CIA 요원의 배우자로 밝혀졌습니다."
샌드럼이 신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조사를 해봐야 아는 거니까, 일단 계좌의 소유주에게 소환장부터 발부하게."
부하가 우려하는 얼굴로 말했다.
"괜히 벌집을 건드리는 게 아닐까요?"
"벌써부터 걱정하지 말고, 내 말대로 소환장부터 발부해."
샌드럼은 그리 말하며 부하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비슷한 시각.
레스터 부국장은 랭글리 CIA 본부에 출근한 뒤, 게리 스톤 수석작전요원을 면전에 호출했다.
레스터는 눈 앞에 나타난 스톤에게 지시를 내렸다.
"제임스(강천의 암호명)의 모든 자료를 삭제하게."
스톤이 반색하는 얼굴로 물었다.
"결심하신 겁니까?"
레스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를 이어갔다.
"그놈의 훈련 자료를 모두 삭제하고, 교관들의 입도 철저하게 단속하게."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나가봐."
"고맙습니다. 부국장님."
스톤은 그말을 끝으로 사무실에서 재빨리 사라졌다.
레스터의 입에 비릿한 조소가 내걸렸다.
그는 책상 서랍에서 강천의 신상파일을 꺼내자마자 라이터불로 미련없이 태워버렸다.
완벽한 흔적 지우기였다.
그는 스테인레스 휴지통에 한줌의 재로 산화한 강천의 신상파일을 집어던진 후, 보안 노트북에 시선을 모았다.
노트북 화면에는 그의 비자금 계좌가 드러나 있었다.
레스터는 CIA에서 30년 동안 근무하며, 크고 작은 불법적인 비밀 프로젝트에 관여했고.
그 덕분에 중남미에서 압수한 다량의 코카인을 수중에 넣을 수 있었다.
그는 전 세계에 그물망처럼 퍼져있는 CIA 조직을 이용해서, 압수한 코카인을 밀매했고.
그 결과 1억 달러(1,300억)가 넘는 비자금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가 강천에게 지급한 기본 연봉과 보너스는 모두 비자금에서 나온 돈이었다.
레스터는 강천을 자신의 비밀 병기로 활용할 속셈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CIA에서 강천의 존재를 완벽하게 지우는 게 급선무였다.
그는 강천을 필두로 자신의 비선 조직을 재구축할 계획이었다.
강천은 무늬만 CIA 요원이었다.
CIA의 전산망은 물론이고, 블랙요원의 문서 보관 창고에도 그의 파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날 밤.
레스터는 워싱턴 다운타운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민주당의 워렌스 대선후보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저녁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워렌스는 시종일관 레스터에게 극진한 환대를 베풀었다.
자신의 딸을 구출하는데 앞장선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런 탓일까.
그는 자신이 백악관에 입성할 경우, 레스터를 중용할 뜻을 은근히 내비쳤다.
"원하시는 자리가 있습니까?"
그러자 레스터가 기다렸다는 듯 즉답했다.
"국가정보국(DNI)에서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국가정보국은 중앙정보국(CIA)과 정보방첩국(OICI), 국가안보국(NSA), 국방정보국(DIA), 연방수사국(FBI) 등 미국의 16개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막강한 조직이었다.
레스터는 정보 차르로 불리는 국가정보국의 국장이 되고 싶다는 의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워렌스가 긍정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만약 내가 백악관의 주인이 된다면, 부국장님이 원하는 보직을 책임지고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레스터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후보님,"
"별말씀을. 내 딸아이를 구해주신 분인데, 이 정도는 해드려야죠. 하하하...!"
워렌스가 유쾌한 웃음을 내비쳤다.
그러기를 잠시 뒤, 은근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딸아이를 현장에서 구출한 요원을 만나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레스터가 고개를 완강히 저으며 대꾸했다.
"현장에서 구출 임무를 담당한 요원은 정체를 함부로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래도 한범쯤 만나서 저녁식사라도 대접을 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러니 부국장님이 자리를 만들어 주시죠."
레스터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러기를 잠시 뒤.
못 이기는 척, 워렌스의 요청을 수락했다.
"제가 자리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럼 부국장님이 책임지고 자리를 만들어 주세요."
레스터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후보님."
레스터는 자택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비밀 계좌를 관리하는 비선 요원과 전화통화를 나누었다.
-재무부 녀석들이 쓸데없이 일을 키우고 있습니다.
"자세히 말해보게."
-시카고에 소재한 뱅크 오브 아메리카 은행의 계좌를 들쑤시는 모양입니다.
"일처리를 깔끔하게 하지 못한 건가?"
-죄송합니다. 관리하는 계좌가 많다보니... 제가 미처 신경을 못쓴 것 같습니다.
"담당자가 누구인가?"
-샌드럼 금융조사국장이라고 하더군요.
"내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앞으로는 계좌 관리에 만전을 기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부국장님.
*
학교에서 교양과목인 영문학과 부전공인 경영학을 차례로 수강한 뒤.
학생 식당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식당에서 새우볶음밥으로 저녁 식사를 해결한 후, 아파트로 직행했다.
집에 도착할 무렵.
김한용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가 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도련님."
나는 그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내 돈을 훔친 건 분명 잘못된 일이었지만.
그의 딱한 사정을 알게되자, 나는 김한용을 책망하고 싶은 마음이 저 멀리 달아났다.
나름 그의 처지를 이해한 탓이다.
나 역시 수많은 전생에서 피치못할 사정으로 남의 돈을 훔친 경험이 있었다.
물론 그 당시 나는 돈을 훔친 대가로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단 한번도 내 처지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비참한 전생을 경험한 탓일까.
김한용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그가 흰봉투를 나에게 내밀었다.
"조그만 돈이지만, 형편이 되는 대로 반드시 돈을 모두 갚겠습니다. 도련님."
"너무 애쓰지 않으셔도 되요."
그리 대꾸하며 김한용에게 돈봉투를 되돌려 주었다.
허나 그는 나에게 돈봉투를 강제로 떠넘기며, 장내에서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가 건네준 돈봉투 속에는 미화 2천 달러(260만원)가 들어있었다.
30만 달러(3억 9천만원)에는 턱 없이 모자란 돈이었다.
허나, 나는 김한용의 마음 씀씀이가 마음에 들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나에게 돈을 갚으려고 노력한 탓이다.
그날 새벽.
워싱턴 DC 인근의 포토맥강을 찾았다.
등평도수의 신법을 만끽하기 위함이었다.
요즘 내 서전트 점프력은 150미터까지 치솟은 상황이었다.
그 덕분일까.
강물을 평지처럼 걷는 등평도수가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았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뒤.
야밤의 창공으로 몸을 날렸다.
150미터 높이까지 치솟자, 내 몸이 지상으로 속절없이 추락했고.
포토맥강으로 추락하기 바로 직전.
세찬 물살을 발판 삼아 다시 밤하늘로 쾌속하게 몸을 날렸다.
차앗!
한소리 기합소리가 장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졌고.
그와 동시에 내 몸이 전방을 향해 쏘아진 화살처럼 날아갔다.
일반적인 등평도수를 최소 수십배 이상 능가하는 초절한 경신법이었다.
나는 그날, 새벽 내내.
극상승의 등평도수를 만천하에 과시했다.
- 작가의말
선작 추천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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