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환생 12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다.
나는 지난 석달 동안 나름 학업에 열중했고.
그 덕분에 정외과 기말고사에서 A학점을 받았다.
당연한 귀결이었다.
월마트에서 캔맥주와 치킨, 피자를 잔뜩 구입한 뒤.
아파트로 곧바로 직행했다.
나홀로 조촐한 자축파티를 열기 위함이었다.
A학점을 받아서 그런지, 기분이 너무 좋았다.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거실 소파로 직행했다.
소파 앞에 놓여진 간이 테이블에 캔맥과 피자, 치킨을 내려놓자마자.
곧바로 자축파티를 열었다.
캔맥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피자와 치킨을 폭풍흡입했다.
치킨과 피자를 안주삼아 시원한 캔맥을 물처럼 들이킬 무렵.
장내에 초인종 소리와 남자의 목소리가 연거푸 울려퍼졌다.
"스탠 의장님의 일로 찾아왔습니다."
올리버의 부친인 스탠 하원의장이 보낸 사람같았다.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문을 벌컥 열자, 낯선 백인 남성이 보였다.
그는 말쑥한 정장 차림이었다.
그가 정중한 태도로 초대장을 내밀었다.
"스탠 의장님의 자택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와주십시오."
초대장을 살피자, 스탠 의장이 만년필로 작성한 초대 문구가 쓰여있었다.
나름 정성이 들어간 초대장이었다.
남자에게 긍정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한번 생각을 해볼게요."
"초대장에 있는 연락처로 전화를 주시면 제가 직접 모시러 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그리 말하며 현관문을 닫았다.
소파 앞에 놓여진 간이 테이블에 초대장을 내던진 후, 잠시 중단됐던 자축 파티를 다시 이어갔다.
푹신한 소파에 온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맥주와 치킨, 피자를 봄날의 게눈 감추듯 후딱 해치웠다.
그 많던 캔맥주와 치킨, 피자가 깨끗하게 사라졌다.
무려 500달러(65만원)에 달하는 녀석들이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내 신체는 알코올을 비롯한 각종 노폐물을 자동적으로 체외로 배출시켰다.
공기중으로 기화시킨 것이다.
하루 24시간 동안 전신 대주천이 자동적으로 발현된 덕분이었다.
내 신체는 행주좌와(行住坐臥)에 구애받지 않고, 전신 대주천이 운행되는 시스템이었다.
이 능력은 수호신이 부여한 초월적인 힘이었다.
당연히 나에겐 전신 대주천을 중단시킬 권한이 없었다.
수호신의 권능이었기 때문이다.
알콜을 비롯한 각종 노폐물이 실시간으로 체외로 배출된 탓일까.
나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특히 갈증이 심했다.
결국 아파트를 박차고 밤거리로 나섰다.
술집에서 시원한 맥주를 미친듯이 들이키고 싶었다.
내 발걸음은 아파트 인근의 술집으로 향했다.
술집 안으로 들어서자, 조지타운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과 다운타운에서 일하는 샐러리맨, 동네 주민들이 저마다의 테이블을 점유한 채.
금요일 밤의 술자리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바텐더가 있는 기다란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테이블에 앉으며 병맥주를 주문했다.
바텐더에게 1달러 지폐 3장을 건네자, 그가 병맥을 나에게 건넸다.
시원한 병맥을 목젖 깊숙이 들이킬 찰나.
갑자기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격렬한 고함소리와 사람들끼리 치고박는 소리가 술집 안에 메아리쳤다.
소음의 근원지는 출입구 쪽이었다.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녀석이 시야에 들어왔다.
녀석은 오늘도 독고다이로 덩치 2명을 상대하고 있었다.
나름 복싱 훈련을 체계적으로 한 탓일까.
녀석은 덩치 두명을 효과적으로 요리하고 있었다.
현란한 풋워크를 밟으며 잽과 스트레이트, 훅 등을 유효적절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허나 녀석의 주먹은 그리 강해 보이지 않았다.
덩치들에게 여러차례 유효타를 적중시켰음에도,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대머리 덩치가 갑자기 녀석의 얼굴을 목표로 당구공을 내던졌다.
그런 탓일까.
현란한 풋워크를 밟으며, 쥐새끼처럼 덩치들의 주먹질을 잘도 피하던 녀석의 얼굴에 핏자국이 흥건해졌다.
눈두덩이를 직격당한 모양이었다.
그가 당구공에 안면을 직격당한 충격으로 휘청이자.
덩치들이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녀석의 몸을 술집의 맨바닥에 거칠게 내던졌다.
그 후, 잔인한 주먹질과 발길질을 퍼부으며 녀석을 죽일 듯이 구타했다.
3달 전과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올리버는 미친놈 같았다.
단신으로 2명 이상의 덩치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시비를 걸었다.
왜 저런 짓을 하는 걸까?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 덩치들은 어느 정도 자비심이 있었는지, 올리버가 의식을 잃자 곧바로 구타를 중단했다. 그 뒤, 술집에서 도망치듯 몸을 숨겼다.
올리버는 정신을 잃은 채, 술집 바닥에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골절상은 없어 보였다.
양팔과 두다리, 늑골 부위가 멀쩡했다.
당구공에 맞은 눈두덩이가 심하게 부어오른 게 고작이었다.
보기보다 맷집이 강한 녀석이었다.
전신 골절상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뼈다귀가 강해진 모양이었다.
흔히 말하는 통뼈로 진화한 것 같았다.
녀석의 한심한 모습을 주시하며 병맥을 들이켰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올리버가 몸을 꿈틀거렸다.
그러기를 잠시 뒤,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진 정신으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후, 내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섭섭해. 내가 놈들과 싸우는 걸 보면서도 수수방관하다니... 우리 사이가 전생의 브로(Brother의 약칭) 관계라고 본인 입으로 직접 말했으면서, 너무한 거 아니야?"
"뭐가 너무한데?"
올리버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당연히 나를 도왔어야지."
웃기는 녀석이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전생의 형제니까?"
"전생의 형제라...?"
"그래. 브로. 그러니까 앞으로는 내가 싸우는 걸 보면, 무조건 나를 도우라고. 그게 브로의 신성한 사명이라고."
"후후후...!"
내 입에서 시니컬한 조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녀석은 지금 나를 상대로 장난질을 치고 있었다.
"네놈은 윤회전생을 안믿는 놈이잖아? 그런 놈이 갑자기 전생타령을 하니까 엄청 웃기는군."
"브로의 말을 처음에는 안믿었는데, 시간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나름의 근거가 있더라구."
녀석에게 짤막하게 되물었다.
"무슨 근거?"
"브로의 얼굴과 눈빛, 분위기가 너무 익숙하더라고. 그래서 전생에 관해서 공부를 좀 해봤어. 그랬더니 브로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올리버가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바텐더에게 추가로 병맥 2개를 주문했다.
나는 그중의 하나를 녀석에게 건넸다.
"맥주나 쳐마시고 내 앞에서 꺼져라."
"나를 너무 쌀쌀하게 대하지 말라고. 브로."
"말끝마다 브로 타령 그만하라고."
"왜, 브로라는 말이 듣기 싫어?"
"니놈이 장난치듯 말하는 게 거슬려서 그래."
"싫은데. 나는 브로라는 단어가 마음에 드는데."
녀석은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이 표정을 영국에서 환생했을 당시, 숱하게 목도했다.
이 자식은 예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헛소리는 그만하자. 네놈과 대화하는 자체가 나에겐 고역이니까."
그리 말하며 술집을 재빨리 빠져나왔다.
허나 올리버는 껌딱지처럼 나를 따라붙었다.
녀석은 술집을 나선 이후에도,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아무 의미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일 밤에 애틀란타의 카지노에서 놀 생각인데, 나랑 같이 갈래?"
생뚱맞은 말이었다.
녀석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나를 가드해주면 수고비로 1천 달러(130만원)를 줄게."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말 그대로 나를 경호해 달라고."
"그런 말을 하는 의도가 뭔데?"
그제야 녀석이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애틀란타에서 큰 판이 벌어지거든. 각자 판돈으로 30만 달러(3억 9천만원)를 들고 홀덤 포커를 치는 판이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녀석이 양어깨를 들썩이며 대꾸했다.
"판이 크다 보니까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른다구."
"그래서 나더러 경호를 책임져 달라는 말이냐?"
"그렇지. 브로처럼 주먹 강한 남자가 필요하다고."
"미안하지만 나에겐 총이 없어."
"그건 걱정하지마. 게임장 안에서는 총기를 사용하지 못하니까."
올리버가 재차 말을 이었다.
"브로처럼 주먹이 강한 경호원이 필요해. 나랑 같이 애틀란타로 갈래? 하루만 나를 보호해주면 1천 달러를 줄게."
녀석이 너무 한심하게 생각됐다.
올리버의 집안은 엄청난 명문가였다.
다수의 유력 정치인과 경제인들을 배출한 집안이었다.
그의 부친인 제럴드 스탠은 현직 하원의장이었고, 개인 자산도 한화로 조단위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올리버는 외동아들이었다.
스탠 의장의 재산을 모두 물려받을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똥과 된장을 전혀 분간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파락호처럼 생활하고 있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온갖 사고를 치고 다녔다.
한심해서 말이 안나오는 수준이었다.
녀석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개소리는 그만하고, 절대 두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마라."
그말을 끝으로 아파트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
짧은 겨울방학이 시작됐음에도 나는 학교를 떠나지 않았다.
갈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나는 태생적으로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수만번의 환생을 전부 기억한 탓이다.
나는 전 세계 곳곳에서 환생한 경험이 있는 탓에, 여행의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했다.
거의 모두 한번씩 가본 장소였기 때문이다.
미국, 유럽,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국가 등등...
모두 익숙한 장소였다.
그런 탓으로 학교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체육관에서 헬스를 즐기며 겨울방학을 보내는데 전념했다.
물론 스탠 의장의 크리스마스 파티 초대는 정중하게 거절한 상태였다.
오늘도 학생 식당에서 저렴한 가격에 맛좋은 음식을 배부르게 포식한 뒤.
체육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체육관에서 500킬로에 육박하는 초고중량 바벨을 양어깨에 맨 채, 하체 스쿼트에 열중할 찰나.
누군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전에 내 아파트에 나타났던 스탠 의장의 수행 비서였다.
그가 나에게 말을 던졌다.
"올리버가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애틀란타에서 포커를 치다가, 상대방이 홧김에 쏜 총에 피격을 당했습니다."
조금 마음이 아팠다.
녀석에 대해서 신경을 안쓰겠다고 수차례 다짐했지만.
사람 마음은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상태가 심각한가요?"
"의사 말로는 생존 확률이 20%에 불과하다고..."
나는 바벨을 내려놓았다.
임종이 임박한 녀석을 만나고 싶었다.
녀석의 생활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누가 뭐래도 올리버는 전생의 내 친동생이었다.
마지막 가는 길에 위로라도 해주고 싶었다.
"지금 어디 병원에 있죠?"
"볼티모어의 존스 홉킨스 병원에 있습니다."
"병문안을 하고 싶으니까 비서님이 도움을 주세요."
"안그래도 공항에 전용기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나섰다.
*
존스 홉킨스 병원의 VIP 병실에 들어서자,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연명치료를 받고 있는 녀석이 보였다.
올리버는 뇌쪽에 손상을 입었는지, 머리에 두꺼운 붕대를 감고 있었다.
녀석을 묵묵히 주시할 찰나, 스탠 하원의장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침통한 얼굴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와줘서 고맙네."
그에게 묵례를 취한 뒤, 넌지시 물었다.
"머리 쪽에 총상을 당한 건가요?"
"총알이 후두부 쪽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다량의 출혈이 발생했다고 하더군."
"의료진의 말인가요?"
스탠 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뇌신경 쪽에도 손상을 입었나요?"
"다행히 뇌신경에는 별다른 손상이 없다고 하더군. 하지만 출혈이 심해서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고..."
스탠은 그말을 끝으로 병실에서 도망치듯 사라졌다.
죽음을 눈 앞에 둔 외동 아들로 인해, 극한의 슬픔에 사로잡힌 모양새였다.
녀석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내 마음은 복잡다단했다.
내면에서 두가지 생각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녀석이 죽거나 말거나 신경쓰지 말자는 쪽과.
전생의 동생을 살려야 한다는 쪽.
이렇게 두가지 생각이 번갈아가며 나를 괴롭했다.
내면의 충돌은 한시간 가까이 이어졌고.
결국 나는 전생의 동생놈을 살리기로 마음먹었다.
왠지 그래야 할것만 같았다.
영적인 직관이었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기운을 오른손의 장심 쪽으로 배출시켰다.
순간 오른손의 장심에서 희뿌연 백색 강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 손끝에서 일어난 백색 강기가 올리버의 뇌쪽으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그후로도 한참 동안 녀석의 뇌속에 치유 에너지의 일종인 백색 강기를 줄기차게 주입했다.
그런 내 노력이 빛을 본 것일까.
1시간 정도가 지나자, 녀석의 눈꺼풀이 껌벅거리기 시작했고.
그러기를 잠시 뒤, 두 눈을 번쩍 치켜 떴다.
내가 발현한 치유 강기가 효과를 보는 순간이었다.
- 작가의말
선작 추천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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