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네버다이 4
옥수역 지하철역에 들어서자, 개찰구 주변에 위치한 개인 사물함이 보였다.
6자리의 비번을 입력하자 사물함이 열렸다.
사물함 안에는 검정색 백팩이 들어있었다.
백팩을 등에 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칸에 들어서자마자 백팩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백팩 안에는 5만원권 돈다발이 가득 들어있었다.
현찰 1억이었다.
영감님이 제공해준 진행비였다.
확실히 우리 영감님은 손이 큰 편이었다.
CIA의 공금을 아낌없이 나에게 퍼주는 모양새였다.
살다 살다, 이렇게 마음씨 좋은 노인네는 난생 처음이었다.
영감님은 아낌없이 퍼주는 나무, 그 자체였다.
살아있는 생불(生佛)이었다.
내 입가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현찰 1억이라는 거금을 진행비로 받은 까닭이다.
나는 이 돈으로 목표물의 집 근처에 월세집을 얻을 생각이었다.
한달이 될지, 두달이 될지, 석달이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아드레노가 옥수동 아파트에 나타날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릴 계획이었다.
물론 학교 문제는 영감님이 알아서 처리해줄 예정이었다.
지하철역을 나서자마자 근처에 위치한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김밥과 떡복이, 튀김, 순대로 배를 채우기 위함이었다.
분식집에서 배가 터지도록 포식했음에도 식대가 겨우 3만원에 불과했다.
물론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비싼 가격이었지만, 내 입장에서 3만원은 껌값이었다.
속을 든든히 채운 탓일까.
갑자기 달달한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그리하여 달달함의 대명사인 카라멜 마키아토로 입가심을 했다.
그 후, 인근의 부동산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드레노의 처자식은 옥수동의 그린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린 아파트 맞은편에는 고층 오피스텔이 있었다.
나는 그날, 옥수동 그린아파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오피스텔에 세를 얻었다.
보증금 1,200만원에 월세 70만원 짜리 오피스텔이었다.
나름 적정 가격이었다.
다음날 밤.
나는 오피스텔의 창가에 우두커니 선 채.
맞은편 아파트에 시선을 고정했다.
두눈에 천안통을 발현한 덕분에 아파트의 전경이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보였다.
내 시선은 외간 남자와 오붓한 시간을 즐기는 그녀에게 집중됐다.
아드레노의 와이프인 김현지는 대놓고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어린 자녀들을 일찍 잠재우자마자, 불륜남을 집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나는 그들의 노골적인 애정행각을 무심한 시선으로 주시함과 동시에.
아파트 주변을 매의 시선으로 관찰했다.
애석하게도 아드레노는 아파트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의 와이프가 바람을 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가족을 위해 대형사고를 친, 아드레노가 불쌍하게 생각됐다.
그는 뻘짓을 했다.
와이프의 불륜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그녀에게 풍요로운 삶을 선물하기 위해 바보같은 짓을 저질렀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할 찰나.
후라이드 치킨과 생맥주가 배달되었다.
나는 침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치맥을 만끽하며 김현지의 불륜행각을 불구경 하는데 전심전력했다.
나름 꿀맛이었다.
*
오전 11시경.
콜로라도 로키 산맥 인근의 공군 기지 활주로에 CIA 전용기가 나타났다.
전용기에서 내린 CIA의 레스터 부국장은 곧바로 헬기로 갈아탔다.
잠시 후, 그를 태운 헬기가 콜로라도 모처로 힘차게 날아올랐다.
레스터는 콜로라도 모처로 향하는 헬기 안에서 스산한 표정을 지으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송두리째 배신한 아드레노에게 지옥같은 고통을 선사할 계획이었다.
허나 레스터는 지금 현재 사적으로 부릴 수 있는 암살요원이 전무한 형편이었다.
그의 불법적인 명령을 이행하는 사병들이 런던과 캘리포니아에서 잇달아 사망한 탓이다.
결국 그는 강천에게 무자비한 살인명령을 하달했다.
암살명령을 수행할 만한 사병이 강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미국 콜로라도 주에 위치한 플로렌스 교도소에 CIA의 레스터 부국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플로렌스 교도소의 보안등급은 현재는 폐쇄된 알카트라즈와 같은 슈퍼맥스급이었다.
슈퍼맥스급은 미국 교도소의 보안 등급 중 가장 높은 등급이었다.
악질적인 중범죄자와 테러범을 전문적으로 수용하는 교도소였다.
허나 레스터는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지하 7층에 위치한 독방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아랍 출신의 테러범인 아지즈가 수용되어 있었다.
레스터는 무장 교도관의 안내를 받으며 독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독방으로 들어서며 교도관에게 나직한 어조로 지시를 내렸다.
"독방 안의 CCTV와 녹음 장치를 전부 오프(OFF)하고, 자네는 문 앞에서 대기하게."
"독방 안에 혼자 계시면 위험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레스터는 그리 말하며 허리춤에서 꺼낸 글록 권총을 들어보였다.
교도관이 체념한 얼굴로 복명했다.
"그럼 저는 문 앞에서 대기하겠습니다. 부국장님."
잠시 뒤.
그는 사형이 목전에 당도한 아지즈에게 글록 권총의 총구를 겨누며, 아이패드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아지즈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책상 위에 놓여진 아이패드에 시선을 모았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그의 만면 가득 참담한 표정이 그려졌다.
그는 아이패드에 드러난 가족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런 탓인지, 아지즈의 두눈에서 굵은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파키스탄에 있는 자네의 가족들이 아주 힘들게 살고 있더군. 어린 아들은 노역장에서 하루종일 일하고 있고, 9살 밖에 안된 딸아이는 돈많은 부자에게 팔려갈 위기더군."
"게다가 자네 와이프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날마다 몸을 파는 것 같던데..."
아지즈가 절망감에 휩싸인 표정을 지으며 제자리에서 힘 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런 모습을 비웃듯 내려다보던 레스터가 한가지 제안을 했다.
"내 말대로 하면, 자네 가족들이 일평생 풍족하게 살 수 있도록 뒤를 봐주겠네."
아지즈의 얼굴에 한가닥 기대심이 떠올랐다.
"그말이 정말입니까?"
레스터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의 가족들이 미국땅에서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원하시는 대로 움직이겠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아지즈가 결연한 얼굴로 즉답했다.
"가족들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레스터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빈라텐을 연기하게, 그렇게만 해주면 자네가 원하는 대로 가족들을 미국으로 데려오지."
아지즈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레스터의 입에서 잔인한 언사가 흘러나왔다.
"빈라텐으로 분한채 미군의 손에 사살을 당하게. 자네의 고향인 파키스탄에서."
아지즈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빈라텐을 연기하면서 미군의 총에 사살을 당하라는 말씀입니까?"
레스터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번 일에 자네 가족의 인생이 달렸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아지즈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였다.
허나 무턱대고 레스터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의 가족을 미국으로 데려와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시면 원하시는 대로 빈라텐이 되겠습니다."
"선금을 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레스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어딘가로 한통의 전화를 걸었다.
1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아지즈의 처와 자녀들이 장내에 홀연히 등장했다.
그런 때문일까.
아지즈가 감격한 얼굴로 레스터에게 감사 인사를 전달했고.
그 뒤, 처자식과 뜨거운 가족상봉의 시간을 가졌다.
레스터는 가짜 빈라텐 섭외 작업을 끝마치자마자, 한국에 있는 강천에게 한통의 익명 메시지를 전송했다.
*
오늘도 나는 오피스텔에서 치맥을 만끽하며 김현지의 아파트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아이폰에 영감님의 메시지가 전송됐다.
<아드레노와 처자식 전원 제거. 반드시 명령 이행할 것.>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삭제버튼을 눌렀다.
영감님은 아드레노를 극도로 미워하는 것 같았다.
보기보다 독한 노인네였다.
힘든 인생을 너무 까칠하게 사는 양반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속편하게 사는 게 최고라는 사실을 모르는 눈치였다.
나이를 똥구멍으로 쳐먹은 영감이었다.
왜 이렇게 독하게 사는지, 당최 이해못할 노릇이었다.
인생은 별거 없었다.
대충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었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쓸데없이 해치면서까지, 살 필요는 없었다.
영감이 눈앞에 있다면, 그런 얘기를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속으로 그같은 생각을 할 찰나.
김현지가 갑자기 어린 자녀들과 외출 채비를 서두르는 광경이 시야에 포착됐다.
그녀는 여행용 캐리어까지 준비한 상태였다.
은신처를 옮길 모양이었다.
아드레노의 언질이 있었던 것일까?
그럴 확률이 높아보였다.
나 역시 외출 채비를 서둘렀다.
그녀를 따라 나서기 위함이었다.
그날 저녁.
김현지는 자녀들을 대동한 채, 강원도 춘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서울 출신인 그녀는 연고가 없는 춘천에서 새 삶을 시작하려는 모양새였다.
그녀는 춘천 시내의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나 또한 그녀를 뒤따라 호텔로 들어섰다.
그 후, 그녀의 옆방에 자리를 잡았다.
룸서비스로 늦은 저녁 식사를 해결하는 한편.
옆방에 있는 김현지의 동태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양귀에 천이통을 발동한 탓일까.
그녀의 숨소리가 천둥처럼 내 귀에 울려퍼졌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그녀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며 외국인 남성과 통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무슨 사고를 친 거야? 당신 때문에 내가 죽을 지경이라고."
-내가 큰 돈을 벌었으니까 조금만 참아.
"바보야. 언제까지 숨어 살아야 하는 거냐고!"
-나도 한국에 들어가서 너랑 같이 있고 싶은데, 지금은 분위기가 안좋아. 그러니까 춘천에서 죽은 듯이 숨어 지내.
"애들은 어쩌고? 당신 때문에 유치원에도 못보내고 있어."
-딱 3달만 참아. 그럼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야.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그건 알려줄 수 없어.
"와이프도 못믿는 거니?"
-그게 아니라, 당신이 알아서 좋을 일이 없어서 그래. 아무튼 나중에 전화를 다시 할게.
아드레노는 그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통화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아드레노는 철두철미한 개자식이었다.
자신의 와이프에게도 행선지를 철저하게 숨기고 있었다.
그녀의 폰을 회수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아드레노는 1회용 선불폰으로 국제전화를 걸었을테고.
통화가 끝나자마자 다른 지역으로 급히 이동했을 게 뻔했다.
그의 통화위치를 추적해봤자, 별무소용이었다.
보너스 100만 달러에 혹해서 이 일을 맡았지만, 생각 외로 장기전이 될 확률이 높아보였다.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이럴 때는 웹서핑과 게임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게 상책이었다.
나는 청바지와 가죽 자켓 차림으로 호텔을 나섰다.
그 후, 인근의 피시방으로 향했다.
피시방에서 웹서핑을 하는 한편,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에 전념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게임에서 렉 현상이 발생했다.
고사양 게임이 아님에도 렉 현상이 발생하자, 나는 열이 받았다,
그래서 바탕화면에 있는 컴퓨터 속성을 우클릭한 뒤, 컴사양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컴퓨터는 그래픽 카드가 너무 저사양이었다.
시피유는 그런대로 쓸만했지만, 그래픽카드는 무려 7년 전에 출시된 보급형이 달려있었다.
속으로 자린고비같은 피시방 업주를 격하게 성토한 뒤.
인근의 밥집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밥집에서 얼큰한 육개장으로 속을 채운 덕분일까.
홍대 클럽에서 그녀들과 격정적인 부비부비를 즐기고 싶은 욕망에 불타올랐다.
결국 나는 길가를 오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홍대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젊음의 열정을 밤새도록 만끽하고 싶었다.
내 뜨거운 본능이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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