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기축통화 1
파리 엘리제궁(프랑스 대통령궁)의 집무실에 독일의 마르셀 수상과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수상, 스페인의 에르난데스 수상, 스위스의 에르키네 수상, 오스트리아의 군터 수상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의 호스트인 프랑스의 미세랑 대통령은 서유럽을 대표하는 각국의 수상들을 정중히 맞이한 뒤.
원탁 테이블의 상석에 좌정했다.
그 후, 좌중을 향해 자신의 의중을 솔직히 피력했다.
"미국은 이제 더 이상 기축통화국으로서의 역할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전락했습니다. 대지진의 여파로 전국토의 4분의 1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남부 11개 주가 남부 연합으로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런 탓으로 전 세계 각지에 주둔 중인 미군들이 거의 모두 북미 본토로 철수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장내에 배석한 각국의 수상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찬동을 표명했다.
직후 독일의 마르셀 수상이 작심발언을 내뱉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사실상 전 세계 유일무이한 초강대국으로 급부상한 대한신국의 원화를 기축통화로 지정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원화를 기축통화로 인정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저 역시 마르셀 수상 각하와 같은 생각입니다. 반드시 반대 급부를 확실히 챙겨야 합니다."
스위스의 에르키네 수상이 맞장구를 치자, 마르셀이 흡족한 얼굴로 열변을 토했다.
"우리 서유럽은 자원이 빈약한 처지에요. 그런 이유로 러시아의 눈치를 보면서 그들의 석유와 가스를 비싼 가격에 매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화를 기축통화로 밀어주는 대가로 대한신국에 저렴한 가격으로 안정적인 석유 공급을 요청할 계획입니다."
좌중이 일제히 박수갈채를 쏟아냈다.
그들이 내심 원하던 바를 마르셀이 공개적으로 표명한 탓이다.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수상은 한발 더 나아갔다.
"대한신국은 전 세계 최고의 시장을 갖고 있습니다. 국민소득이 7만 달러(9,800만원)가 넘는 국민들이 무려 11억 명이나 있는거죠."
"그런 상상을 초월한 거대한 시장을 우리가 놓쳐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대한신국의 원화를 기축통화를 인정하는 대가로 완전한 무역 자유화를 요청할 생각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스페인의 에르난데스 수상이 신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완전한 무역 자유화는 양날의 검입니다. 대한신국의 자동차와 전자 제품은 품질과 가격 경쟁력이 전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만약 유럽과 대한신국 정부 간에 완전한 무역 자유화 협정이 체결된다면, 유럽의 자동차와 전자 산업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겁니다."
직후 독일의 마르셀 수상이 에르난데스의 주장을 곧바로 반박했다.
"그건 각국이 알아서 할 일이지, 자국의 산업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보호 무역을 주장하는 건 무책임한 처사에요."
"우리 독일은 지금 현재도 외국산 자동차들을 무관세로 수입하고 있어요. 완전한 무역 자유화를 몸소 실천하는거죠."
마르셀의 당당한 발언에, 오스트리아의 군터 수상이 못마땅한 얼굴로 비아냥 거렸다.
"독일 3사의 고급 승용차가 대한신국에서 인기가 높다고, 아주 기고만장 하신 것 같습니다."
그의 노골적인 비아냥에 마르셀이 버럭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오스트리아의 산업 경쟁력이 뒤떨어지는 게 우리 독일 책임입니까?"
군터가 성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EU(유럽연합)가 결성된 이후 독일만 가장 큰 수혜를 입지 않았소? 당신들이 유럽의 돈을 모두 쓸어가는 바람에 다른 국가들이 피해를 봤다고!"
"그건 우리 독일 국민들이 근면 성실해서 그런거요. 당신들도 우리 독일 사람들처럼 열심히 일을 하면 될 일 아니오!"
갑자기 장내의 분위기가 험악해진 탓일까.
모임의 호스트인 미세랑 대통령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만 회의를 끝냅시다. 만찬이 준비되어 있으니 다이닝룸으로 이동하시죠."
그리 말하며 좌중을 다이닝룸으로 안내했다.
허나 군터와 마르셀은 서로를 소 닭 보듯 외면하며 저녁 만찬을 하는 내내 격렬한 신경전을 펼쳤다.
같은 독일어권 국가의 정상들이라 그런지, 서로 지지 않으려는 라이벌 의식이 대단한 모양새였다.
*
청와대 집무실에서 한국을 극비리에 방문한 남부 연합의 쿠오모 대통령을 접견했다.
그는 나를 향해 오체투지의 예를 표한 뒤.
경외심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우러러 보았다.
"태양신교의 교황 성하를 뵙게 되어서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소파로 이끌었다.
그 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그가 뜬금없는 요청을 해왔다.
"교황님이 공간이동 능력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소문을 여러차례 접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가련한 중생에게 교황님의 공간이동 능력을 견식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남부 연합의 대통령은 태양교의 독실한 신자가 확실해 보였다.
결국 그의 청을 수락하기로 마음먹었다.
쿠오모는 나를 진정으로 숭배했다.
그의 눈빛과 태도로 알 수 있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공간이동을 체험시켜 드리죠."
그 말과 동시에 우리 두사람의 몸에 투명한 방탄 강막을 덧씌웠다.
직후 남미의 아마존 열대우림을 목표로 공간이동을 발현했다.
방탄강막을 해제하자, 쿠오모가 경악한 얼굴로 아마존의 열대우림과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정말 한 순간에 남태평양에서 아마존으로 공간이동을 한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공간이동은 생각의 속도로 이동하는 능력의 일종이죠. 그래서 제가 마음 속으로 아마존 열대우림을 상상하면 바로 그곳으로 이동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 말함과 동시에 쿠오모의 몸에 다시 희뿌연 방탄 강막을 덧씌웠다.
남태평양에 위치한 대한신국 청와대 집무실을 마음 속에 떠올리자.
익숙한 정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집무실에 도착한 뒤.
방탄강막을 해제하자, 쿠오모가 또 다시 까무러칠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우러러 보았다.
"공간이동 능력은 영적인 능력이에요. 영을 항상 맑게 유지하면 언젠가는 터득할 수 있는 능력이죠."
물론 내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공간이동 능력은 천외천의 내공을 바탕으로한 무학의 일종이었다.
허나 그런 것을 알리 없는 쿠오모는 내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눈치였다.
물론 내 알 바 아니었다.
그후루도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드디어 쿠오모가 본론을 꺼냈다.
"대한신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싶습니다."
"미안하지만 한국은 이미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상탭니다."
"그점은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남부 연합은 조만간 UN에서 정식 국가로 인정받을 예정입니다."
곤혹스런 순간이었다.
나는 미국의 내정에 간섭할 생각이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양국의 전쟁에 대한신국이 끌려들어갈 우려가 있었다.
"미안하지만 상호방위조약은 못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런 탓일까.
쿠오모가 아쉬워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대신 남부 연합이 서유럽과 중국, 러시아 등과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드리겠습니다."
그제야 쿠오모의 얼굴이 다소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교황님."
"그 대가로 우리 원화가 기축통화가 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지를 부탁드립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쿠오모를 배웅한 뒤.
신국은행의 김영찬 행장을 면전에 호출했다.
신국은행은 대한신국의 원화를 발행하고 통화량을 조절하는 한편.
금리 정책을 주관하는 은행이었다.
사실상 경제부총리에 맞먹는 권한을 행사하는 자리였다.
그런 탓으로 나는 태양교의 독실한 신자인 김영찬을 신국 은행장으로 기용했다.
내 말이라면, 끓는 물속에라도 들어갈 정도의 충심을 지녔기 때문이다.
영찬은 내 면전에 나타나자마자 오체투지의 예를 취했다.
그에게 자리에서 일어설 것을 명한 뒤.
창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창밖에 드리워진 울창한 야자수 나무와 남태평양의 푸른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등 뒤에 공손히 서 있는 영찬에게 묵직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미국 정부의 국채가 얼마나 있죠?"
"교황님이 개인적으로 보유한 미국채 2조 달러(2,800조)를 포함할 경우, 총 6조 달러(8,400조)에 달하는 미국채를 보유 중입니다."
그에게 단호한 어조로 지시를 내렸다.
"한달 안에 미국채를 전량 순도 99.99%의 골드바로 교환하십시오."
"6조 달러의 미국채를 골드바로 교환해 달라고, 미국 정부에 요청하라는 말씀입니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등 뒤에 서 있는 그에게 말했다.
"이제 미국채는 휴지조각이 될 날이 멀지 않았어요. 그러니 미국채를 모두 골드바로 교환하십시오."
그리 말하며 고개를 돌리자, 영찬이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복명했다.
"교황님의 말씀대로 일을 추진하겠습니다."
한달 후.
청와대 관저의 옥상에 조성된 루프탑 풀장에서 수영을 즐길 무렵.
정찬수 수상이 면전에 나타났다.
그는 나를 향해 오체투지의 예를 취한 뒤.
곧바로 보고를 올렸다.
"전국 각지에 설치된 난민 캠프 120개소에 총 997만 명의 난민이 입소했습니다."
"범죄 전력과 마약 복용 이력을 확인한 사람들인가요?"
"예. 출신국의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했으니까 믿으셔도 좋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난민들의 안전과 건강에 만전을 기하세요."
"예. 교황님."
*
오후 무렵.
청와대 영빈관에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오스트리아, 스위스의 정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모임의 호스트 자격으로 그들을 정중히 맞이했다.
서유럽 정상들이 일제히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을 내비쳤다.
해외 정상들이 참석하는 공식 석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탓이었다.
우리 일곱명은 원탁 테이블에 차례로 둘러 앉았다.
그러기를 잠시 후, 독일의 마르셀 총리가 일행을 대표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교황님이 공간이동 능력들 구사한다는 소문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저희들에게 공간이동 능력을 보여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교황님."
그들 역시 내 공간이동 능력을 직접 보고 싶어했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대로 공간이동을 발현하기로 마음먹었다.
곧바로 그들 6인의 몸을 희뿌연 방탄강막으로 둘러 쌌다.
동시에 황량한 고비 사막으로 그들을 인도했다.
눈 깜빡할 새에 남태평양에서 고비 사막으로 순간이동을 한 탓일까.
서유럽 정상들은 하나같이 까무러칠 듯 놀란 표정을 지으며, 경외심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나를 우러러 보았다.
잠시 뒤.
우리는 다시 사이좋게 청와대 영빈관으로 복귀했고.
그러기를 얼마 후, 본격적인 논의에 돌입했다.
프랑스의 미세랑 대통령이 본론을 내뱉었다.
"중동 전역에 핵전쟁이 발발한 이후로 러시아의 횡포가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석유와 가스의 가격을 매년 30퍼센트 이상, 인상하는 고가격 정책을 노골적으로 펼치는 중입니다."
마르셀이 말을 덧붙였다.
"아시다시피 중동의 유정은 핵전쟁의 여파로 거의 모두 파괴된 상황입니다."
"게다가 북해 유전도 거의 고갈된 상황이라, 저희 서유럽 국가들은 울며겨자먹는 심경으로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에 의존하는 형편입니다."
그에게 물었다.
"미국에서 석유와 가스를 수입하면 될 일 아닙니까?"
이탈이라의 안토니오 수상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미국 역시 대지진의 여파로 석유와 가스 생산이 급감한 상황입니다. 현실적으로 미국에서 석유와 가스를 수입하는 건 불가능한 상황이죠."
오스트리아의 군터 수상이 간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대한신국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대한신국의 양질의 원유와 천연가스를 저렴한 가격에 공급해 주시면, 원화를 기축통화로 지정하는 일에 우리가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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