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빌어먹을 세상 따위 1
새벽 04시경.
센트럴파크 남서쪽에 위치한 스트로베리 필즈에 들어서자, 검정색 가죽 가방이 보였다.
돈가방이었다.
돈가방을 손에 들고, 장내를 재빨리 벗어났다.
포시즌스 호텔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돈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백달러 지폐 뭉치가 들어있었고.
모두 신권이었다.
총액 50만 달러(6억 5천만원)였다.
50만 달러를 창신증권의 주식계좌로 이체한 뒤 삼승전자의 주식을 추가로 매수하면 게임 끝이었다.
문제는 킹덤 캐피털에 개설한 스트롱 인베스트먼트의 계좌에 50만 달러를 이체하는 방법이었다.
미국 현지 은행에서 소액 무통장 입금 방식으로 돈을 이체하는 건, 방법도 번거롭고 미국 금융당국의 눈에 띌 우려가 있었다.
아무리 소액으로 돈을 송금한다고 해도, 최종 종착지가 킹덤 캐피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확실하고 안전하게 돈을 이체하는 방법은 내가 직접 킹덤 캐피털 은행에 50만 달러를 입금하는 것이었다.
그 방법이 내 입장에서는 제일 편했다.
내 수중에는 외교관 여권과 외교행낭이 있었다.
현찰을 운송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공항의 출입국 심사장을 프리패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오전.
호텔방에서 아침 식사를 해결한 뒤, 외교행낭에 50만 달러를 재빨리 수납했다.
그 후, 백패을 등에 매고 호텔방을 나섰다.
그날 오후.
케이맨 제도의 조지타운에 도착한 뒤 킹덤 캐피털 은행으로 직진했다.
현찰 50만 달러를 스트롱 인베스트먼트 계좌에 입금한 후, 인근의 호텔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호텔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거실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흰색과 검정색의 USB 메모리 2개를 노트북에 연결하고, 킹덤 캐피털 사이트를 열었다.
스트롱 인베스트먼트 법인 계좌에 새로 입금된 50만 달러를 창신증권 증권사의 주식 계좌로 이체했다.
'마이 창신'이라는 트레이딩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50만 달러 어치의 삼승전자 주식을 추가로 매수했다.
내가 보유한 삼승전자 주식의 현재 시세는 대략 135억 안팎이었다.
허나, 나는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삼승전자 주식은 10년 뒤에 20배 이상 폭등할 운명이었다.
그런 탓으로 많은 수의 주식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였다.
허나 돈이 나올 구멍이 마땅치 않았다.
영감님의 일을 처리해주고 받는 보너스가 그나마 돈이 되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노인네의 일을 처리해주면서 돈을 착실히 모으기로 작심했다.
삼승전자의 주식을 대량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
파키스탄의 미군 기지 활주로에 미공군의 수송기가 착륙했다.
잠시 뒤.
수송기에서 빈라텐으로 위장한 아지즈가 나타났다.
그는 미군의 호송을 받으며 이슬라마바드 외곽 방면으로 향했다.
아지즈는 처자식에게 안락한 삶을 선사하기 위해, 빈라텐으로 위장한 채 미군의 손에 사살당할 예정이었다.
그는 대국민 사기극의 주연배우였다.
이런 천인공노할 사기극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장본인은 CIA의 부국장인 레스터였다.
레스터는 CIA를 향한 미국 언론의 격렬한 비난과 대통령의 질책을 무마하기 위해, 이처럼 말도 안되는 황당무계한 작전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빈라텐은 종적이 묘연한 상황이었다.
CIA가 전 세계를 이잡듯이 뒤졌으나, 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결국 레스터는 자신이 총대를 매고 빈라텐을 연기할 배우를 섭외했고.
주연배우로 낙점된 아지즈를 파키스탄으로 보냈다.
대단원의 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함이었다.
*
CIA의 랭글리 본부에 레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게리 스톤 수석작전요원을 면전에 호출했다.
레스터는 눈 앞에 나타난 스톤에게 거두절미하고 지시를 내렸다.
"아지즈가 지하토굴에 들어가는 즉시 작전을 개시하게."
스톤이 조심스럽게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좀 더 시간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레스터가 고개를 완강히 저었다.
"시간이 촉박해. 언론과 대통령이 우리 CIA를 못잡아먹어서 안달일세. 하루빨리 일을 마무리하는 게 최선이지."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나가봐."
"예."
잠시 후.
레스터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드레노가 횡령한 코카인 판매대금을 회수할 방안에 대해서 심사숙고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중남미에서 활동하는 비선요원에게 익명 메시지를 전송했다.
며칠 뒤.
레스터는 자택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중남미의 비선요원이 보내온 메시지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드레노는 전재산을 비트코인에 은닉한 것으로 추측됨.>
<코인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코인 지갑 주소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로 사료됨.>
<아드레노가 사용하는 비밀 이메일 계정을 뒤져봤으나, 코인 지갑 주소를 알아내는데 끝내 실패함.>
그의 미간에 깊은 내천자가 그려졌다.
동시에 불같은 화가 치솟았다.
그의 비밀 창고에는 중남미 카르텔 조직에서 압수한 코카인이 대량으로 은닉된 상태였다.
현시세로 거의 10억 달러(1조 3천억)가 넘는 물량이었다.
레스터는 CIA 조직이 카르텔에서 압수한 코카인의 60% 이상을, 자신의 사설 창고로 빼돌렸다. 물론 그같은 사실을 아는 이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오랜 시일을 두고 은밀히 중간에서 빼돌린 덕분이었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코카인 밀매를 해오면서 단 한차례도 실패를 맛본 역사가 없었다.
아드레노가 딴마음을 품기 전까지는.
그래서 더욱 화가 났다.
자신의 빛나는 코카인 밀매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 탓이다.
레스터는 물욕의 화신이었다.
그는 아드레노의 코인 지갑 주소를 찾아내기로 굳게 다짐했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심중에 지력과 용맹을 동시에 겸비한 강천의 자신만만한 얼굴이 짙게 드리워졌다.
*
에그 샌드위치와 우유로 아침 식사를 해결했다.
소파에 놓여진 백팩을 등에 매고 아파트를 나섰다.
걸어서 30분 만에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정외과 강의실로 들어갔다.
정외과에서 이즈마엘 교수님의 강의를 수강한 뒤, 옆건물에 있는 경영학 강의실로 자리를 이동했다.
경영학 수강을 끝마친 후, 학생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서 한식으로 배를 채운 뒤, 중앙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3월 기말 고사가 코앞이었다.
나는 정외과와 경영학과, 영문학과 교재를 모두 외울 속셈이었다.
기말고사에서 A+ 학점을 받기 위함이었다.
중앙 도서관의 창가 쪽 자리에 착석한 뒤, 전공서적을 책상 위에 꺼내놓았다.
그 뒤, 단전에서 끌어올린 한줄기 내공을 뇌간 깊숙이 숨어있는 송과체(뇌호혈)로 보냈다.
송과체에 내공이 주입되자, 뇌 기능이 평소보다 수백배 이상 활성화됐고.
특히 기억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됐다.
그 덕분일까.
나는 경영학과와 정외과, 영문학과의 전공서적을 단 5분 만에 모조리 암기하는데 성공했다.
경이적인 기억력이었다.
당연히 더 이상 공부할 게 없었다.
전공서적을 모조리 암기한 탓이다.
지금 당장 시험을 봐도 만점을 달성할 자신이 있었다.
그 정도로 내 기억력은 완벽무결했다.
속으로 내 어마무시한 기억력에 대해서 자화자찬을 이어갈 찰나.
영감님의 메시지가 아이폰에 들어왔다.
<오늘 밤 10시에, 자네 집 앞에 있는 공원 벤치에서 기다리겠네.>
나에게 긴히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메시지를 삭제한 뒤, 소설 책이 잔뜩 쌓여있는 장서칸으로 자리를 옮겼다.
소설을 보면서 머리를 식히기 위함이었다.
독서 코너로 자리를 이동한 뒤, 소설을 본격적으로 탐독하기 시작했다.
할 일이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동서양의 맛깔나는 소설을 속독법으로 후딱 해치운 덕분에.
단 3시간 만에 무려 500백권이 넘는 소설을 독파했다.
속독법의 순기능이었다.
도서관에 입실한지 3시간 20분 만에 퇴실을 결정했다.
더 이상 도서관에서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을 나서자 싸늘한 저녁 공기가 나를 감싸고 지나쳤다.
3월 초라 그런지 해만 떨어지면 찬기운이 휘몰아쳤다.
특히 워싱턴은 북동부에 위치한 지역이라 3월 달에도 폭설이 내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한국에 비해서 많이 추운 동네였다.
물론 내 육체는 한서불침(寒暑不侵)인 관계로 추위와 더위를 전혀 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봄의 싸늘한 밤공기는 내 기분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그런 탓일까.
나는 갑자기 한국의 얼큰한 육개장이나 짬뽕 국물이 몹시 땡겼다.
다행스럽게도 조지타운대의 학생 식당에는 한식 코너가 있었다.
이래서 내가 조지타운대를 좋아한다.
학생 식당에서 뜨거운 육개장으로 속을 풀자, 그제야 살 것 같았다.
역시 나는 한국인인 모양이다.
얼큰한 한식을 도저히 끊을 수 없는 탓이다.
아무리 맛있는 양식과 중식을 먹어도, 한식을 주기적으로 먹어주지 않으면.
입에서 가시가 돋아날 지경이었다.
한식에 깊숙이 중독된 모양새였다.
그 즈음, 올리버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제멋대로 내 앞에 앉더니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말문을 열었다.
"미군에 입대할 생각이야."
녀석에게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전쟁터로 끌려갈지도 몰라. 죽음을 각오해야 할 거다."
녀석이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입대하는거야."
"죽는게 두렵지 않냐?"
올리버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임사체험으로 죽는 게 별일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거든. 아무튼 나중에 살아서 만나자."
녀석은 그말을 끝으로 장내에서 모습을 감췄다.
전생의 동생 녀석이 전장으로 떠난다고 생각하자, 조금 마음이 울적해졌다.
물론 그런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팔등신 글래머가 장내에 모습을 드러낸 탓이다.
경영학과 여교수님이었다.
안타갑게도 그녀의 곁에는 피앙세인 서양사 교수가 찰떡처럼 붙어있었다.
빌어먹을 순간이었다.
나는 결국 그녀를 못 본 척하며 식당을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
밤 10시경에 집앞 공원에 들어서자 벤치에 앉아있는 영감님이 보였다.
그의 옆자리에 조용히 착석했고.
직후 영감님이 본론을 꺼냈다.
"아드레노가 조직의 공금으로 비트코인을 구입한 것 같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놈이 은닉한 비트코인을 찾아주게."
그에게 심드렁한 어조로 반문했다.
"그래서 제가 그놈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잖아요? 이제와서 갑자기 그런 지시를 내리면 어쩌자는 겁니까?"
허나 영감님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놈은 고문을 견디는 훈련을 한 놈일세. 자네가 사로잡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네. 아무튼 이미 지난 일이니, 더 이상 그 얘기는 하지 말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물었다.
"비트코인 지갑을 무슨 수로 찾죠?"
"그놈의 흔적을 역추적 하다보면 분명 뭔가 물증이 나올걸세. 그걸 바탕으로 코인 주소를 찾아봐야지."
"바다속에서 바늘을 찾으라는 말인가요?"
영감님이 별 일 아니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번 일은 맡지 못하겠어요. 너무 말이 안되잖아요?"
그러자 영감님의 입에서 유혹적인 언사가 흘러나왔다.
"놈의 비트코인 지갑 주소를 찾는다면, 자네에게 보너스로 300만 달러(39억)을 지급하겠네."
"정말 300만 달러를 보너스로 주는 건가요?"
그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확답했다.
"그리고 진행비도 넉넉히 챙겨주겠네."
그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어디에서부터 일을 시작해야 하죠?"
"일단 놈의 처인 김현지의 이메일 계정과 핸드폰, 수첩, 일기장 등을 살펴보게."
"한국으로 다시 가라는 말인가요? 학교에 복귀한지도 얼마 안됐는데."
"학교 문제는 신경쓰지말게. 내가 알아서 출석 체크도 해주고, 기말 시험도 챙겨줄테니까."
영감님에게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진행비는 얼마나 줄거죠?"
그가 즉답했다.
"미화 10만 달러(1억 3천만원)를 진행비로 지급해 주겠네."
"좋습니다. 한국으로 가는 퍼스트 클래스 항공권을 준비해 주세요."
그말을 끝으로 장내를 유유히 빠져나왔다.
*
한국 항공사의 퍼스트 클래스 좌석으로 들어서자 약간 익숙한 녀석이 시야에 포착됐다.
우리 학교 유학생인 김문성이었다.
녀석은 정외과 졸업반이었고.
나이는 28살이었다.
나보다 7살이 많은 놈이었다.
그런 탓일까.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친근한 태도로 아는체를 해왔다.
허나 나는 녀석에게 볼일이 없는 관계로 대충 고개만 까딱한 뒤.
나에게 배정된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안마 의자를 연상케하는 의자에 온몸을 깊숙이 파묻을 찰나.
녀석이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니가 성진그룹 이명석 회장님의 셋째 아들이라고 하던데...? 그 소문이 사실이냐?"
녀석은 1군 건설사인 대웅건설 회장님의 큰아들이라 그런지, 유학생들의 호구조사에 열심인 모양이었다.
물론 나 역시 녀석에 대해서 어느 정도 소문을 들었다.
돈과 여자에 환장한 속물.
녀석에 대한 대략적인 평판이었다.
- 작가의말
선작 추천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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