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빌어먹을 세상 따위 2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반색하는 얼굴로 악수를 청했다.
"야, 반갑다.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하하하...!"
그와 악수를 교환하며 넌지시 말했다.
"선배님의 소문은 들었습니다."
"그럼 자식아, 형한테 인사를 하러 왔어야지. 어차피 집안 어른끼리 형동생 하는 사인데."
그리 말하며 친근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말해서 금시초문이었다.
이 회장이 대웅건설 회장과 친한 관계였던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에게 물었다.
"우리 아버지랑 선배님의 아버지가 막역한 관계인가요?"
"당연하지. 임마. 내 말이 거짓말같아?"
그가 당당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태도를 보아하니 그의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아무튼 잘됐다. 혼자 가는 게 심심했는데. 헤헤헤...!"
녀석이 간사한 웃음을 내비치며 제멋대로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남이 예약한 좌석에 아무렇지 않게 착석하는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승무원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녀석에게 말했다.
"고객님의 좌석으로 옮겨주세요. 다른 고객님이 예약한 좌석이에요."
허나 녀석은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뻔뻔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아직 손님이 오지 않았잖아.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너는 신경쓰지마라."
예상대로 녀석은 안하무인이었다.
그런 탓일까.
내 입가에 절로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결국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일단 선배님 자리로 돌아가시죠.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과 말싸움을 해봤자 좋을 일이 없잖아요."
그제야 녀석이 말귀를 알아먹은 얼굴로 자리에서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나름 내 눈치를 보는 모양새였다.
17시간의 비행 끝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출입국 심사장을 통과할 찰나.
녀석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시간을 좀 내줘."
"제가 지금 시간이 별로 없거든요. 그러니까 나중에 말하시죠."
"딱 10분만 내줘. 너한테도 득이 될 내용이거든."
그리 말하며 나를 공항 청사 로비에 위치한 카페로 이끌었다.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커피를 음미하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얼마전에 부동산 시행사를 설립했거든. 그런데 초기 자본금이 조금 부족해."
"그런 얘기를 왜, 나한테 하시죠?"
"당연히 너한테 투자를 좀 받으려고 그러는거지."
"죄송한데 저는 돈이 별로 없어요."
"일단 내 말을 좀 더 들어봐."
녀석이 안달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부동산 투기에 나를 끌어들이고 싶어 환장한 모양새였다.
"부동산 시행사업이란 게. 잘만 배팅을 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는 분야라고. 초기 투자금도 생각보다 적어."
"입지 좋은 토지를 계약금만 주고 매입한 뒤에, 토지를 담보로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는거지. 그 후에는 건설사를 섭외해서 아파트나 오피스텔을 선분양하면 만사 오케이라구."
말은 그럴듯했다.
허나 이 세상은 말처럼 쉽게 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는 게 정말 그렇게 쉬운가요? 쉽지 않다고 하던데?"
"당연히 빽 없는 인간들은 제대로 대출을 받기가 힘들지. 하지만 너랑 나처럼 집안이 빵빵한 사람들이 시행사의 전면에 나서면 말이 달라진다고."
조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내가 눈여겨본 맹지(도로에 접하는 부분이 전혀 없는 쓸모없는 토지)가 있는데, 지자체장을 잘만 구워삶으면 고층 아파트 건설이 가능한 3종 일반주거지역으로 용도 변경이 가능해 보이거든."
그가 나를 슬쩍 쳐다봤다.
내 반응을 살피는 눈치였다.
조금 관심이 생기는 내용이었다.
만약 그의 말대로 맹지에 고층 아파트 건설이 가능해지면, 엄청난 시세차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지자체장을 구워삶으면 맹지에 고층아파트 건설이 가능한 건가요?"
그가 잘난체하는 얼굴로 대꾸했다.
"나만 믿고 투자하면 정말 큰돈을 벌 수 있어. 그러니까 돈을 한번 만들어봐. 딱 10억만 투자하면 내가 그돈을 10배 이상으로 불려줄게."
"한번 생각을 해볼게요."
녀석이 명함을 내밀었다.
"정말 이건 좋은 투자야. 나를 한번 믿어봐."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명함을 지갑에 수납했다.
"결심이 서면 연락을 드릴게요."
그리 말하며 카페를 재빨리 벗어났다.
호텔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김문성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는 아무 쓸모없는 맹지를 고층 아파트 건설이 가능한 3종 주거지역으로 용도변경이 가능하다고 호언장담했다.
말하는 태도로 미루어 보아, 지자체장을 어느 정도 구워삶은 모양새였다.
그는 1군 건설사인 대웅건설 출신이었다.
한마디로 부동산 투기를 전문으로하는 곳이었다.
그의 말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는 의미였다.
만약 그의 말대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수백억을 버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맹지는 쓸모없는 토지인 관계로 가격이 아주 저렴했다.
그런 맹지가 고층 아파트 건설이 가능한 3종 주거지역으로 용도변경된다면.
그 자체로 엄청난 돈벼락을 맞는 셈이었다.
토지 가격이 수십 수백배로 폭등하는 탓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녀석이 원하는 대로 그저그런 투자자 1이 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만약 내가 10억을 투자한다면, 시행사를 주도하는 입장이 되고 싶었다.
투자자가 아니라 절반 정도의 지분을 가진 공동 오너.
그 정도의 권한이 있어야 안심이 되는 까닭이다.
말하는 멘트에 사기성이 농후한 녀석에게, 내가 바보처럼 끌려다닐 이유가 없었다.
녀석의 계획에 대해서 좀 더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목표로 하는 맹지와 지자체장이 누군지부터 파악해볼 필요성이 있었다.
그전에 김문성의 현재 재정상황과 집안에서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영감님에게 부탁하면 김문성에 대해서 손쉽게 알아낼 수 있었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영감에게 내가 사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에 대해서 드러낼 경우, 좋을 일이 없을 것 같았다.
*
공항철도를 타고 서울역에서 하차했다.
서울역 3번 출구 개찰구 앞에 위치한 사물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물함에 비번 6자리를 입력하자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사물함 안에는 평범한 백팩이 놓여져 있었다.
백팩을 들고 곧바로 화장실 변기칸에 들어갔다.
백팩 안에는 한화 1억 3천만원이 들어있었다.
5만원권 신권 뭉치였다.
백팩을 등에 매고 화장실을 재빨리 빠져나왔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옥수역으로 향했다.
김현지의 흔적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옥수역에서 내린 뒤, 그린아파트 쪽으로 걸어올라갔다.
그린아파트에 도착한 후, 그녀가 예전에 살던 집에 시선을 고정했다.
두눈과 양귀에 천안통과 천이통을 동시에 발현하자, 집안의 정경이 훤히 보였다.
동시에 집안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가 두귀에 천둥처럼 울려퍼졌다.
평범한 가족이었다.
예상대로 김현지는 서울에서 완전히 뜬 모양이었다.
그같은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길가를 오가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춘천으로 가볼 생각이었다.
3시간 뒤.
춘천에 도착한 뒤, 예전에 묵었던 호텔로 들어갔다.
호텔 프론트 직원에게 5만원권 10장을 건네며 넌지시 물었다.
"한달 전에 이곳에 묵었던 30대 여자를 찾는데요."
호텔 직원이 50만원을 재빨리 받아 챙기며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무슨 일로 그러시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충 둘러댔다.
"저의 큰누나에요. 애들을 데리고 가출하는 바람에..."
나름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리자, 호텔 직원이 딱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원래 이러면 안되는데 손님 사정이 하도 절박해 보이니까 제가 편의를 봐드릴게요."
호텔 직원은 50만원에 고객 정보를 팔아넘기는 주제에, 나름의 합리화를 추구하는 모양새였다.
잠시 뒤.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25일 전에 체크아웃 한 것으로 나오네요."
"확실한 건가요?"
"네. 2명의 어린아이와 투숙한 30대 여자 손님은 그분 밖에 없어요."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을까요?"
호텔 직원이 즉답했다.
"그때 호텔에서 콜택시를 잡아준 것으로 나오네요."
"콜택시요?"
"예. 우리 호텔 손님들이 자주 이용하는 콜택시 회사가 있어요."
"콜택시 회사가 어디에 있나요?"
"호텔에서 좌측으로 300미터 부근에 '정우 콜택시'라는 회사가 있어요. 거기를 찾아가 보세요."
50만원의 효과는 확실했다.
내가 원하는 정보를 충실히 제공해준 탓이다.
호텔을 나서자마자 정우 콜택시가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정우콜택시에 들어서자 배차를 담당하는 직원이 보였다.
그에게도 50만원을 무작정 건넸다.
그런 탓일까.
직원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게 무슨 돈이죠?"
"제가 조금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직원은 그리 되물으며, 내가 건넨 50만원을 조심스럽게 받아챙겼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명도 없는 모양이었다.
"25일 전에 파크호텔에서 태운 30대 여자 손님과 두명의 어린 아이를 찾는 중이에요. 그래서 말인데 배차 정보를 알 수 있을까요?"
직원은 내 돈을 50만원이나 받아먹었다.
그런 때문인지 내가 원하는 정보를 순순히 제공해 주었다.
기브앤 테이크였다.
1시간 뒤.
콜택시 기사 아저씨의 집을 찾아왔다.
그 아저씨는 25일 전에 김현지를 호텔에서 태운 전력이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40대 아저씨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에게도 역시 50만원을 건넸다.
그런 탓일까.
아저씨 역시 내가 원하는 정보를 충실히 제공해 주었다.
*
강원도 양양에 위치한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콜택시 기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김현지는 이 아파트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1동 짜리 나홀로 아파트였다.
나는 아파트 앞의 벤치에 자리한 채.
아파트의 전경에 시선을 집중했다.
양귀와 두눈에 천이통과 천안통을 한가득 끌어올린 탓일까.
아파트의 실내와 그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숨을 내쉬는 소리가 두눈과 양귀에 생생히 전해졌다.
새벽 시간대라 그런지 잠을 자면서 코를 골거나 숨을 내쉬는 소리가 유독 많이 들렸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12층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12층으로 시선을 모으자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나누는 김현지의 모습이 시야에 포착됐다.
그녀는 내연남에게 자신의 신세를 하소연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내용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그녀의 집을 방문하고 싶었으나, 지금은 새벽 시간대였다.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는 게 상책이었다.
공연히 그녀를 놀래키고 싶지 않았다.
나름의 배려였다.
곧바로 벤치에서 운기행공을 시전했고.
무아지경 속을 노닌 덕분인지, 금세 동녁에 붉은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목도했다.
운기행공의 순기능이었다.
얼마 뒤.
김현지가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아이들을 유치원 차에 실어보낸 뒤, 아파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내가 본격적으로 움직일 차례였다.
그녀의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런 탓일까.
나를 발견한 그녀의 얼굴 가득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번져갔다.
"잠시 물어볼 말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가능하신가요?"
나름 정중하게 말한 탓일까.
그녀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따라 나섰다.
카페의 창가 테이블로 자리를 이동했다.
맞은편에 앉은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드레노가 김현지 씨에게 이상한 메시지나 큐알코드, 선물 같은 걸 최근에 보내온 적이 있나요?"
그녀가 조금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메시지나 큐알 코드를 보내온 건가요?"
"그게 아니라 인형선물을 보내왔어요. 친정 엄마 집으로."
"인형선물이요?"
"네. 곰인형을 보내왔더라고요. 애들 선물로."
곰인형이라...?
뭔가 냄새가 났다.
설마, 곰인형 안에 코인 지갑 주소를 넣은 걸까?
일단 곰인형을 확인하는 게 급선무였다.
"곰인형이 지금 어디에 있죠?"
"애들 방에 있어요."
"미안한데 곰인형을 제가 확인해볼 수 있을까요?"
그녀가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해서 확인해보려는 거에요. 아드레노가 조직의 정보를 숨겼을지도 몰라서. 현지 씨가 갖고 있어봐야 위험한 물건이거든요."
"그래도 애들 선물인데..."
그녀가 머뭇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저에게 곰인형을 파십시오."
그리 말하며 5만원권 돈다발 1개를 내밀었다.
500만원이었다.
예상대로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정말 이 돈을 저한테 주시는 건가요?"
"네. 그러니까 곰인형을 나한테 파세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건넨 5만원권 돈다발을 패딩 점퍼의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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