陰陽眞經
밀실은 방음이 잘 안되는지 마희의 방의 소리가 다 들렸다.자세히 살펴보니 공기구멍으로 보이는 몇개의 통풍구가 마희의 방과 연결된 것 같았다.
하지만 소리만 들리고 구체적인 대화는 들리지 않았다.마희는 어떤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당문호는 적단을 찾고 싶었지만 근력이 돌아온게 들킬가봐 조심했다.한참동안 진행되던 대화가 끊겼다.잠깐의 시간이 더 지나자 마희의 교음이 들려왔다.
당문호는 필사적으로 약기운을 의지로 누르고 있었는데 마희의 내공이 섞인 교음을 듣자 참기 힘들어졌다.더이상 들키고 말고를 생각하지 않고 밀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다른데로 분산시키니 그나마 괜찮은 것 같았다.자꾸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가까운 곳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서랍안에서는 몇권의 책이 나왔는데 전부 낯뜨거운 춘화집 같은 것들이었다.잔뜩이나 힘든 상태에 놓여있던 당문호는 재빨리 책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서랍을 닫았다.
건드린 흔적이 안 남게 조심조심 살피고 하나하나 원위치 시켰다.그러다 맞은편 구석에서 낮은 궤짝위에 놓여있는 붉은색 단환이 가득한 항아리를 발견했다.아마 정보를 준 남자가 말한 적단인 것 같았다.당문호는 두개의 적단을 꺼낸 뒤 항아리 두껑을 닫았다.
적단을 품속에 잘 갈무리한 뒤 당문호는 벽과 바닥을 조심스레 두드렸다.혹시 밖으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하지만 빈소리가 나는 곳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당문호는 춘화집이 있던 수납장에 가서 춘화집들을 깨냈다.그리고 수납장을 옮기고 그 뒤의 벽과 바닥도 두드려 보았으나 성과가 없었다.다시 수납장을 원위치 하고 춘화집들을 원래와 똑같이 서랍에 넣었다.
벌써 시간이 삼각을 넘어 반시진이 되어가지만 마희의 교성은 끊이질 않았다.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자꾸 그쪽으로 생각이 쏠리는지라 당문호는 다시 한번 밀실을 수색했다.딱히 뭘 하려는게 아니라 정신을 다른쪽으로 집중시키고 싶은거였다.
목적없이 여기저기 뒤지던 당문호는 문득 자신이 항아리가 놓여있는 쪽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항아리를 조심스레 들어서 옮겼다.
이 시대의 기관은 아주 단순하다.기계학이 발달하지 못해서 복잡한 기관은 만들지 못한다.당문호는 여기저기 두드려보면서 기관을 파악하려 했지만 알아낸게 없었다.
손님과 마희는 이미 반시진을 넘겼다.언제 끝나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다.당문호는 급한 마음에 궤짝을 통째로 들어올렸다.그러자 궤짝이 들리면서 그 밑에 작은 궤짝 하나가 나타났다.
작은 궤짝위에 중간이 비어있는 큰 궤짝을 두껑처럼 덮어놓은 것이다.실로 고정관념의 허를 찌르는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작은 궤짝에는 자물쇠가 있었지만 당문호는 손쉽게 열어냈다.정교하게 만든 최근의 자물쇠가 아니라 옛날 자물쇠라서 새끼손가락을 넣고 여기저기 건드리자 바로 열렸다.
궤짝안에는 두권의 책이 있었다.촛불 가까이로 가져가서 살펴보니 음양진경 내공편과 음양진경 무공편이었다.책의 재질은 얇은 가죽으로 되어 있었고 글은 주사(朱砂)로 썼다.먹물을 사용한지 천년이 넘으니 아마도 천년도 더 이전에 제작된 책 같았다.
당문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우선 내공편을 봤다.내공편은 글자가 이백자도 되지 않았다.내공편을 머릿속에 저장한 뒤 무공편을 읽었다.무공편은 이천자가 넘었다.그것도 머릿속에 저장한 뒤 책을 다시 궤짝에 넣었다.
궤짝 두껑을 닫으니 딸칵 하는 소리가 나면서 자물쇠가 잠겨졌다.그리고 아까 당문호가 손가락을 넣었던 자물쇠구멍이 사라졌다.당문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자물쇠였다.
단약 항아리까지 원위치 시킨 뒤 당문호는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두 남녀의 화합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당문호는 아까 기억해둔 음양진경을 머릿속으로 되새기기 시작했다.하지만 모르는 글씨가 너무 많았다.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오래된 옛글자들이다.글자의 형태를 보고 대충 유추할 수는 있지만 글자 하나라도 잘못 해석하면 큰일난다.
마희와 손님은 두시진후에야 일을 마쳤다.마희가 뭐라고 소리를 치니 곧바로 사람들의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잠시의 시간 뒤 당문호를 밀실로 옮긴 마희의 제자가 내려와서 다시 당문호를 들쳐업었다.
마희의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옷가지가 여기저기 널려있는걸 보면 두 사람은 목욕을 하러 간 것 같았다.마희의 제자는 당문호를 업고 경공을 사용해서 달렸다.급한 일이 있는 듯 당문호를 감옥에 넘기자마자 경공을 사용해서 되돌아갔다.
당문호가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돌아오자 감옥에 갇혀있던 남자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당문호를 바라보았다.자신들이 가축처럼 사육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남자들을 보며 당문호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눈앞의 환락에 빠져서 죽음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간수가 나가자 당문호는 바로 누워서 자는척 했다.말을 걸려던 다른 남자들도 당문호가 자자 하나둘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다른 사람들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하는 것을 확인한 당문호는 조용히 몸을 일으킨 뒤 단약 하나를 던져줬다.
남자는 단약을 확인하자 당문호를 향해 포권을 한 뒤 바로 입안에 넣었다.단약을 먹은 남자는 편하게 앉아 눈을 감았다.일각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남자는 벌떡 일어서서 감옥 창살을 손으로 비틀었다.
창살사이로 몸을 빼낸 남자는 당문호에게 다가왔다.당문호도 조심스레 움직여 가까이 갔다.
"형장의 은혜는 내 잊지 않고 갚겠소.그런데 형장은 왜 적단을 복용하지 않는거요?"
"소제가 아직 춘약의 기운이 빠지지 않아 함부로 복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 화합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오?혹시 무슨 특별한 일이 었었던 거요?"
"손님이 갑자기 와서 밀실에 갇혔습니다.적단도 그때 얻어온 것이구요.두시진정도 있다가 다시 여기로 보내졌습니다."
"아마 이각정도 더 지나면 춘약의 기운이 사라질 것이오.그다음 적단을 복용하면 내공을 회복할 수 있소.그리고 찾아온 자는 마희의 사형인 음양마군일 가능성이 높소."
"음양마군은 절정을 바라보는 고수요.그자까지 있다면 정면대결은 힘드오."
"여기 장원 중간에 커다란 나무 하나 있는걸 보았을 거요.그 나무에서 나오는 꽃향기가 양강계열의 내공을 금제하오.내가 거기에 불을 지필 것이오."
"만약 그 나무에 불이 붙으면 마희도 여기를 두고 도망갈 수밖에 없을거요.아마 여기 사람들은 다 죽이겠지.그러니 그전에 도망을 가시오."
"만약 내가 실패하면 형장에게 부탁하겠소.나무에서 기름이 많이 나오니 불이 아주 잘 붙소.큰 혼란을 일으켜야 도망갈 수 있을것이오."
당부를 끝낸 남자는 한번 더 포권을 하고 밖으로 움직였다.남자의 움직임은 날랜 표범 같았다.조용히 나가서 간수의 혈도를 짚은 뒤 목을 비틀었다.죽은 간수를 침대로 옮겨다가 잠을 자는것처럼 꾸며놓고는 감옥문을 열고 나갔다.
내공으로 감옥문을 여는 모습이 아주 능숙해 보였다.대단한 고수거나 이쪽 경험이 많은 사람인 것 같았다.당문호는 내부를 관조하며 춘약의 기운이 사그라들기를 기다렸다.
춘약의 기운이 사라지자 당문호는 온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당문호는 적단을 입에 넣은 후 내공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칠촌을 잡힌 뱀마냥 꼼짝달싹 못하던 흑룡은 화가 났는지 단약의 기운을 전부 삼켰다.그러고는 사지백해를 돌아다니면서 독의 기운을 몰아냈다.일각정도 시간이 걸린 남자와는 달리 당문호는 차 한잔 식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독을 다 몰아내고도 화가 안 풀렸다는 듯이 흑룡이 꿈틀거렸다.당문호는 창살을 비틀고 밖으로 나온 뒤 다른 남자들이 갇힌 감옥의 창살들도 비틀어버렸다.그리고 조심스럽게 감옥을 벗어났다.
감옥밖으로 나오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불타고 있는 나무가 보였다.푸른잎이 가득한 나무는 마른장작처럼 활활 타고 있었다.마희의 여제자들이 물을 길어다 나무에 끼얹고 있었다.표범같은 사내는 음양마군이라 추정되는 사내와 손속을 겨루면서도 잊지 않고 여제자들을 방해했다.
사내가 음양마군을 상대하면서 아직 여유가 있어보이자 당문호는 은밀히 움직여서 주방으로 향했다.주방에서 기름단지들을 찾아낸 당문호는 주변에 기름을 흩뿌린 후 부엌에 있는 불씨들을 던졌다.곧바로 부엌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당문호는 미리 가죽으로 감싸서 챙긴 불씨를 손에 들고 다른곳으로 움직였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무와 새로 불붙은 주방에 쏠려서 움직이기 참 편했다.
당문호는 장원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몇군데 불을 지른 후 당문호는 다시 나무가 있는 중앙으로 돌아왔다.
음양마군은 여기저기 불이 붙자 신경이 분산되어 사내와의 대결에 집중하지 못했다.하지만 실력차가 있어서 사내도 음양마군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아까 제자들을 지휘하던 마희는 자리에 없었다.
표범사내의 말대로 나무가 기름기가 많은 거라면 물을 아무리 뿌려도 불을 끄지 못한다.그저 나무가 타는 속도를 조금 늦출 뿐이다.진흙같은 것들로 나무 표면을 덮어야 불을 끌수 있지만 환희궁의 사람들이 전문적인 소방지식이 있을리 만무했다.
나무의 불길이 점점 거세지자 음양마군은 사내와의 대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어차피 나무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포기한 것이다.음양마군이 사내에게만 집중하자 사내는 금세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이때 마희가 음양진경이 들어있는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여기저기 불길이 솟아오르자 감춰두고 있던 음양진경을 꺼내온 것이다.마희는 상자를 꼭 껴안고 음양마군과 사내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사내가 점점 열세에 처하자 당문호는 어떻게 사내를 도울지 고민했다.사방이 호수로 둘러싸인 섬이라 밖으로 도망가는 길은 다리밖에 없다.도망가면 추적자가 바로 붙을 것이니 어떻게든 더 혼란한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당문호는 메추리알 크기의 작은 조약돌들을 모으면서 기회를 엿봤다.음양마군이 필승을 자신하고 온 정신을 사내에게만 쏟아부을 때 기습을 할 계획이었다.하지만 표범사내의 손속도 만만치 않아 열세에 처했지만 패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나무가 더 타서 여제자들까지 싸움에 동원되면 표범사내는 잡힐게 뻔하고 자신도 도망가지 못한다.빠른 결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당문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렀다.
삼십육계에 위위구조(圍魏救趙)가 있다.위나라가 조나라를 침공하자 위나라를 공격하는 척 해서 조나라를 구한다.당문호는 마희를 향해 연속으로 조약돌을 던졌다.
마희는 무공실력이 그닥 뛰어나지 않았다.당문호가 던진 조약돌에 금세 손발이 어지러워졌다.기회가 생기자 당문호는 그전에 던지던 돌보다 훨씬 빠르게 돌을 던졌다.마희의 예상을 넘는 빠른 속도로 날아간 돌은 음양진경이 들어있는 상자를 맞췄다.
암기의 속도를 속여서 상대방을 방심하게 만든 다음 결정구를 던진 것이다.돌에 맞은 상자는 마희의 손을 벗어나 불타고 있는 나무에 부딪혔다.
상자가 불에 잘 타는 재질로 되었는지 상자도 금세 불이 붙었다.상자가 불에 타자 음양마군도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다.사내는 음양마군이 흔들린 기회를 틈타 일장을 먹였다.
마희는 상자에 불이 붙자 미친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걸치고 있던 가죽피풍의를 벗어서 상자를 정신없이 내리쳤다.당문호가 마희를 향해 암기를 던지려는 순간 이변이 발생했다.
당문호를 장원까지 끌고 왔던 노파가 갑자기 칼을 꺼내 마희의 등을 찔렀다.제정신이 아니었던 마희는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등을 찔리고 말았다.화가 난 마희는 돌아서서 노파를 향해 일장을 휘둘렀고 노파는 뒤로 가볍게 물러섰다.
마희는 내공이 노파보다 강하지만 무공실력은 오히려 부족했다.일장일장의 힘은 강하지만 피하기 어렵지 않았다.노파는 방향을 바꾸면서 마희의 공격을 피했고 마희는 집요하게 노파를 쫓았다.
마희가 일장을 내지른 뒤 장을 거둘 때 당문호를 지하밀실로 옮겼던 여제자가 마희의 등뒤에 한칼 더 먹였다.출혈이 심했는지 아니면 오늘 너무 큰일을 연속 당해서 심기가 다했는지 마희는 곧바로 쓰러졌다.노파는 다른 여제자로부터 전해받은 낭아봉으로 마희의 머리를 깨뜨렸다.
마희가 죽자 노파는 가슴속에서 하나의 영패를 꺼내들었다.그러자 절반이 넘는 여제자들이 무릎을 꿇으며 '장문인을 뵙습니다'라고 외쳤다.
음양마군은 판을 뒤집기 어렵다 판단하자 바로 도망을 갔다.표범사내는 음양마군의 뒤를 쫓았다.
노파의 세력은 곧바로 나머지 세력을 제압했다.무공실력이 노파의 세력이 훨씬 강했던 것이다.노파는 불타고 있는 음양진경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제압당한 자들은 하나하나 노파 앞으로 끌려나왔다.노파는 끌려나온 자들의 죄목을 하나하나 짚은 뒤 목을 쳤다.순식간에 노파의 세력을 제외한 나머지 세력은 전부 시체가 되었다.
숙청이 끝난 후 노파는 제자들에게 챙길수 있는 재물을 모두 챙기고 여기를 떠난다고 말했다.그러자 전부 뿔뿔히 흩어졌다.노파와 여제자는 당문호가 숨어있는 쪽을 향해 포권을 하고 허리를 숙였다.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자 곧장 몸을 돌려 재물을 챙기러 떠났다.
당문호는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는 확신이 들자 곧장 음양마군과 표범사내의 뒤를 따랐다.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계곡이 나오고 나서 흔적이 끊겼다.한참 더 흔적을 찾은 당문호는 두 사람이 계곡을 타고 움직였을 거라 생각했다.
아침에 구한 아이도 생각나서 당문호는 폭포쪽으로 향했다.한참뒤 폭포가 나왔고 당문호는 뛰어내리지 않고 에돌아 내렸다.괜히 누군가의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당문호는 예상외의 사람들과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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