遇貴人
자이언츠의 상황은 빌렌츠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뭔가 일이 계획대로 진행된다는 것은 기쁜 일이어야 하지만,빌렌츠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다만 시즌 초반에 늘 귀찮게 하던 두통이 사라져서,인체의 적응력에 다시 한번 놀라고 있는 중이다.
올스타브레이크 전에 두명의 선발투수를 유망주와 트레이드했다.롱릴리프 한명을 선발로 돌리고 마이너에서 선발들을 콜업하여 시험대에 올렸다.당장 메이저에서 통할만한 유망주는 없었지만 내년쯤이면 5선발을 맡길수 있는 카드 한장 발견했다.
어차피 후년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노릴 때 선발투수는 믿을만한 카드로 2명을 영입할 예정이다.다음시즌까지의 목표는 4,5선발로 확실한 카드 3장이상 찾아내는 것이다.하지만 메이저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유망주 중에서 3장의 선발카드를 2시즌 이내에 찾아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것이다.
그렇다고 트레이드 할 수 있는 자원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다.작년에 트레이들 할만한 자원들을 전부 유망주 카드수집에 사용했다.이제 남은 자원들은 트레이드 할려는 구단이 없거나,자이언츠에서 트레이드 불가를 선언한 선수들 뿐이다.
암담한 상황에 우울해진 빌렌츠는 환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요즘 빌렌츠의 유일한 산소호흡기는 태어난지 몇달 안 되는 손녀이다.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사고를 쳤는데,아이를 낳고 같이 키우고 있었다.결혼은 함께 살아보다가 결정하겠단다.
아들이 보내온 손녀의 동영상을 감상하여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뒤,빌렌츠는 문득 두달전에 더블에 콜업한 당문호가 생각났다.당문호에 대해 더 많이 신경 쓸려고 했는데 그후 트레이드와 선발 유망주 콜업에 정신이 빠지면서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마이너 담당 직원을 호출 한 빌렌츠는 유망주들의 전반적인 상황과 콜업해 볼만한 선발유망주에 대한 보고를 먼저 받았다.그리고 나서 당문호의 현재 성적이 어찌 되는지 물었다.
"현재 홈런 11개에 타율은 5할5푼 정도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자네가 나를 미친놈으로 볼지 모르겠지만,콜업한지 두달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11개의 홈런은 좀 적은게 아닌가요?"
"아뇨,정상으로 보입니다.저도 상황을 몰랐다면 같은 의문을 가졌을 겁니다.지난달 벤치클리어링으로 17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7월16일의 경기에서 리치몬드의 선발투수는 너클볼 투수였다.4회에 던진 공이 타자의 몸에 맞았다.투수는 타자에게 미안함을 표했고,타자도 쿨하게 받아들였다.문제는 그 다음 타석에서 또 공이 몸에 맞자 타자가 폭발했고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난 것이다.
벤클을 처음 접한 당문호는 뭘 해야할지 몰랐지만,투수를 지켜 라고 외치는 코치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기로 하고 투수의 앞을 가로막았다.상대타자는 투수를 향해 달려오다 포수에게 허리를 잡혀 포수와 함께 뒹굴고 있었다.
마이너의 벤클은 메이저보다 과격하다.마이너에서 쌓인 울분과 갈증을 벤클에서 풀어버리는 인간들이 많기 때문이다.눈이 뒤집혀서 투수를 향해 달려오는 상대 선수들을 당문호는 한명한명 때려눕혔다.본인은 손속에 사정을 두었지만 얻어맞은 상대에게는 전혀 아니었다.
그렇게 당문호가 일곱명을 눕혔을 때 벤클의 열기가 서서히 식기 시작했다.쌍방 도합 7명이나 퇴장명령을 받은 치열했던 벤클은 끝났고,이틀 뒤에 당문호는 17경기 출장정지를 받았다.
"팬들의 반응은 어때요?내 생각에는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그 경기에서 당이 홈런 2개 때렸습니다.사실 공수교대 하면 당의 타석이고 3연타석 홈런을 노릴 수 있는 기회였거든요.근데 팀원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고 다들 좋게 보고 있습니다."
"그래,더블에서 오할 때리는 열여섯짜리 루키라면,타석에서 똥을 싸지 않는 이상 뭘 해도 이쁘겠죠."
"근데 왜 아직도 콜업요청을 하지 않나요?콜업조건은 이미 달성했는데."
"너클볼 때리는 연습을 한다고 합니다.벤클로 친해진 뒤 둘이 맨날 붙어다니고 있습니다."
70마일 정도의 속도로 공이 홈플레이트 근처에 다다르자 괴이한 변화를 보였다.마치 먹이를 쫓는 뱀머리처럼 순식간에 두번이나 흔들렸다.그 공을 지켜보던 당문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저히 칠 타이밍이 보이지 않는다.실투가 아닌 이상에는 말이다.잘 제구된 변화구도 경험이 쌓이면서 좀더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는데,이 너클볼은 벌썬 한달째인데도 전혀 익숙해 지지 않는다.
지금 더블A 성적이 기대에 못 미치는 것도 너클볼 때리는 훈련을 하면서 타격폼이 미세하게 흔들린 탓이다.물론 바로잡고자 마음 먹으면 당장 바로잡을 수 있지만,당문호는 여기에 한걸음 크게 나갈 수 있는 열쇠가 감춰져 있다고 여겼다.
리치몬드에 처음 왔을 때 당문호의 요청에 마지못해 20개 정도 던져주던 너클볼 투수 조는 벤클이후 매일 60에서 80개 정도 던져준다.어차피 더블에서도 방어율이 4점대라 콜업같은건 기대하지도 않는 조였다.야구를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야구 그만두면 뭘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60씩 던져준다고 해도 실투가 많아서 연습에 도움이 되는 공은 40개 미만이다.뭔가 알듯말듯한 기분에 초조하고 미칠것 같은 당문호는 조에게서 너클볼 던지는 방법을 배워서 집에 가면 직접 던지면서 녹화했다.150개 정도 던지면 쓸만한 공 20개 정도 건져낼 수 있다.이 20개 정도의 공을 편집해서 반복으로 보면서 자신의 손에 잡혀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단서가 뭔지 고민했다.
그러고 조의 공도 녹화를 해서 잘던진 공을 편집하고 자신의 공과 혼합편집해서 분석했다.시간이 흘러서 녹화된 공이 천개 정도 됐을 때 당문호는 뭔가 발견했다.
너클볼은 회전을 최대한 죽인 공이다.최대한 죽였다는 것은 회전이 조금이나마 있다는 것이다.너클볼의 변화는 회전이 얼마인지 확인하면 대략적인 변화방향과 변화폭을 예측할 수 있다.물론 너클볼의 변화에 영향을 주는게 회전 하나뿐이 아니기 때문에 완벽한 예측은 불가능 하지만,그래도 크게 한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당문호의 사유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너클볼은 회전수가 적다.많아봐야 한바퀴반 정도.잘 던진 공은 반바퀴도 돌지 않는다.그 회전속도를 눈으로 확인하면 최대한 근접하게 공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다.그렇다면 변화구,변화구는!
정수리가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자 당문호는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몰입했다.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당문호는 아무생각도 하지 않지만,현재 당문호의 뇌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무척 많은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인간의 언어와 문자,인간이 쌓아올린 불완전한 지식에 영향받지 않은 채,무의식의 영역,신의 영역이라고도 불리는 그 영역에서 이번에 얻은 깨달음을 올곧게 녹여내고 있었다.
명상을 마치고 깨어난 당문호는 자신이 뭘 얻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수 없었다.분명 뭔가를 얻었는데 그게 뭔지 인지할 수가 없었다.당문호는 자신이 인간의 언어와 문자,및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뭔가를 얻었음을 느낌으로만 알 수 있었다.
무당의 태극혜검,소림 달마조사의 달마삼검,화산의 미풍검,곤륜의 용상검 등 무학의 대가들이 깨달음을 얻은 후 글로 남긴 무공들은,후세에 제대로 익혀낸 사람이 한명도 없다.인간이 만든 불완전한 문자로는 신의 영역을 엿본 깨달음을 온전히 전할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그후 며칠동안 당문호는 멍한 상태를 유지했다.컴퓨터의 백그라운드에서 엄청난게 돌아가면 나머지 프로세서들이 느려지는 것처럼.당문호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여긴 감독은 당문호를 경기 출전명단에서 빼버렸다.괜히 잘하고 있는 유망주가 컨디션 안 좋을 때 얻어맞고 멘탈이 무너지면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문호가 만약 스물정도 되는 유망주라면 일부러라도 올려서 멘탈을 시험해 보겠으나,당문호는 겨우 열여섯이며 차기 단장으로 유력시 되는 단장보좌의 지대한 관심을 받고 있는 루키이다.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것이다.
조와의 너클볼 타격훈련도 며칠간 빼먹은 채,몽유 상태를 유지하던 당문호는 끝내 깨어났다.무의식의 영역에서의 정리작업이 완전히 끝난 것이다.정신을 차린 당문호는 맥에게 공의 회전을 통해 변화구의 구종과 변화를 예측할 수 있지 않겠냐고 하자,맥은 그건 다들 아는 상식이라 답했다.할 수 있는 사람이 적어서 그렇지.
맥과의 대화로 당문호는 자신이 얻은 깨달음이 명상 직전에 생각했던 회전수와 관련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아무리 골을 싸매고 생각해 봐도 어떠한 깨달음인지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았다.복잡한 머리를 정리할 겸 해서 당문호는 조를 불러서 타격훈련을 시작했다.
타격훈련이 끝나자 던지는 족족 얻어맞은 조의 멘탈은 거의 만미터 심해바닥까지 가라앉았다.멘탈이 절구통에 들어간 마늘마냥 곱게 빻아진 조는,방망이를 들고 타석에 서서 당문호에게 공을 던지게 했다.
잘던진 공 몇개 빼고 나머지 실투를 모조리 쳐낸 뒤,조는 겨우 제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만미터에서 오천미터 정도 상승했다.어떻게 된거냐고 묻는 조의 물음에 당문호도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했다.뭔가 알것 같은데 알듯 말듯 모르겠다고 답했다.
당문호의 얼빠진 대답에 조는 고개를 끄덕였다.공에 힘이 붙지 않아 어쩔수 없이 너클볼을 선택했다.그렇게 너클볼을 연습하던 어느날,갑자기 너클볼을 더 잘 던지게 되었다는 것이다.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냐 물었지만 자신도 답이 궁했다는 것이다.
그후 경기에 다시 나서게 된 당문호는 불붙은 방망이를 휘둘렀다.쳤다하면 홈런 아니면 3루타,가만히 서있으면 볼넷이다.수비에서도 잡아야 할 공은 무조건 잡았다.그렇게 더블A도 초토화 하고 맥은 구단에 세번째 콜업을 요청했다.
한편 빌렌츠 단장보좌는 연이은 회의 때문에 한동안 잠잠했던 두통이 다시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스카우터들은 빌렌츠의 계획과 상관없이 자신이 데려오고 관찰해온 유망주 위주로 추천했다.올해는 선발투수 위주로 테스트 해볼려고 하는데,스카우터들의 추천에는 야수들이 더 많았다.
확장로스터 전부를 유망주로 채울 수는 없다.지구 꼴지이고 30개 구단중에서도 거꾸로 3등이지만 시즌 성적과는 상관없이 팬들이 납득할 수 있는 경기를 보여줘야 한다.다음시즌에는 나아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몇 안되는 유망주 콜업카드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하는데,의견이 일치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스카우터들이 당문호의 콜업을 반대했다.이유는 계약한지 일년도 안 된 루키를 메이저로 끌어올리면 나머지 유망주들에게 심리적인 타격이 크다는 것이다.더블A까지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때문에 어찌어찌 달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절대 안된다는 것이다.
당문호의 계약조항을 상세하게 알지 못하는 스카우터들은 당문호의 콜업이 빌렌츠의 뜻이라고 생각한다.그리고 이건 노골적으로 당문호를 데려온 스카우터 잭을 밀어주는 것이라 생각했다.당연히 서로 의견을 맞춘적은 없었지만 약속이라도 한듯이 합심해 잭을 견제했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노리는 해에는 구단 전부 직원들이 일치단결해서 우승만을 위해 노력한다.개인적인 유감이나 출세욕을 억누르고 라서라도 말이다.하지만 그렇지 않은 해에는 이처럼 구단이나 팀보다는 개인의 영달을 더 추구한다.물론 차기 단장을 노리는 빌렌츠가 다른 직원들을 겨묻었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빌렌츠는 확장로스터에 당문호를 무조건 콜업할 생각이었다.그리고 가장 홈런 확율이 높을 때마다 대타로 내보낼 예정이었다.상대 투수들을 면밀히 분석해서 당문호에게 상성이 가장 알맞는 투수에 맞춰 타석에 세우면 된다.밥그릇이 간당간당한 감독도 빌렌츠의 계획에 적극 동참할 것이다.
이런 영웅만들기로 팬들의 분노를 잠재우고 시선을 끈 뒤,선발 유망주들을 연속으로 시험무대에 올릴 것이다.그렇게 해야 탱킹의 의혹을 조금이라도 잠재우고,팬들의 비난을 잠시나마 피해갈 수 있다.단장이 되기 위해서 여론의 호의적인 시선이 필요한 빌렌츠의 계획에서 당문호는 가장 중요한 저울추이다.여론이 한쪽으로 확 기울지 않게끔 하는.
이러한 오묘한 시기에 직원으로부터 당문호의 콜업요청을 받은 빌렌츠는 머리가 아파왔다.계약때문에 무조건 트리플로 올려야 한다.하지만 그렇게 되면 스카우터와 자신을 견제하는 세력들이 불같이 일어날 것이다.계약사항을 공개해도 잘못된 계약을 했다고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어차피 계약을 잘했어도 조그마한 꼬투리만 있으면 물고 늘어질테니.
올리는 건 기정사실인데,이걸로 어떻게 유리한 국면을 펼쳐나갈 지 고민하던 빌렌츠는 문득 며칠전에 만났던 동양인 점쟁이가 생각났다.식당에서 홀로 저녁식사를 하고 나오면서 길가에서 점을 봐주는 점쟁이를 봤다.
타로나 점 같은걸 전혀 믿지 않는 지식인 빌렌츠이지만,비용은 본인이 원하는 대로 지불하라는 문구를 보고 점쟁에 앞에 서게 되었다.재미삼아 해보고 5달러정도 지불할 생각이었는데 점쟁이의 말이 빌렌츠의 마음을 바꾸었다.
"큰일을 도모하는데 주변상황이 여의치 않군요.상황이 아주 나쁜건 아닌데 본인은 상황에 비해 많은 걱정을 안고 있군요."
"운세가 평범한 걸 보니 결과는 장담하기 힘들군요.잘될수도 잘 안될수도 있습니다."
"조만간 귀인을 만납니다.귀인의 도움을 얻으면 원하는 바를 얻게 될 겁니다."
"귀인이 누군지는 저야 모르죠.그건 당신만 알 수 있습니다."
귀인은 빌렌츠의 목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란다.귀인의 도움을 얻으면 소원을 이룬단다.빌렌츠는 원래 계획과 달리 점쟁이에게 50달러를 건넸다.
빌렌츠는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확장로스터의 첫번째 확정선수로 당문호의 이름을 적었다.그리고 홍보팀에 대대적인 홍보를 하라고 명했다.철회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결과가 좋지 못하면 올시즌을 끝으로 책임을 통감하고 사임을 한다고 했다.
"부디 당신이 나의 귀인이기를 바랍니다.미스터 당."
월드시리즈 우승은 장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그렇다면 또 다른 성과를 보여야 한다.유망주 육성이라든지.당문호는 월드시리지 우승에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또 하나의 에이스 카드이다.
그렇게 메이저 콜업소식이 당문호의 귀에 들어오게 되었다.당문호는 자신이 미국에 와서 참 많은 귀인을 만났다고 생각했다.맥,조,빌렌츠 전부 당문호의 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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