緣未盡
연이 다하지 않았다.
감독의 입을 과격한 방식으로 다물게 한 당문호는 바로 감독실을 떠났다.그리고 당문호에게 얻어맞은 것이 쪽팔린 감독도 입을 꾹 다물려고 했다.하지만 그 장면을 목격한 누군가에 의해 소문이 쫙 퍼지는 바람에 학교차원에서 조사가 나왔다.
당문호는 숨김이나 보탬이 없이 경과를 그대로 서술했고,감독은 당문호가 찾아와서 시비를 걸었다고만 말했다.경기출전 관련한 부분은 감독 고유의 권한이라 처벌할 거리가 없고,감독을 폭행한 죄로 당문호만 한달 정학처분에 처해졌다.원래 퇴학까지 갈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강원장의 노력으로 정학처분에 그치게 되었다.물론 야구부에서 탈퇴하게 된 것은 더 말할것도 없다.
당문호는 강현식원장으로부터 감독과의 악연에 대해 전해들을 수 있었다.검사출신의 강현식은 감독의 아버지를 횡령사건으로 잡아넣은 적이 있다.하지만 초심에 불복하여 항소를 하였는데,일부 죄목이 증거불충분으로 감형을 받게 되었다.강현식 입장에서는 할 일을 한 것이지만.그 당시 어린 아이였던 감독은 강현식이 죄없는 아버지를 괴롭히려고 없는 죄를 뒤집어 씌운 것으로 생각했다.
강현식 원장은 자신에 대한 미움으로 당문호에게 못되게 군 것 같다고 했지만 당문호의 생각은 달랐다.당문호 먼저 광명고를 다닌 보육원 출신들이 적지 않고 그중 야구부 활동을 한 사람도 없지 않았다.하지만 누구에게도 감독이 일부러 못되게 군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남아도는 시간에 당문호는 보육원 대청소도 하고 담장 손질도 하고 가끔 산에 가서 나무도 해왔다.말라죽은 나무로 도끼로 쓰러뜨린 뒤,밧줄로 묶어서 끌고왔다.그다음 톱으로 적당한 길이로 썰어서 한켠에 가지런히 쌓았다.
야구부에서 강제 탈퇴당한 당문호는 축구부에 가입하고 싶었지만 야구부 감독과 축구부 감독이 친하다는 소리에 단념하고 말았다.중학교때부터 사고무친인 자신이 공부로 성공하기는 글러먹었다는 것을 깨닫고 운동으로 출세할 생각을 했는데,이제 운동도 못하게 됐으니 뭔가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당문호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답없는 고민을 거듭하면서 시간을 보낼 때,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가운 손님이 왔다.맥과 제인키였다.
강한성으로부터 당문호의 사건을 전해들은 제인키는 맥에게 전화했고,성격이 급하고 생각이 깊지 못한 맥은,당장 한국으로 향하는 티켓을 구매했다.절망에 빠져있는 당문호를 어떻게든 구해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티켓을 구매하고 나니,혼자서 한국에 가기 걱정이 된 맥은,제인키에게 도움을 청했고,제인키도 함께 한국에 가기로 했다.물론 경비는 전부 맥이 책임지기로 했다.
그렇게 한국에 도착한 둘은,강한성에게 연락해서 투구폼을 봐주는 조건으로 강한성네 집에 머물기로 했다.맥도 타자출신이라 투구폼을 교정해 주지는 못하지만 차이점을 찾는데는 제인키 못지 않았다.
강한성네 별장 별채에 짐을 풀자마자 둘은 강한성을 닦달해서 보육원으로 향했다.작년에 봤던 당문호의 수준이라면 2년 정도 더 훈련하면 구단과 계약을 타진해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연락없이 찾아온 두 불청객을 당문호는 반갑게 맞이했다.다들 학교에 가고 혼자 보육원에 남아서 심심했던 것이다.수련도 집중력을 끌어올린 상태에서 해야 하는데,집중력이 마르지 않는 샘도 아니고,공부 할려니 교과서는 이미 달달 외울 정도였다.
사건의 전황을 전해들은 맥은 당문호를 남자답다고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했다.자신이었다면 뼈 한두개 분질러 놨을 거라면 씩씩거렸다.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려는 감독의 행태에 크게 화가 난 상태였다.
같이 감독을 욕하면서 우정을 다진 의리의 미국남자 맥은,곧이어 당문호에게 미국으로 가서 야구를 하자고 꼬드겼다.자신이 책임지고 훈련일정을 다 짤테니,당문호는 일정을 소화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보통 협상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이렇게 대뜸 제안하지 않는다.천천히 친분을 쌓고 상대방의 성격을 파악한 뒤,상대방이 좋아할 만한 방식으로 제안을 해온다.거절 당하더라도 다시 시도할 수 있게 여지도 두면서 말이다.
하지만 정의감이 넘치고 단순한 맥은,당문호의 야구재능을 썩혀서는 안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으며,이런 재능을 가진 아이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데 대한 분노가 치밀어 있는 상태였다.그래서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당문호에게 제안을 건넸다.
당문에서 내총관을 맡으면서 여러가지 유형의 사람을 만나본 당문호에게 맥같은 사람은 처음 보는 유형이었다.당문의 내총관과 대면할 정도면 대부분 강호에서 닳고닳은 자거나 권문세가에서 정쟁에 단련된 자들이라,결코 속내를 비치는 일이 없었다.자신의 속내는 감추면서 상대를 자극해 상대의 속내를 알아내려 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맥의 이런 순수함과 열정이 당문호에게 나쁘지 않게 다가왔다.하지만 당문호는 맥처럼 단순한 사람이 아니다.자신이 미국에 가면 어떻게 야구를 하고 어떻게 훈련을 하고 어떻게 계약을 따낼지.그리고 그 비용은 얼마나 되고,이 비용을 어떻게 해결할지.현실적인 고민의 해결이 우선이었다.
의리남 맥은 당문호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그냥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그만두는,야구 관련된거 빼고는 머리 쓰기 싫어하는 맥은,뭘 하기전에 계획을 세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하자고 정한 뒤,몸으로 부딪히며 해결하는 타입이었다.
야구도 마이너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노력하여 메이저까지 올라갔고,에이전시 설립도 평생 인연이 있을거라 생각하지 못한 변호사 자격증까지 따면서 해냈다.이제껏 인생을 돌이켜 보면 맥은 항상 하고 싶었던 일을 했고,어느 정도까지는 성과를 냈다.야구는 메이저리그까지 갔고,에이전트가 하고 싶으니 자격증을 따고 에이전시를 설립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메이저에서도 2년만 버텼으며,그것도 팀사정이 아니었다면 콜업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에이전트도 2년 넘는 시간동안 단 한명의 선수도 계약하지 못했다.작년에 한국과 일본에서 몇몇 선수들을 만났지만 사기꾼 취급만 당했다.
당문호는 이 충동적인 남자를 믿고 멀고먼 미국으로 훌쩍 떠날수가 없었다.
맥이 대화를 너무 빠르게 끌고간 바람에 갑자기 모두가 할말이 없어졌다.그래서 당문호는 오랜만에 전영림씨한테 인사도 드릴겸,두 외국손님을 대접할 겸 해서 계곡으로 향했다.거기에서 두 미국인에게는 생경한 방식으로 물고기를 잡은 뒤,별장에 가서 매운탕을 끓여먹었다.
제인키는 매운탕이 입맛에 안 맞는 눈치지만,멕시코에서도 음식투정 안 하고 배터지게 먹었던 맥은,매운탕을 매우 반겨했다.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숟갈을 입에 넣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의도치 않게 저녁을 일찍 먹어버린 넷은 남는 시간에 야구나 하기로 했다.제인키와 맥은 함께 강한성의 투구폼을 보면서 차이점을 찾아내고 어떻게 보완할지에 대한 훈련일정을 짰다.강한성의 투구폼을 한참 봐준 뒤,당문호는 제인키에게 재대결을 요청했다.
맥이 포수를 자청하고,강한성이 심판을 봤다.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두사람이 필요가 없었다.실력이 일취월장한 당문호는 은퇴한 전 메이저리거의 공을 하나도 빠짐없이 멀리 날려버렸고,강한성은 야구공 몇개를 잃어버렸다.
당문호의 현실적인 질문에 열정이 식어버렸던 맥의 열정이 또다시 불타올랐다.수천년을 억눌려오다가 터진 활화산처럼 활활 타올랐다.지금 당장 메이저리그 구단과 계약이 가능하다고 침을 튀기던 맥은,당문호가 현재 열다섯이라는 말에 또 시무룩해졌다.
당장 미국에 데려가면 반년정도 데리고 있어야 하는데,그 비용이 얼마나 될지 계산이 안 되는 것이었다.많다는 의미가 아니라,순수한 의미에서 계산이 안 되는 것이다.무작정 가자고 하면 당문호가 또 비용이 얼마나 드냐고 물어볼게 뻔한데 대답이 궁한 것이었다.
당문호는 처참하게 얻어맞고 얼이 빠져버린 제이킨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고 보육원으로 돌아갔다.미국에 갈지 말지는 정하지 않았지만,선택지가 하나 더 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당문호의 기분은 한결 개운해 졌다.
꿈을 잃지 말라는 말은,희망을 잃지 말라는 말이다.당장 아무것도 못하더라도 희망이 있으면 인간은 힘을 낸다.가장 절망적인 상황은,내가 뭘해도 안되고,무엇도 할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하였을 때다.사람이 인생을 삶에 있어서 한번에 하나의 선택밖에 못하지만,선택지가 많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인간은 행복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당문호에게 맥이 이틀뒤에 찾아와서 의기양양하게 종이 몇장을 내밀었다.거기에는 당문호가 미국에 갈 경우의 체류비용,훈련비용 등이 적혀 있었고,만 16세가 된 뒤에 계약타진이 가능한 팀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떤 팀들이 주전자리를 쉽게 차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분석도 있었는데 맥은 당문호에게 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건 필요없어.어차피 실력만 있으면 어느 팀이든 상관 없으니까."
그 어떠한 말보다도 맥의 이 한마디가 당문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강호에서 그랬다.힘있는 놈이 법이다.정의요 명분이요는 그저 겉치레였다.당문이 잘못을 해서 장사를 떠나 양양에 자리 잡았는가?양양에서 당문에게 밀린 가문과 세력들이 무슨 잘못을 해서 당문에게 머리 숙였는가.
강호는 그랬다.힘있는 자가 법이고 힘있는 자가 되려고 뼈를 깎는 수련을 한다.목숨이 위험한 수련을 하는 자들이 부지기수고 위험을 최소화한 수련법을 보유한 문파와 세가들에 사람이 몰리는 것이다.
하찮은 정의는 공허할 때가 있고,허울 좋은 명분은 먹히지 않을때가 있다.하지만 힘은 언제나 옳았다.절대적이라 할 만큼.
충동적이고 생각이 깊지 못한 맥은,자신의 한마디가 당문호의 마음속 깊은곳에서 공명을 일으킨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미국행의 긍정적인 부분들에 대해 설토하는 중이었다.광명정대한 사나이인 맥은,한국에 남았을 때 어떻게 안 좋다는 것을 강조하는 비열한 짓 대신,우직하게 미국이 어떻게 좋은지만 얘기했다.
이미 마음이 흔들린 당문호에게 꾸밈없이 거칠게 다가오는 맥이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강한성이 없어서 대화가 제한적이지만 마음은 예전보다 훨씬 통하는 느낌이었다.고민은 많이 해야 하지만 결단은 과감하게 내려야 한다.당문호는 맥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결정을 내리자 생각지도 못한 많은 문제들이 튀어나왔다.미국에는 어떻게 갈 것인지,비자는 어떻게 낼 것인지.입양으로 가는게 나을 지 아니면 여행비자로 가서 계약을 따낸 뒤 구단의 도움으로 비자문제를 해결할 지.
머리가 아파온 맥은 미국으로 전화하여 비용문제로 한번 도움을 받았던 변호사 친구에게 다시 한번 부탁을 했다.만 15세의 한국소년을 가장 빠르게 미국으로 데려가는 방법을.
미국에 있는 맥의 변호사 친구의 도움으로 빠르게 계획이 정리되었다.6개월짜리 여행비자로 미국에 간 뒤,최대한 빠르게 구단과 계약을 타진하고 구단의 도움으로 비자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만약 계약이 안될 경우,체류연장신청을 하고,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한국에 돌아왔다가 다시 여행비자로 미국에 들어간다.
대충 앞일을 정한 당문호는 맥과 정식으로 계약을 맺었다.미성년자라 보호자가 계약에 사인해야 해서,한국에 있는 동안에 미리 계약을 완성했다.당문호가 성인이 되면 다시 계약을 갱신하기로 합의를 봤다.
계약이 완성된 후,맥은 더욱 열심히 일했다.매일 밤마다 미국에 연락해서 지인들에게 이것저것 부탁을 했다.당문호는 강원장의 도움으로 여권이나 기타 문제를 손쉽게 해결했다.검사출신의 강원장은 이 지역에서 가장 출세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정학처분이 끝날때 즈음 해서 당문호는 강원장과 함께 학교로 가서 자퇴수속을 밟았다.수속이 끝나고 강원장은 먼저 돌아가고 당문호는 강한성을 비롯한 몇 안되는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학교를 떠날때 즈음 해서 교장선생이 찾아와서 당문호에게 봉투를 건넸다.미국 가서 열심히 살라고 격려를 해주며 돈봉투를 건넨 것이다.알고보니 학교에 메이저리그 스카우터가 직접 와서 당문호를 스카웃해 간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는 것이다.
검사출신의 강원장이 이 지역 최고로 출세한 사람이었다.당문호가 만약 메이저리거가 된다면 그 영향력이 강원장보다 훨씬 강할게 뻔했다.미리미리 관리해 두려는 교장의 속셈이 보였지만,이왕 받은 돈 유용하게 잘 쓰겠다고 마음 먹었다.
어느덧 한국을 떠나는 날이 되었다.교장이 준 돈은 용식이에게 맡겼다.자신이 떠난 후에 원장 할아버지한테 전해달라고 말이다.미리 작별인사를 해둔 당문호는 새벽 일찌기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서울에 도착한 뒤 공항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중간에 두번이나 환승하는 비행기였지만,당문호는 실수없이 해냈다.짧은 시간동안 영어를 집중적으로 배운것이 약간은 도움이 되었다.
어느덧 LA에 도착한 당문호는 공항에 마중나온 맥과 함께 맥의 승용차를 이용해 또 몇시간 이동했다.내공이 피로를 어느 정도 회복해 주지 않았으면 당문호는 아마 몇번이나 탈진했을 지도 몰랐다.
그렇게 어렵게 도착한 맥의 집은 당문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너무나도 예쁜 집이었다.관리가 안 된 마당의 풀들은 들쑥날쑥 했지만 집은 당문호의 마음에 쏙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튿날 맥은 당문호를 데리고 컨디션 회복훈련을 시작했다.시차에 적응하고 몸이 풀렸다 판단되자 근처의 야구연습장에 가서 타격훈련을 진행했다.그렇게 당문호는 미국생활에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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