破常律
테일러는 자신이 역사에 기록될 수도 있는 경기에 선발로 나가게 되었다는 사실에 몹시 기뻐했다.시합 시작전 외야수 세명을 불러놓고 오늘 퍼펙트 게임을 할려는데 협조 좀 해달라고 노골적으로 압박을 가했다.
팀의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볼려는 이런 노력은 약간의 성과를 얻었다.더그아웃의 분위기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다.하지만 오늘 다저스도 평범한 각오로 경기에 임한게 아니었다.
더그아웃의 분위기가 다시 경직된 것은 1회초였다.테일러는 선두타자를 안타로 출루시켰다.세이프인지 아웃인지 애매했지만 첫 타자에게 비디오 판독기회를 허비할 수는 없었다.테일러도 개의치 않고 연속 두 타자를 범타로 돌려세웠다.그 과정에 1루 주자는 2루로 진출했다.
다저스의 4번 타자는 작년부터 다저스 유니폼을 입게된 로이였다.테일러의 실투를 놓치지 않고 투런홈런을 때려낸 로이의 방망이는 타자의 손을 떠나 멋진 회전과 아름다운 포물선을 보였다.배트플립을 한 것이다.
곧바로 자이언츠 홈팬들의 욕설이 경기장에 쏟아졌다.다저스의 원정팬들도 일어서서 환호하는 소수의 팬들을 빼고는 대다수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다저스 팬들이 생각하는 품위있는 모습은 저런 모습이 아니었다.
홈런 때문인지 배트플립 때문인지 테일러는 안타와 볼넷으로 두명의 타자를 더 출루시켰다.하지만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7번타자를 안정적으로 잡아냈다.
1회말 람이 안타로 출루했으나 미니가 플라이로 아웃되었고 홈런을 노리고 타석에 들어선 토머스와 보나비치는 똑같이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1회초가 끝난 뒤로부터 테일러는 평소와 다르게 묵묵히 앉아서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배트플립으로 가열되었던 분위기는 테일러의 침묵으로 차분히 식었다.
2회초 연속 두 타자를 처리한 후,테일러는 1번타자에게 또 한번의 안타를 맞았다.발이 빠른 타자는 땅볼로 출루했다.테일러는 2번타자를 잡아내고 이닝을 종료했다.
2회말 마틴이 번트로 출루했다.어떻게든 출루해서 득점을 하고야 말겠다는 제스처였다.라이언도 번트를 시도했는데 아쉽게도 아웃되었다.1사 2루 상황에 타석에 선 당문호는 볼넷으로 출루했다.
비에리는 진루타라도 칠려고 노력했지만 아쉽게 아웃되었다.2사 1,2루에 타석에 선 테일러는 헛스윙을 세번 하고 돌아섰다.
3회초 다저스 선두타자를 잡아낸 뒤,로이가 타석에 들어섰다.테일러는 초구와 2구를 바깥쪽으로 던져 스트라이크를 잡아냈다.빈볼을 예상하고 타석에 들어섰던 로이는 두개의 스트라이크를 지켜보기만 했다.
테일러는 아는 팬들사이에서는 괴짜로 소문이 났다.다만 성적이 그다지 좋지 못한 관계로 많은 팬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하지만 라이벌 관계인 다저스의 선수인 로이는 테일러에 대한 소문들을 들어왔다.테일러가 연속 2개의 공을 빈볼로 던지지 않았지만 경각심을 늦추지 않았다.일부러 자신을 안심시킨 뒤 빈볼을 던지려는 수자이라고 생각했다.
테일러는 3구도 똑같은 코스로 던져 로이를 루킹삼진으로 잡아냈다.똑같은 코스로 지나가는 공을 세번 지켜만 보고 아웃된 로이는 테일러에게 농락당했다는 생각에 씩씩거리면서 방망이를 분질러버렸다.타석에 선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멍청하게 보였는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화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홈팬들도 테일러의 돌발행동에 어안이 벙벙했다.일부 팬들은 테일러에게 겁쟁이가 된 것이냐고 비난도 했다.로이의 배트플립으로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요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더그아웃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테일러는 여전히 말없이 3회말 팀의 공격을 지켜보았다.람은 상대투수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9구만에 볼넷을 얻어냈다.미니는 곧바로 희생번트로 람을 2루로 보냈고 토머스가 희생타를 쳐서 1타점을 올렸다.보나비치가 안타로 출루했지만 마틴이 아웃 당하면서 1점으로 이닝이 끝났다.
4회초 다저스 타자들은 약간 산만한 느낌이었다.테일러의 알수 없는 행동에 다들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았다.테일러는 3타자 연속 범타로 처리한 뒤,무뚝뚝한 얼굴로 더그아웃으로 발길을 옮겼다.
4회말 라이언이 아웃된 후 당문호가 타석에 섰다.당문호는 테일러와 대화를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테일러가 원하는게 뭔지 알것 같았다.투수의 초구,스트라이크존보다 확실히 낮은 볼로 던진 공을 걷어올린 당문호는,방망이를 멋지게 던졌다.
베이스를 돌면서 당문호는 내가 로이보다 덜 멋있게 던졌나 라는 고민을 했다.시간 날 때 방망이 던지는 것도 연습해 봐야겠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홈을 밟은 당문호는 동료들의 열렬한 축하를 받았다.테일러는 빈볼이 아니라 동료타자들이 똑같은 배트플립으로 돌려주길 원했던 것이다.
당문호의 동점홈런과 배트플립은 순식간에 경기장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홈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열광적으로 소리를 질렀고,윗도리를 벗어 흔들면서 비명을 지르는 팬들도 있었다.전부 남자였다.
6회초에 다저스의 3번타자가 홈런을 친 뒤 배트플립을 했고 6회말 투런 홈런을 때린 당문호가 바로 배트플립으로 갚아줬다.
7회초 페드로프가 마운드를 이어받아 다저스의 타자들을 요리했다.7회말 보나비치가 솔로홈런을 때린 뒤 방망이를 멋지게 던졌다.학원에 다니면서 배트플립을 전문적으로 배운게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멋진 궤적이었다.
8회초에 마운드에 오른 에르난데스는 1실점으로 이닝을 마무리했다.8회말 타석에 선 당문호는 스트라이크존을 확연히 벗어나는 볼을 쓰리런홈런으로 때린 뒤,보나비치와 비슷한 궤적으로 배트를 던졌다.삼연타석 홈런을 때린 당문호는 홈을 밟은 뒤 이례적으로 주먹을 쥐고 소리를 질렀다.
9회초에 마무리 벨이 마운드에 올랐다.세이브 상황이 아니지만 절대로 뒤집히지 않겠다는 감독의 의지의 표현이었다.벨은 태어나서 가장 큰 홈팬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마운드에 올랐고 오직 직구로만 3명의 타자를 아웃시켰다.
주심이 마지막 아웃을 선언하는 순간 경기장이 들끓었다.다저스의 선수들과 원정팬들은 누가 더 빨리 경기장을 떠나나 경쟁을 했다.구단에서는 미리 제작한 야구공을 선수들에게 나눠줬다.야구공에는 작은 글씨로 '메이저 신기록','개막 14연승','다저스 전에서'라고 적혀 있었다.
선수들이 사인을 하는 시간동안,카메라에 잡혀 대형화면에 비친 관객 중,최고의 세레모니를 보인 관중에게 모든 선수들의 사인이 들어간 유니폼 한벌을 증정하는 이벤트를 열었다.
우승은 3명의 청년이었는데 무반주로 셔플댄스를 방정맞게 춰댔다.옷이 한벌 뿐이라 세명이 각각 따로 춤을 추게 한뒤,소음측정기에서 관객들의 데시벨이 가장 높게 나온 사람을 우승자로 선정했다.
홈 이벤트 때문에 인터뷰가 늦어졌지만 볼거리가 많아 중계측은 불만이 없었다.수훈선수로 당문호가 뽑혔다.의례적인 질문과 답변이 오갔고 리포터는 당문호의 배트플립에 대해 테일러와 사전에 교류가 있었는지 물었다.
"테일러는 경기내내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다.아마 다들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요."
"제가 아는 테일러는 야구를 사랑하고 자신이 자이언츠 투수라는데 아주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선수입니다.그는 자신의 고향과 고향팀을 아주 사랑합니다."
"3회초에 테일러가 빈볼을 던지지 않았을 때 저는 테일러가 타자들을 믿고 빈볼 대신 아웃카운트 하나 잡는 것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습니다.팀의 승리를 위하여."
인터뷰를 마친 당문호는 빠르게 집으로 돌아갔다.오늘 무리를 너무 많이 했다.내일 하루 휴식이라 다행이다.저녁을 먹고 잠시 휴식을 가진 뒤 배트를 들고 마당에 나와 스윙훈련을 했다.평소보다 더 집중해서 어긋난 동작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훈련했다.
우연히 지나가던 자이언츠 팬 둘이 마당에서 불을 밝혀놓고 스윙연습을 하는 당문호의 모습을 촬영해서 인터넷에 올렸다.처음에는 동영상 조작이나 예전에 찍어둔 영상 아니냐며 의심하는 사람이 많았다.하지만 누군가 생방송을 켜고 당문호의 집에 찾아가 직접 라이브로 보여주자 다들 믿을 수밖에 없었다.
철장으로 되어 안이 들여다보이는 곳에 십여명의 팬들이 생방송을 켜놓고 조용히 촬영하고 있었다.BJ들이 아무런 대사도 하지 않았지만 방송접속자수는 멈출 줄 모르고 늘었다.졸지에 십만이 넘는 사람들이 라이브로 당문호의 스윙훈련을 지켜보게 되었다.
인터넷 강국 대한민국의 누리꾼들도 자연히 이 사실을 지나치지 않았다.야구게시판뿐만 아니라 수많은 게시판과 까페,블로그에 당문호의 연습영상이 올라왔다.
'사이클링 홈런 실패에 자책하는 당문호'
'홈런 세개밖에 못쳐서 실망한 당문호'
'당문호 - 내 타격은 아직 부족해,홈런이,홈런이 고프다'
- 휴지 좀,나 지금 눈물 난다
- 난 저 형이 항상 존경스럽다.우리 아들도 저 형처럼 컸으면 한다
- 우리 문호 홈런 세개밖에 못 쳐서 화난거야?
- 왜 저렇게 멋진 스윙을 하고 고개를 젓는거야,도대체 뭐가 문젠데?
- 인간문화재로 선정해야 한다
- 드립치고 싶지 않다.난 지금 경건하다
- 엄마가 나보고 왜 우냐고 하다가 내 설명 듣고 날 부둥켜안고 울다가 방금 나가셨다
- 나 하루에 알바 세개 뛰는데,내가 참 노력 안 하고 사는것 같이 느껴진다
- 쟤 지금 미국나이로 18살이야,아직은 응석 부려도 되는 나이라고
- 부모가 준 돈으로 대학교 다니면서 맨날 술 처먹고 노는 것들은 반성해야 한다
- 올해 수능인데 바로 컴퓨터 끄고 공부하러 갑니다
한편 스윙연습을 끝낸 당문호는 밖에 서있는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집중한 나머지 사람들이 와 있는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자이언츠 팬이라고 밝힌 사람들에게 당문호는 음료수와 간단한 음식을 꺼내다 주었다.인터뷰 요청은 정중하게 거절했다.취침시간이 다 되었다고 작별인사를 한 당문호는 씻고 눕자마자 잠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내공수련을 하고 아침을 먹은 후,당문호는 바로 구단으로 출발했다.연습실에서 전날 저녁과는 달리 느린 스윙으로 연습을 했다.스윙연습이 끝난 뒤 공도 몇개 던져보고 나서 집으로 돌아갔다.오후에는 휴식을 취한 뒤,저녁에 구단의 연습실에 가서 스윙연습을 2시간 했다.아무래도 거울이 있는 구단 연습실이 더 좋았다.
혹시 오늘 저녁에도 앞마당에 나와 훈련하기를 기다리던 수십명의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당문호는 곧장 집으로 들어갔다.곧 순찰차를 타고 경찰이 와서 사람들을 소개(疎開)시켰다.떠나는 사람들한테서 당문호가 취침하러 들어갔다는 말을 들은 경찰은 오늘은 여기에 다시 올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개막 14연승의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세운 뒤,빌렌츠는 정식으로 단장에 임명되었다.2년여간 빌렌츠는 트레이드나 유망주 육성에서 훌륭한 결과를 보여주었다.팀도 사이클링 홈런과 개막 연승 신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특히나 당문호를 계약하고 과감히 콜업해서 메이저리그 무대에 세운 점에서 안목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정기적으로 진행하는 팀의 심리상담에서 당문호는 팀에 대한 충성도와 애정이 상당히 높고 깊은 것으로 나온다.여기에 빌렌츠의 공이 없지는 않다.
이번 시즌 즉시전력감들을 트레이드 해오는 과정에서도 팜의 유망주 구성을 최대한 유지했다.보통 트레이드를 하다 보면 팜에서 투수쪽이나 타자쪽이 거덜나는 경우가 있는데 빌렌츠는 주의를 기울여 팜의 건전성도 어느정도 유지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원칙주의자인 빌렌츠는 상당히 안정적인 운영을 해나가지만 가끔은 독선적이고 고집이 강한 면이 있다.본인이 옳다고 확신하면 측근들마저 반대해도 혼자 힘으로 밀어붙인다.하지만 그 점이 오히려 구단주에게는 천재성으로 보였다.
단장으로 취임한 빌렌츠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당문호의 에이전트에게 전화하는 일이었다.팀에서 이번 시즌 끝난 뒤 당문호와 장기계약을 체결하려 하는데 미리 계약조항들을 상의해 두자는 것이었다.
금액이나 이런 부분들은 시즌이 끝난 뒤 정해도 늦지 않다.하지만 금액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부분들은 미리미리 협상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당문호는 오랜만에 강한성과 통화를 했다.그간 14연승을 하면서 경기외의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난 뒤,강한성은 당문호에게 소포를 보낼테니 거기 물건들에 사인을 해 줄수 없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집을 자주 비우는 관계로 소포를 맥에게 보내라고 했다.구단으로 보내도 되는데,구단은 받는 물건이 하도 많아 가끔 전달이 늦어지는 경우도 있다.강한성은 쑥스러운 어투로 자신한테도 자이언츠 유니폼에 사인을 해서 보내줄 수 없냐고 물었다.그걸 보고 더 열심히 야구를 하고 싶다고 했다.
흔쾌히 승낙한 당문호는 바로 유니폼을 찾아서 사인을 했다.
'한성이 형에게'
'나 항상 여기서 기다릴테니 오래 기다리게 하지마'
'동생 장군이가'
내친김에 강찬성에게도 하나 해줬다.
'동생 찬성에게'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려무나'
'형 문호가'
두개의 유니폼을 잘 개여서 비닐주머니에 넣었다.구단 직원에게 부탁하면 맥에게 보내줄 것이다.맥에게 전화를 해서 사인 된 유니폼을 받으면 강한성에게 보내주고,강한성이 부쳐온 소포를 자신한테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그러자 맥은 자신과 산체스에게도 사인 하나씩 부탁한다고 했다.
집에 유니폼이 더 이상 없는 관계로 모자에 사인했다.맥에게는 고맙다고,계속 형제처럼 지내자고 적었고,산체스에게는 메이저리그에서 너를 승리투수로 만들어 주는 날을 기대한다고 적었다.
타격밸런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당문호는 걱정하지 않았다.자신이 아니더라도 다른 동료들이 점수를 내줄 것이다.테일러는 타자들을 믿고 빈볼을 던지지 않았다.메이저리그의 오래된 불문율을 깨트렸다.
동료들을 믿는다.동료들이 믿음에 부응하지 못해도 믿음을 계속 간직한다.당문호는 테일러 덕분에 또 많은 것을 깨우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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