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회차) 바티칸에서 온 사람
몸을 숙인 우마리가 침대 밑에서.
'나를 걱정한다면 이럴 수가 없어. 수상하고 괴기스러워. 이스타는 왜 이런 일을 내게 말하지 않고 철저하게 숨기려 하는 걸까.'
남은 사탕과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그는 나와 손끝, 털끝 하나가 닿을까 봐 질색하고 도망치기 바쁜 사람이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모르겠어.”
혜리는 달 모양 테이블에 손에 쥔 단것들을 내려놓으며.
“우마리 네 말을 들으니까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어. 회장님은 검은 고양이를 엄청 소중하게 다뤘어. 해가 지면 나를 살피면서 아기 다르듯 섬세하게 대해줬어. 그건 내가 아니라 내가 품고 무엇에게 정성을 들이는 것이었다고.”
“미스 한도 그랬겠네.”
“아니 조금 달랐어, 뭐랄까? 그다음 단계 같은 뭔가 키우는 듯이 미스 한에게는 먹거리와 온갖 선물을 챙겨줬어. 내가 아기였다면 아이처럼 내 짐작으론 회장님은 고양이에 대해 분명 뭔가 알고 있어.”
우마리가 머리를 잡고 두통을 호소한다.
“혜리야, 잠시만 머리가 너무 아파.”
“미안, 그런데 회장님이 그렇게 감추려는 비밀을 어쩌면 들추지 않는 게 너한테는 좋지 않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다 너를 위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 만약 너라면 알 수 없는 일들이 생기고 있는데 모른 척할 수 있니. 주변에 위험한 일들이 생기고 있어 그런데 나보고 모르는 척 가만히 있으래. 그럼 그 당사자는 얼마나 답답하고 두려울지···"
심각한 표정의 혜리.
"네 말이 맞아. 내가 왜 네 신혼 방에 있는지에 대해, 리타 가문을 나가기 전 말해줘야지. 그래야, 오해도 풀리고 네가 덜 힘들겠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침대 기둥을 잡고 서 있는 우마리.
“조 여사님은 알아.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에 대해.”
“살다 살다 내가 처음으로 고모한테 칭찬받을 줄이야”
“그래! 조 여사님이 그렇게 좋아하시면 재력이 좋다는 건데.”
혜리가 엄지와 검지를 비빈다.
“너도 아는 사람이야.”
“누구?”
“타스 아레, 한국 네임 지황.”
화들짝 놀라면서 우마리가 혜리를 끌어안는다.
"세상에, 지황이라고! 잠깐 그럼, 칵테일 바가 타스가 머물던 호텔 지하 거기구나.”
“너도 거기 아는구나"
우마리는 도망치 듯 나와 이후 이스타를 만난 장면을 아련하게 회상한다.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하고 재미있어. 혜리와 타스가 사랑하는 사이라니.'
혜리는 창 밖 넘어 희미한 어느 곳을 바라보며 멍한 눈빛으로.
"지황은 이미 마시고 있었더라고 난 술은 별로인데 칵테일이 그날은 왜 그렇게 땡기던지 술술 넘어가더라고. 그러다 내가 취해서 그의 방에 잠시 올라가 쉬다가 불타올랐고 그렇게 시작됐지.”
어깨를 잡아주며 우마리가 혜리와 눈을 맞춘다.
“축하해, 진심이야. 지금의 지황과 넌 정말 잘 어울려.”
“그래? 네가 보기에 잘 어울려.”
“남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네가 첫눈에 반한 거 보면 몰라. 둘이 제대로 짝을 알아본 거지."
혜리가 그녀의 말을 듣고 발을 콩콩거리며 좋아한다.
“처음 만난 날 술 취한 지황이 내게 그랬어. 우마리를 좋아한다고 그런데 이상하게 상관하지 않았어. 그냥 그날은 마음 가는 대로 움직였던 것 같아.”
“여~어, 너 다시 보게 된다.”
“그런 감정이 처음이라 나도 놀랐다니까. 그렇게 찐한 관계를 갖고 그가 잠들고 빠져나와 24시간 내내 그 사람만 떠 올랐어. 사춘기에 앓는 열병처럼 몸이 식지 않더라. 지황은 어떻게 수소문했는지 학교 앞에 와있었고.”
“둘이 그렇게 좋았던 거야.”
“솔직히 염장 지르는 것 같아 미안한데, 함께 있으면 밥 먹는 시간까지 아깝더라.”
“뭐야. 너 여태 내숭이었어.”
우우웅 우우웅
스피커 폰으로 여는 혜리.
(혜리) : 여보세요.”
(지황) : 내 사랑, 연락도 없고 나, 당신 생각에 아무것도 못하고 있소.
(혜리) : 미안해요. 정오 지나서 출발···
(지황) : 안 돼! 도저히 못 기다려요. 어제저녁부터 새벽까지 아예 전화도 받지 않고 기다리다 못해 출발했으니 그리 알아요.
(혜리) : 노~놉! 나 세수도 안 했는데.
(지황) : 당신 코딱지도 예쁜데··· 정 그렇다면 할 수 없군, 몸도 약한데 서두르다가 다칠 수 있으니 천천히 내려와요. 당신이 다치는 건 상상도 하기 싫으니까. 근처 공영 주차장에서 기다릴 테니, 연락하면 바로 올라가겠소.
(혜리) : 알았어요.
(지황) : 사랑해, 혜리!
“와아, 꿀이 뚝뚝 떨어지네.”
몸을 배배 꼬는 혜리.
“그리고 언제 시간 좀 내줘. 마순이랑 수지 씨 자리 좀 마련해 줘야지. 오해는 풀어야 하잖아. 너 그거 모르지! 수지 씨와 마순이 나 따로 불러서 머리 다 뜯어 놓으려고 했했던 거. 근데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지황 씨 데리고 나갔어.”
머리를 뒤로 넘기며 빗질하는 우마리.
“천만다행이다. 혼자 나갔으면 전치 몇 주는 나왔을 거야. 수지와 마순이 네가 지황과 함께 나온 걸 보고 놀랐겠는데.”
“놀라지 않고 굉장히 좋아했어. 잘 됐으면 좋겠다고 양주랑 맥주 소주 주문과 함께 하고 계산해 주고 갔잖아. 그래서 네가 잘 말아서 지황 씨 줬다가 그날 죽는지 알았다. 술을 먹더니 헤라클레스가 되더라고.”
소녀같이 춤추는 혜리 모습에 우마리도 따라 춘다.
“일찍 알아서 다행이네. 타스 그러니까 지황 씨. 로만에서 유명했잖아 술고래 그것도 대왕 술고래로 유명했어. 남은 술까지 다 마시고 술주정도 없고 안색도 안 변해. 다들 혀를 내둘렀다니까.”
“난, 술이 쌘 사람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술 먹고 에너지 충전되는 사람은···”
“혜리야, 너무 기다리게 하는 거 아냐?”
“맞다. 방금 통화해 놓고, 여태 쌓인 오해가 모두 풀릴지 모르겠지만 전부 사실이야. 믿어줘.”
“알았어. 내 걱정은 말고 내려가 봐.”
자꾸만 뒤돌아 보는 혜리.
“나 갈게, 무슨 일 생기면 즉시 전화해 바로 달려올게. 널 힘들게 하면서 나도 많이 힘들었다는 거 알아줘.”
“아냐, 듣고 보니 내가 더 미안하네. 유산도 그렇고···”
혜리가 나가고
"지황과 혜리 너무 잘 어울려."
그녀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잠이 든다.
'풍요로운 곳에 추한 것을 곁들여 놓는다고 했어. 비루한 생명이 있어야 사랑이 멈추지 않는다고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봐야겠어.'
***
재희는 노암 신부를 만났지만 모르쇠로 일관해 알아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 아무 것도가 단서가 된다.
‘가톨릭 성가 병원 9층 특실 병동. 원장 수녀와 노암 신부 그리고 137호실을 숨이 붙어살아가는 동안 결코 잊을 수 없는 일들을.’
집요한 호기심을 가진 재희는 아무 것도에 대해 틈을 벌린다. 오지라퍼 에스델 자매의 환심을 사서 노암 신부 뒤를 캐기 시작한다.
“에스델 스페셜티 G 원두 시음해 봤어요. 언니가 각별하게 여기는 원두인데 내가 자매님 생각해서 추가로 슬쩍.”
“마리아, 난 사람들 입맛이 그렇게 높아진 줄 몰랐어요. 명품 브랜딩으로 입소문을 타서 반응 끝내줘요. 소량의 한정된 양이라 그게 아쉽지만 워낙 고가인데도 매출 일등 공신이네요. 내가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고 잘할게요.”
“부탁한 일은 어떻게?”
“급하시긴, 내가 바당 발 에스델! 알아냈어요. 마리아가 말한 것처럼 그 신부님 바티칸 소속이 맞데요. 그리고 바티칸 소속이신 분이 총세분이라고 하는데 한 분도 신부님이고 다른 한 분은 좀 이상하고 하던데.”
“뭐가 이상한데요.”
“그분은 그냥 이상하데요. 뭐라더라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에스델 그게 무슨?”
“그래서 이번엔 청소 봉사하는 분을 통해서 알아냈지요. 그 이상한 분은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요즘 외출이 잦아졌다고 했어요. 특히 수요일은 어김없이 밖을 나갔다가 들어온데요.”
“수요일 내일이네요.”
에스델이 전자 캘린더를 보며.
“오시려면 10시 전에는 오셔야 할 겁니다. 10시에서 10시 30분 정도에 나간다고 들었어요. 특징은 모자로 얼굴을 가리는데 그냥 보면 안다고 하던데, 걸음걸이도 독특하고 그냥 딱 보면 알 수 있데요.”
쓴웃음을 지으며 재희가 너스레를 떤다.
“에스델 말을 듣기만 했는데도 모습이 그려지네요.”
“근데, 누구길래. 이렇게 마리아 자매님 속을 태우시나.”
'속을 태우기는 무슨.'
"지인분이 오래전부터 찾으셨는데 한국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해서.”
안쓰럽다는 얼굴 표정을 짓는 카페 사장.
“어쩐지. 그분이 몸이 좋지 않으신가 보다. 가시기 전에 뵈려고 그랬구나. 쯧쯧··· 아참! 그분이 나가실 때 루틴이 있데요. 성 김대건 안드레아 흉상을 꼭 지나친다고 하니까, 거기서 기다려 보세요”
“에스델 덕분에 만날 수 있겠네요. 고마워요. 그럼, 난 남은 일이 있어서 가볼게요.”
“네, 네. 시간 날 때 꼭 우마리 님과 또 놀러 오세요. 호호호”
오전 9시. 일찍 도착한 재희는 명동성당 성 안드레아 흉상 주변에 있다. 메리골드로 노랗게 물들인 흉상 아래 화단이 노란 알전구를 켠 듯 밝다.
‘분명 노암 신부는 나를 알면서 모른 척했어. 사람들은 무엇을 감추거나 들키고 싶지 않을 때 보통 그러지. 내가 아무리 모진 말과 행동으로 밀어내고 괴롭혀도 천사처럼 따뜻하게 대해줬던 분이야. 그런 분이 무슨 이유로 나를 모른다고 하는 것일까.’
멀리서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보인다.
"에스델 말처럼 티가 팍팍 나는데.'
누가 보아도 눈에 띄는 느리면서 빠른 기이한 발걸음으로 걷는 신부를 보고 있는 재희.
‘자연스럽게 우선 천천히 뒤를 따라가는 거야.’
성 안드레아 흉상에서 몇 초간 신부가 섰다가 움직인다. 명동성당을 나와 택시를 타려는 듯 정류장으로 향하는 그의 손을 재희가 덥석 잡는다.
“저기요!”
- 작가의말
... 이상하게 상관하지 않았어.
그냥 그날은 마음 가는 대로 움직였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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